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도리화가> 포스터 판소리는 성장 중이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판소리는 대중 문화로 자리잡아, 19세기부터 그 정점을 찍는다. 장터에서 울려 퍼지던 판소리는, 서민의 경제력 상승 덕이었다. 기득권의 지배 도구로 머물러 있던 음악은, 서민의 애환을 달래는 음악으로 탈바꿈했다.

▲ 영화 <도리화가> 포스터 판소리는 성장 중이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판소리는 대중 문화로 자리잡아, 19세기부터 그 정점을 찍는다. 장터에서 울려 퍼지던 판소리는, 서민의 경제력 상승 덕이었다. 기득권의 지배 도구로 머물러 있던 음악은, 서민의 애환을 달래는 음악으로 탈바꿈했다. ⓒ CJ엔터테인먼트


지금은 누구나 다 스마트폰에 음악을 저장하고 다닐 수 있지만, 사실 음악은 본래 지배층의 것이었다. 몇백 년 전만 해도, 서민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음악을 듣고 다닌다는 것은 국가나 지배층이 보기에는 매우 '불온한 짓'이었다.

고대로부터 국가와 지배층은 음악을 통해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고 민심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여기서 말한 '올바른'이란 국가와 지배층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에는 국가가 음악을 장악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이것은 국가의 명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는 강태공의 병법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삼략>에도 드러난다. 이 책의 '하략' 편에는 백성의 자발적 복종을 얻어내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백성이 몸을 굽히게 하려면 예법으로 다스리고, 백성이 마음으로 복종하게 하려면 음악으로 다스려야 한다." - <삼략> '하략' 편 중에서

무력을 통해 백성을 억지로 복종시키기보다는 예법과 음악으로 백성의 자발적 복종을 얻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유사한 이야기는 <맹자>에도 나온다. 이 책의 '공손추' 편에는 "예법을 보면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면 군주의 덕을 알 수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음악을 들으면 군주의 통치에 관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음악과 정치가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하는 의문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면, 좀 심한 비유 하나를 연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는 축사에 가면, 가축의 생체 리듬에 맞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이런 음악을 켜는 목적이 무엇일까. 고대 군주들이 음악을 통해 복종을 얻어내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백성을 순화하는 정치 도구로서의 음악

 판소리의 주 무대였던 조선시대 장터. 경기도 용인시의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판소리의 주 무대였던 조선시대 장터. 경기도 용인시의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국가가 백성에게 원한 것은, 백성들이 열심히 일해서 세금 잘 내고, 군대 복무 의무도 잘 지키면서 군주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이런 백성들을 만들 목적으로 고대 국가는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처럼 음악이란 것은 본래 지배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와서 이것이 피지배층의 것이 되고 말았다. 한국 역사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 것은, 임진왜란으로 국가 질서가 동요되고 산업환경이 뒤바뀐 17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서민들이 음악을 포함한 예술 무대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18세기부터는 대중의 공간인 장터에서 자기들의 음악을 노골적으로 공연했다. 거리에는 지배층을 위한 음악이 아닌 피지배층의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음악은 더는 피지배층을 순화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피지배층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그들 자신을 위로하는 도구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화적 전환을 반영하는 장르 중 하나가 영화 <도리화가>의 소재가 된 판소리다. 이 영화는 지난 11월 25일 개봉했다.

<도리화가>는 판소리 전문가이자 기획자인 신재효(류승룡 분)가 여성 제자인 진채선(배수지 분)을 가르친 뒤, 제자와 함께 경복궁 경회루에서 공연을 펼치는 과정을 묘사한 영화다. 더불어 신재효와 진채선 사이에서 형성된 묘한 감정과 여기에 끼어든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 인한 삼각관계도 함께 다뤘다.

소리(노래), 아니리(말), 발림(연기)으로 구성되어 있어 조선판 뮤지컬이라고도 볼 수 있는 판소리가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판소리가 대중문화로 자리를 잡은 것은 18세기이고, 19세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맞는다.

신재효와 진채선이 활동한 시기는 19세기다. 판소리 전성기였기에 경복궁에서 공연도 하고 대원군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대원군은 박유전이라는 판소리 명창을 특히 좋아했다. 박유전은 판소리 유파 중 하나인 서편제의 시조였다. 대원군은 그가 무과에 급제할 수 있도록 힘을 쓰기도 했다. 이렇게 지배층 인사의 마음을 살 정도로 서민문화 판소리가 18세기 이후에는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됐다.

서민 문화인 판소리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람들이 판소리를 구경할 수 있고 제작할 수 있는 '경제력' 상승이 있다. 서민들이 물건을 사러 장터에 나갈 만큼의 경제력을 축적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호주머니를 겨냥한 판소리 공연이 기획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상인 중에는 판소리가 갖는 대중적 흡인력을 간파하고, 돈을 들여 판소리 공연을 유치하고 이를 발판으로 손님을 끄는 이들도 있었다. 상인들이 서민들의 호주머니에 눈독을 들였다는 것은 부와 재물이 서민층으로 이동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대중의 대표적 광장인 장터에서, 대중의 판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는 이 나라가 선비의 나라가 아니라 서민의 나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음악이 더 이상은 지배의 수단으로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양반마저 매혹한 서민 문화의 결정체 '판소리'

가왕 송흥록 생가에 세워진 그의 동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위치한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살았던 곳으로 10가구의 주민을 이주하고 그 시대의 초가형태로 지난 2000년 7월 28일 복원하였다.

