<송곳> 속 정민철 부장 <송곳>의 정민철(김희원 분) 부장은 악역이다. 하지만 평범한 악역이 아니다. 사실 우리 중의 많인 이가 정민철처럼 살고 있다. '코리안 스타일'이 지배하는 세상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 <송곳> 속 정민철 부장 <송곳>의 정민철(김희원 분) 부장은 악역이다. 하지만 평범한 악역이 아니다. 사실 우리 중의 많인 이가 정민철처럼 살고 있다. '코리안 스타일'이 지배하는 세상에 순응하며 살고 있다. ⓒ JTBC


JTBC의 12부작 주말드라마 <송곳>이 지난 11월 29일 막을 내렸다. 2% 미만의 다소 아쉬운 시청률을 남겼지만, 무수히 많은 명대사가 화제를 모았다. 마니아층의 큰 호응을 얻었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시시한 강자로부터 시시한 약자를 지켜내는 것", "우리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 "그냥 옆에 있어 주면 돼요" 등의 <송곳> 어록이 남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명대사는 따로 있다. 정민철 부장(김희원 분)이 자신의 잘못으로 입게 된 영업정지 처분을 접대로 손쉽게 해결하는 장면. 프랑스인 상사 갸스통 점장(다니엘 분) 앞에서 정 부장은 자랑스럽게 한마디 내뱉는다. "디스 이즈 코리안 스타일(This is korean style)"이었다. ('style'이란 단어 대신 'way'를 쓰는 것이 보다 영어로서 더욱 자연스러운 어휘 구사이다. 하지만 정 부장 캐릭터를 극화하기 위해 작가는 'way' 대신 'style'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을 보며 많은 시청자가 송곳 같은 것에 깊숙이 가슴을 찔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절망의 끝에 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했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인 '헬조선'을 떠올린 사람들도 많았을 게다. 이 일을 겪은 후, 원리원칙주의자였던 프랑스인 점장 갸스통은 부당해고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지시한다. 자신의 말마따나 한국에 "현지화(Localization)"된 모습을 보여준다.

코리안 스타일

<송곳>의 마지막 투쟁 <송곳> 속 이수인(지현우 분)과 구고신(안내상 분)의 마지막 투쟁 장면. 승리로 끝나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새 '송곳'이 등장하고, 싸움은 또 이어질 것이다.

▲ <송곳>의 마지막 투쟁 <송곳> 속 이수인(지현우 분)과 구고신(안내상 분)의 마지막 투쟁 장면. 승리로 끝나지만,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새 '송곳'이 등장하고, 싸움은 또 이어질 것이다. ⓒ JTBC


'코리안 스타일'의 정민철 부장은 악역이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시청자들로부터 연민을 자아냈다. 고졸 학력에 가진 것 하나 없던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정육 코너 현장에서 일하며 손가락을 베이기도 했다. 물론 회사를 탓하지 않고 자기 잘못으로 넘겼다. 야근도 밥 먹듯 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법도 아무 일 아닌 것처럼 자행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가정보다 상사의 가족을 더 챙겼다. 마지막 회에서 비친 아들의 졸업식 신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정 부장은 자기 아들의 중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는 대신 자신이 모시는 상사인 인사상무(정원중 분)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가서 흥을 돋우는 역할을 했다. 정 부장은 그런 식으로 부장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이런 식의 모습은 정 부장뿐 아니라 드라마 초기에 수산과 주임 황준철(예성 분)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준철은 자신의 약혼녀와의 기념일 약속을 지키는 대신 상사인 허경식 과장(조재룡 분)의 프러포즈 자리에 불려나가 장식용 풍선을 분다.

사실 이런 장면들은 그리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밤마다 이런저런 접대 자리에 끌려다니며 가정을 소홀히 하는 모습은 기실 우리네들의 이야기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이런 그림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이나 사회생활에 적응 잘하는 것이란 긍정적 의미로 윤색됐다. 그렇게 '코리안 스타일'은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토사구팽

마지막회에서 정 부장은 궁지에 몰린다. 노동조합의 파업과 인사상무, 갸스통 점장, 부하 직원인 고 과장(공성환 분) 등의 사내정치가 그를 압박했다. 여기에 노모의 병환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결국 악수를 둔다. 인사상무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 위해 매장 밖에서 농성 중인 푸르미 노동조합원들에 대해 테러를 교사한 것이다.

정 부장이 지시한 테러에 크게 다치고 병원에 실려 간 조합원은 과거 정 부장과 같은 정육 코너 직원이었다. 이는 정 부장의 추락을 암시한다. 정 부장은 테러 이후 폭력교사죄로 경찰서에 끌려간다. 인사상무는 그런 그를 앞에서 모른 척한다. 경찰서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아들에게 전화로 이번 졸업식엔 꼭 아빠가 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가진 게 없던 정 부장은 간도 쓸개도 다 가져다 상사에게 바쳐야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편 아픈 노모를 요양원 대신 자신이 직접 모시려고 했던 효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 부장을 보는 우리네들의 감정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마음 놓고 미워하기엔 뒤가 찌릿하다. 잘했다고 응원을 할 수도 없는 악인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를 두고 그저 "짠하다"라고들 표현했다.

어떤 누리꾼은 <송곳> 종영 관련 기사에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도 푸르미 노조원이었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분명 맞는 말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정 부장이기도 했다"라는 부끄러운 고백을 덧붙이고 싶다. 우리는 아무래도 주인공인 이수인 과장(지현우 분)이나 구고신 소장(안내상 분)보다는,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자신의 이익을 셈하던 푸르미 노조원이나 정 부장에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송곳' 김희원, 미워만하지 마세요!    6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 드라마세트장에서 열린 JTBC 특별기획 <송곳> 현장공개에서 부장 정민철 역의 배우 김희원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송곳>은 최규석 작가의 동명 웹툰을 드라마화 한 작품으로 대형마트에서 벌어진 부당해고와 이에 대항하기 위해 뭉친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토, 일요일 밤 9시 40분 방송.

▲ <송곳> 김희원, 미워만하지 마세요! 가진 게 없던 정 부장은 간도 쓸개도 다 가져다 상사에게 바쳐야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한편 아픈 노모를 요양원 대신 자신이 직접 모시려고 했던 효자이기도 했다. ⓒ 이정민


마지막까지, 코리안 스타일 = 새로운 싸움

해고를 지시하던 정 부장은 끝내 가장 먼저 해고되었다. 추악한 '코리안 스타일'의 서글픈 최후였다. 해고를 막던 이수인은 끝내 모두를 지켜냈다. 대신 자신은 다른 매장으로 전출되었다. 승리했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새로 발령받은 매장의 이수인 자리에는 컴퓨터가 없다. 회사의 치졸한 보복이다. 역시 너무 낯익은 한국식 광경이다. 하지만 이수인은 PC방에 앉아 자신의 책상에 컴퓨터가 없다는 이메일을 푸르미 본사로 보내며 새로운 싸움을 예고했다. 드라마 말미엔 탤런트 이종수 등이 카메오로 출현하며 이제 막 첫발을 뗀 의기 넘치는 신입 '송곳'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이 짧은 드라마는 끝이 났다. 길고 길 우리들의 이야기를 남겨둔 채.

○ 편집ㅣ곽우신 기자


송곳 이수인 구고신 정민철 김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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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노무사. 반려견 '라떼'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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