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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자리잡은 생태보존 지구,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이다.
 도시에 자리잡은 생태보존 지구,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이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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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남미 여행을 떠나기 전, 아르헨티나 여행을 준비하며 스페인에 있던 아르헨티나 친구 리카르도를 만났었다. 그는 이미 스페인에 산 지 24년이 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도를 펴놓고 이곳 저곳 봐야 할 것과 전체적인 분위기들을 설명해 나가던 그는 거의 10여 년 다시 돌아가지 않은 그의 도시에 대한 향수에 흠뻑 젖은 듯 보였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라는 그에게 "그렇게 그립고 좋은데 왜 돌아가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슬픈 일이지만 거기에서는 지금의 삶의 질을 기대할 수 없다. 내가 일한 만큼 나아지는 삶이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아르헨티나에 사는 그의 친구가 그에게 메신저로 보낸 문자를 보여주었다. 친구의 마지막 문장은 씁쓸했다.

"친구. 네가 스페인에 있기로 한 건 정말 잘 한 일이야. 여기 삶엔 답이 없어. 선거가 있지만 결국 마찬가지겠지. 돌아오지 말고 거기서 잘 살아."

그 탓이었을까.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대하는 첫 마음은 도시 이름의 의미인 "좋은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무거웠다.

구둣방 뒤에서 하는 환전

카르치네르 문화센터 내부
 카르치네르 문화센터 내부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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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달러 공식 환율과 거리 환율이 상당히 다른 것은 여행객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다. 내가 있었던 10월 말에서 11월 사이에 달러 공식 환율은 9페소 정도였는데 거리에서는 15페소에서 16페소까지 올라갔다.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암 환전을 하게 되어 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금 긴장이 되어 "깜비오(환전)"를 외치는 사람들 중 그나마 점잖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금액을 물어보고 아저씨를 따라갔다.

몇 블록을 지나 도착한 곳은 건물 지하의 미니 은행과 같은 환전소였다. 거리 환전 '삐끼'들과 함께 속속 여행자들이 들어와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서로를 살펴보는 풍경이 참 아이러니 했다. 각자 이야기 되고 온 환전율도 달라 담당 '삐끼'는 종이에 손님과 거래된 금액을 적어 안에 넣어주면 계산해서 돈을 내어주는 방식이었다.

그 다음 환전은 길가의 한 구두 가게에서였다. 구두 가게 뒤의 작은 통로를 지나가지 책상 하나 달랑 놓여있는 환전소가 있었다. 나를 데리고 간 후안은 당당히 자기 명함을 주며 다음에도 자기를 찾아달라고 했다.

불안정환 화폐와 인플레는 아르헨티나 경제의 화두이다. 2년 전 자료로 찾아본 버스 요금이 2년 사이에 2배로 뛰는 상식적이지 않은 물가상승, 경찰 옆에서 스스럼없이 암 환전을 외치는 사람들. 이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도시의 한 단면이었다.

말로만 듣던 소스 테러가 정말...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어서인지 도시에 있는 동안 다른 도시보다는 약간 긴장하며 지낸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몇 번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어느 일요일 대체로 한가했던 날, 의회 쪽 거리를 걸어가는데 머리 위로 이상한 액체가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게 소스 테러구나' 10년 전 볼리비아에 갈 때 수도 라 파스에 소스 테러로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종종 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10년 후 아르헨티나에서 그 실제를 경험한 셈이다.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걸어가니 소스 뿌린 사람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잃어버린 것은 없었지만 온 몸에 소스 냄새가 진동하니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한번은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옆 좌석에 있던 관광객 팀에서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내 가방!" 하고 외쳤다. 돌아보니 의자 옆에 걸어놓은 가방을 순식간에 도둑맞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길에서 들어온 한 아이와 함께 들어온 여성이 가지고 갔다고 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들 정신이 없었다.