▲ 가왕 송흥록 생가에 세워진 그의 동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 위치한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이 살았던 곳으로 10가구의 주민을 이주하고 그 시대의 초가형태로 지난 2000년 7월 28일 복원하였다. ⓒ 연합뉴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전에 학교에 다닌 초등학생 중에는 장래 희망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가수가 될래요"라고 말하는 학생이 별로 없었다. 그중 상당수는 대통령이나 장군을 희망한다고 답변했다. 교사가 되겠다고 말하는 아이는 꽤 '겸손'한 축에 들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장래에 가수가 되겠다고 말하는 어린 학생들이 적지 않다.

이런 아이 혹은 청년들이 19세기에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송흥록이란 사람이다. 판소리 명창으로 손꼽히는 송흥록은 이른바 양반 가문의 자제다. 그는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판소리에 푹 빠져 버렸다.

송흥록이 동경하는 사람들은 유교 경전에 나오는 성인군자들이 아니었다. 또 성인군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고 생원이나 진사가 되거나 중앙 관료가 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가 동경하는 사람들은 소리를 우렁차게 뿜어내며 구경꾼들의 환호성을 듣는 판소리 가수들이었다. 그는 그런 스타들을 동경하고 그 길을 걷고 싶었다.

집안사람들은 당연히 송흥록을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이런 송흥록은 가문의 수치였다. 부모·형제는 양반 가문에서 무슨 판소리냐며 소리꾼을 그만둘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송흥록은 고집불통이었다. <도리화가>의 진채선처럼, 송흥록도 판소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만한 사람이었다. 결국, 가족은 최종 선택을 문중에 맡겼다. 문중에서는 회의를 열어 결론을 도출했다.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문중 사람들은 송흥록을 때려죽일 목적으로 거적으로 둘둘 말았다. 그러자 송흥록은 마지막으로 소리나 한번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문중 사람들은 그에게 '최후의 공연'을 허락했다.

송흥록은 거적으로 둘둘 말린 상태에서 공연했다. 훗날 송흥록이 가장 잘 부른 노래는 <춘향가>나 <만학천봉가>였다. 거적으로 말린 상태에서 그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때 어찌나 멋있게 소리를 했던지 문중 사람들은 모두 다 감동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집안에서는 송흥록의 길을 인정했다. 대신, 족보에서 송흥록의 이름을 지웠다고 한다.

그 뒤 송흥록은 판소리에 집중하여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특히 귀신 울음 같은 소리를 잘 내었다고 한다. 양반집 아들이 귀신 울음소리를 잘 냈으니, 그의 출신을 아는 사람들은 "양반집 아들이 참 희한도 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송흥록의 사례는, 서민 출신의 판소리 스타들이 양반집 자제의 진로를 바꿀 정도로, 판소리 문화가 전성기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전반의 판소리 명창인 모흥갑의 무대를 묘사한 그림. <평양감사 환영연도>에 포함된 그림.

19세기 전반의 판소리 명창인 모흥갑의 무대를 묘사한 그림. <평양감사 환영연도>에 포함된 그림. ⓒ 위키피디아


<도리화가>의 남자 주인공인 신재효의 사례도 송흥록의 사례와 유사한 면을 갖고 있다. 신재효는 양반 가문의 자제는 아니지만,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유층 출신이었다. 그는 전라도 고창현의 이방으로서 갑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드라마 속의 이방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사또 앞에서 아부나 떠는 사람이지만, 실제의 이방은 지금으로 치면 구청이나 군청의 국장급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구청이나 군청의 국장급을 쉽게 상대할 수 없다.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신재효는 양반층은 아니지만, 서민층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지위의 소유자였다.

그런 사람도 판소리의 길을 걸었으니, 19세기에 판소리가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으로 서민 대중이 역사무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며, 그들이 음악 소유권을 쟁취하게 되었음을 반영한다.

19세기 말 이래 일본의 침략으로 한국 대중이 일본의 총칼 아래 숨죽이지 않았다면, 한국의 판소리는 20세기에도 계속해서 대중문화를 선도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제의 침탈로 인해 19세기를 정점으로 판소리는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처음에는 지배층의 도구로 등장한 음악이 이렇게 17·18·19세기에는 서민의 애환을 표출하는 도구로 바뀌더니, 20세기에는 지배층을 위협하는 도구로까지 발전했다. 197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수많은 대중가요를 금지했다. 이는 서민 대중의 음악이 지배층에 그만큼 위협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 역사에서 음악의 지배자가 지배층에서 서민 대중으로 바뀌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게, 판소리라는 조선판 뮤지컬이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도리화가 신재효 진채선 판소리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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