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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일주일 만에 퇴원을 하고 나니 연천 금가락지 텃밭에 아직 거두지 못한 양배추와 상추, 배추, 당근이 염려되었다. 더구나 모레(11월 27일)는 영하 8도까지 수은주가 내려가는 강추위가 온다고 하지 않는가?

눈속에 묻힌 양배추
 눈속에 묻힌 양배추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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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만 혼자 연천에 다녀올 테니 당신은 이곳에 있어요."
"나도 가야지요. 갑자기 입원을 하는 바람에 정리할 것도 많고 가져 올 것도 많아요."

다음날 내가 극구 말리는데도 아내는 기어코 따라나섰다. 연천으로 가는데 눈이 펑펑 내렸다. 산과 들이 점점 하얗게 덮여 가고 있었다. 동두천을 지나다가 28사단 근처 <옥이네 순두부>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연천 집에 가면 밥을 하기도 늦어지고 양배추 등만 설거지를 하여 당일로 남양주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다. 소고기 순두부를 먹던 아내가 틀니를 꺼내서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금니를 세 개나 빼고 나니 틀니가 제대로 걸리지 않아 통증이 와서 더 이상 낄 수가 없네요."
"그것참, 많이 불편하겠네. 그 틀니 잘 보관하세요."

점심을 먹고 연천 집에 도착하니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텃밭으로 나갔다. 텃밭에는 양배추가 눈을 맞으며 껍질이 얼어 있었다. 만약 영하 8도로 내려가는 내일까지 이대로 두면 양배추 전체가 얼어버릴 것이다. 양배추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낫으로 베어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내가 거실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여보, 큰일 났어요! 빨리 보일러실로 가 봐요!"
"무슨 일이오?"
"하여간 빨리 가 보기나 해요."

톡톡히 치러야 하는 낭만의 대가

물바다가 되고만 다용도실
 물바다가 되고만 다용도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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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자지러지는 재촉에 보일러실로 가보니 보일러실은 물론 다용도실까지 물바다가 되어있다. 맙소사! 어디가 터졌나? 물은 발목이 빠질 정도로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보일러실로 들어가 점검해보니 세탁기에 연결한 호수가 터져 그곳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거야 정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보일러가 터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바가지와 양동이를 동원해서 다용도실과 보일러실의 물을 퍼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이 한겨울에 홍수가 나다니... 그것도 꼭 내가 집을 비울 때만 이런 일이 터진다.

수도가 터진 것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첫 번째는 화장실 세면대의 호수가 터져서 물이 며칠간 샜다. 그때는 여름철이었는데 가족들과 휴가를 간 사이에 거의 10여 일간 물이 샌 것이다. 그다음에는 보일러실의 온수통이 터져 보일러실이 강물이 된 적이 있었다. 집이 오래되다 보니 여기저기 설비가 노후화되어 애를 먹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꼭 집을 비울 때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어설픈 농부가 집을 비운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다용도실에 놓아둔 고구마, 반찬, 곡식 등이 물에 다 젖고 말았다. 2시간여 동안 물을 퍼내고 다용도실과 보일러실을 정리했다. 허리가 휘어질 것만 같다. 누가 귀촌을 낭만이라고 했던가? 겉으로 보기에는 낭만처럼 보이는데, 낭만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이럴 땐 내가 그 편안한 아파트 생활을 하지 않고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후회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눈 속에서 캐낸 양배추와 당근... 그리고 싱싱한 상추

눈속에 묻힌 양배추
 눈속에 묻힌 양배추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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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된 보일러실을 정리하고 나는 다시 텃밭으로 나갔다. 어두워지기 전에 텃밭에서 일을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텃밭을 바라보니 강물이 된 보일러실과 다용도실을 정리한 고통스러운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귀촌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지만 역시 자연이 넘치는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콘크리트로 숲을 이루는 도시에 비하면 얼마나 멋진 풍경인가?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텃밭이 나오고, 임진강 주상절리와 남계리 벌판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막힘이 없는 풍경, 산새 우는 소리, 고라니 우는 소리, 고요함... 뭐 이런 것들이 불편한 생활을 상쇄시키고도 한참 남는다. 

허공에서 춤을 추며 펄펄 낙하하는 눈송이는 자연이 너울너울 겨울 춤을 추는 모습이다. 함박꽃 같은 눈송이가 만다라처럼 쏟아져 내린다. 눈이 내리면 나는 괜히 행복해진다. 수도가 언제 터졌느냐는 듯 나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나는 양배추에 쌓인 흰 눈을 털어내고 낫으로 양배추 뿌리를 하나하나 베어냈다. 추위에 시달리던 양배추는 내가 뿌리 밑동을 자를 때마다 "쩍!" 하고 외마디 비명을 냈다. 그뿐이다. 양배추는 나동그라지며 곧 조용해졌다. 나는 금년에 30여 포기의 양배추를 심었다. 다행히 양배추가 잘 커 주어 절반은 캐서 지인들과 나누어 먹고 절반 정도가 남아있다. 농약을 일체 치지 않고 애지중지 키워온 무공해 양배추라서 더욱 애정이 간다.