이런 경험을 이야기를 하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만난 사람들의 답변은 두 가지이다. "여긴 도둑 소굴이야. 모든 곳에 도둑들이 있어. 슬픈 일이야"라는 극 부정적 의견과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지 않아? 단지 조금 더 주의를 해야 할 뿐이야.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어"라는 다소 긍정적인 의견이다.

한 도시를 편안한 마음으로 활보하고, 긴장을 조금 늦출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은 분명 씁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도시를 그런 단편적 경험으로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은 일이다.

문화에 대한 태도

지하철 안 음악가. "살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내 꿈위를 걷고 싶어" 노랫말이 도시인들의 얼굴위를 지난다.
 지하철 안 음악가. "살고 싶어, 벗어나고 싶어, 내 꿈위를 걷고 싶어" 노랫말이 도시인들의 얼굴위를 지난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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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오래된 지하철(이곳에서는 '수브떼'라 불린다)에서는 많은 음악가를 만난다. 어느 도시의 지하철이나 팁을 요구하며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도시의 음악가들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엠프와 마이크까지 설치하고 정말 공연하듯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가들이 꽤 있었다.

이를 듣는 사람들도 귀찮은 얼굴이 아닌 진지하게 음악을 경청하고, 좋은 음악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는 조금은 다른 분위기였다. 저절로 좋은 음악에 대해서는 팁을 주게 되는 분위기였다. 단지 돈을 위한 연주가 아닌 조금은 본질적은 문화의 얼굴이 같이 남아 있는 듯하여 좋았다.

키르치네르 문화센터 역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만난 놀라운 공간이었다. 2003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키르치네르의 이름을 땄다. 그와 그의 아내로 이어진 12년간의 정권은 키르치네르주의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최근 선거결과는 결국 이 정권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옹호의 목소리 만큼 그동안 비판의 목소리도 커져왔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정책은 현재 아르헨티나에 국영화나 복지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는 평가가 있다.

이 문화센터는 옛 우체국 건물을 리모델링하였는데 큰 푸른 고래모양의 거대 공연장을 내부에 갖춘 문화센터이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콘서트, 전시 등 양질의 프로그램들은 모두 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대부분의 박물관과 문화생활들이 무료이고, 복잡한 도심이지만 각 지역마다 넓은 녹지대와 공원이 형성되어 있었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여러 어려움 속에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조금은 삶의 숨통들이 마련되어 있고, 이를 잃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 역시 지속되고 있었다.

맥도날드의 빅맥과 버거킹의 와퍼 사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메인 도로에는 에바 페론의 조형물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메인 도로에는 에바 페론의 조형물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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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머물던 한 달은 정확히 첫 선거가 있었던 시기에서 재선이 있었던 시기의 사이였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선거 이야기를 했다. 기존 정권의 후보인 시올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현 정권을 비판하지만 현재 아르헨티나가 가진 좋은 제도들을 모두 바꾸려는 마크 리의 정책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페론주의나 키르츠네르주의라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역사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은 우파 후보인 마크리를 지지했다. 둘 다 대안이 될 수 없다며 기권표를 낼 거라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11월 22일 선거는 마우리시오 마크리의 승리로 끝났다. 백지표를 내려다가 마크리가 될까 걱정된다며 시올리를 투표할 거라던 한 친구가 재선 날 아침 SNS에 올린 글이 재미있다.

"아르헨티나는 오늘 마치 맥도날드의 빅맥과 버거킹의 와퍼 사이의 선택을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실 채식주의자들인데 말이다. 그래도 적어도 선거할 수 있다는 것이 어딘가?"

유럽과 흡사한 남미의 도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한때 아르헨티나인들은 자기들은 남미의 사람들이 아닌 유럽의 한 혈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무리 '척'을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고, 그 땅의 자원과 가치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변화'라는 슬로건을 내건 아르헨티나의 새 정부가 말하는 변화가 과연 그 길 위에 있는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조금 느려도 내가 가진 것으로 삶을 구축하는 일은 한 개인이나 나라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르헨티나에 머문 한 달 동안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태그:#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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