고라니가 갉아 먹은 양배추
 고라니가 갉아 먹은 양배추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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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포기는 고라니가 갉아 먹었는지 겉껍질이 벗겨지고 노란 배춧속이 보였다. 수확을 한 양배추를 거실로 옮겨 신문지로 일일이 싸서 김치냉장고에 차곡차곡 보관을 했다. 노란 배추 속잎을 한 잎 뜯어서 입에 넣고 우직우직 씹어보니 달고 신선하다. 고라니가 먹는 것은 역시 맛이 있다. 그러므로 녀석들이 먹는 풀을 먹으면 아무런 탈이 나지 않는다. 농작물을 해쳐서 밉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라니한테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양배추를 캔 다음에는 눈 속에 묻힌 당근과 김장을 하고 남은 배추를 캤다. 언 흙 속에서 당근을 캐낼 때마다 당근 특유의 향이 코를 찌른다. 미니 비닐로 덮어 두었던 상추도 마지막으로 수확을 했다. 로메인 상추와 청겨자 상추가 작은 터널 속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다. 브로콜리도 마지막 수확을 했다. 한겨울에 이렇게 푸르고 싱싱한 채소를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은 더없이 즐겁고 기쁜 일이다.

눈 덮인 당근밭
 눈 덮인 당근밭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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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땅에서 캐낸 당근
 언 땅에서 캐낸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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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하우스에서 자라나고 있는 상추
 미니 하우스에서 자라나고 있는 상추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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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서 자라는 브로콜리
 눈 속에서 자라는 브로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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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양배추, 배추, 상추, 당근을 일부는 땅 속에 묻은 김칫독과 김치냉장고에 보관을 하고 일부는 박스에 넣어 자동차에 실었다. 당분간은 아내가 병원에 다녀야 하므로 남양주 아이들 집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보일러실 수도가 터져 혼비백산했지만 이렇게 싱싱한 야채를 수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행복해지는군요."
"이런 맛 때문에 불편하지만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겠소? 하지만 이번에는 수도계량기에 있는 밸브를 아주 잠가야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정말 진즉 그래야 했어요. 다음 달에 수도 요금이 얼마나 나올지 걱정이 되는군요."
"어쩔 수 없지 않소? 농부가 태만하게 집을 비웠으니 그 직무유기를 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나는 다음에 돌아올 때까지는 제발 아무 일이 없기 바라며 집을 향하여 합장을 하고 대문을 잠갔다. 그리고 대문 밖에 있는 수도계량기의 밸브도 잠갔다. 연분홍으로 피어난 국화꽃이 잘 다녀오라고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갈색으로 변하고 스산해진 금가락지에 오직 국화만이 피어나 뜨락을 지키고 있다. 나도 국화에게 미소를 흘려보내며 "잘 있어, 곧 돌아올게" 하고 읊조렸다. 눈 속에서 피어난 국화다! 과연 내가 돌아올 때까지 피어 있을까?

"여보, 뭐 빠진 것 없이요?"
"네, 다 확인했는데 없어요."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요. 또 서울 다 가서 어머나! 하지 말고요."
"이이가 정말, 나를 어떻게 보나요. 이번에는 몇 번이나 확인에 확인을 했다니까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요."
"하하, 그러면 다행이고요."

다행히 눈이 멎어 길이 그렇게 미끄럽지는 않았다. 우리는 어두워져서 남양주 집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부엌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또 무슨 일이요?"
"내 틀니가 없어요."
"틀니?"
"네, 아마 그 옥이네 순두부집 탁자에 그냥 두고 온 것 같아요."
"그것뿐이오? 뭐, 약을 두고 온 것은 없는지 다시 한 번 챙겨 봐요."
"어머나? 내 핸드폰도 없네! 마루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대로 두고 온 것 같아요."

이거야 정말! 인터넷을 뒤져 옥이네 순두부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몇 번 탁자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혹시 거기에 틀니가 없는지 좀 살펴봐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없다고 하더니 쓰레기통을 뒤져서 겨우 찾아냈다고 한다. 바쁜 시간에 쓰레기통을 뒤지느라 고생을 했을 식당 종업원에게 너무 미안하고 감사했다.

"아이고, 정말 미안하고 감사합니다. 다음에 점심을 먹으러 갈 테니 잘 좀 보관해 두세요."
"네, 걱정 마세요."

어찌할꼬?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 점점 건망증은 심해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지하철에 우산을 두고 내리거나 핸드폰이나 지갑을 챙기지 않고 집을 나서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므로 다음에 챙겨야지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때그때 생각이 났을 때마다 하나씩 챙겨야 한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귀촌, #텃밭, #양배추,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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