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며칠 전이었다. 집 앞 마트에서 아이들과 함께 주전부리를 사서 나오는 길이었다. 꼬마 둘이 마트 주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지갑을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안타까이 흘깃거리며 마트를 몇 발짝 벗어나는데, 바닥에 지갑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눈처럼 하얀색이어서 잘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얼른 주워들어 건네주었다. 오빠로 보이는 큰 아이가 크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똥준(둘째 별명)아, 돈 많이 버는 부자로 살고 싶어? 남 돕는 착한 사람이 되어 살고 싶어?"

집으로 돌아와 7살 둘째 아들에게 물었다. <마법 천자문>을 보고 있던 아들이 "몰라요." 하고 짧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돈 안 좋아?"
"……."
"똥준아, 아까 아빠처럼 네가 길거리에서 지갑을 주웠어. 그런데 안에 1만 원짜리 돈이 10장이나 있네. 어떻게 하고 싶어?"
"주인 찾아줘야지."

아들이 주저하지 않고 내뱉는다. 아들 녀석의 진짜 마음은 무엇일까.

인간은 '뒤틀린 목재'다

인간의 품격 겉표지
 인간의 품격 겉표지
ⓒ 부키

관련사진보기

베스트셀러 <보보스>의 저자이자 <뉴욕 타임스>의 기명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가 쓴 <인간의 품격>(2015, 부키)을 읽었다. '빅 미(Big Me), 자기과잉의 시대'를 대표하는 '아담 1'과 '리틀 미(Little Me), 겸손과 절제'를 표상하는 '아담 2'라는 두 가지 인간 유형에 터 잡아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있는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담 1은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물질적 풍요와 개인의 능력을 최우선시하는 시대에 탁월하게 적응할 줄 아는 인간형이다. 아담 2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이마누엘 칸트의 말, "인간이라는 뒤틀린 목재에서 곧은 것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로 보는 인간관을 기초로 한다. 인간은 누구나 결함을 지닌 존재라는 것, 따라서 인간의 삶이란 결함 있는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투쟁하며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관점을 따른다.

책의 대부분은 아담 2의 삶을 살다 간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게으른 소녀에서 뉴딜의 막후 조력자가 된 프랜시스 퍼킨스, 충동적 반항아였다가 중용의 미덕을 갖춘 최고의 정치 지도자로 성장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내면의 악에 맞선 비폭력 인권운동가 필립 랜돌프와 베이어드 러스틴 등이 눈길을 끈다. 저자의 평처럼 이들 아담 2형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결함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내면의 죄악을 극복하기 위해 뜨겁게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는 일종의 도덕적 희열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든다. 거친 도전을 받아도 온화하게 응답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침묵을 지킨다. 모욕을 받아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자극을 받아도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성취를 해낸다.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도 마치 일용품을 사러 장에 가듯 눈에 띄지 않는 겸손한 태도로 그 일을 해낸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인상적인 것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서 아예 생각을 하지 않는다.' (14쪽)

안타깝게도 현대는 아담 1의 인간형이 득세하는 시대다. 물질주의와 개인주의 팽배, 공감 능력의 결여로 특징지어진다. 미국 UCLA 대학이 매년 미국 전체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가치관을 측정하는 표본 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1966년에 삶의 철학을 발전시키려는 의욕을 갖고 있다고 답한 학생은 80%였다. 지금은 같은 대답을 하는 학생이 절반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1966년에는 신입생 가운데 42%가 부유해지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1990년에는 같은 대답을 한 학생이 74%로 늘어났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적인 의미의 개인주의 확산이 '절친(절친한 친구)'의 수를 급격하게 줄였다고 한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네댓 명 된다고 응답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이제는 두세 명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한 명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두 배 늘었다고 한다. 조사 대상 중 35%는 만성적인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10년 전의 20%보다 크게 늘어난 것이다.

공감 능력의 감소도 눈에 띈다. 요즘 대학생들은 1970년대 대학생들에 비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에서 40%나 낮은 점수를 보인다. 이러한 현실은 공공언어에서 도덕성의 감소를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들과 연결된다. 구글 엔그램(매체 전체에 걸쳐 단어 사용 빈도를 측정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수십년간 책과 출판물의 내용을 스캔해 단어 사용 현황을 검토한 결과라고 한다.

'지난 수십 년 사이에 개인주의적 표현들, 가령 '자신', '개인화된', '내가 먼저', '나 스스로 할 수 있어' 같은 표현의 사용 빈도가 급격히 증가했고, '공동체', '공유', '연합', '공공선' 같은 공동체적 표현의 사용은 급격히 감소했다. 또한 경제와 비즈니스에 관한 단어 사용은 증가했고, 도덕성과 인격 도야에 관한 단어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인격', '양심', '덕목' 같은 단어의 사용은 20세기 내내 감소 추세를 보였다. '용기'라는 단어의 사용은 20세기를 거치면서 66퍼센트 감소했다. '감사'는 49퍼센트, '겸손'은 52퍼센트, '친절'은 56퍼센트 사용 빈도가 낮아졌다.' (458쪽)

1886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성공한 치안판사로 멋진 새집에 이사한 이반 일리치의 삶을 그렸다. 어느 날 주인공은 새집 창문에 커튼을 달다가 떨어져 다친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을 안 썼다. 그런데 점점 입에서 이상한 맛이 느껴지며 몸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마흔다섯 살 나이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능력 있고, 명랑하고, 성격 좋고, 사회성도 좋은 사람"이었던 주인공은 생의 마지막을 향하는 길목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방법이 틀린 건 아니었을까?"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장래에 대해 물을 때가 있다. "어떻게 살고 싶니?" 출세해 돈 많이 벌어 멋지게 살고 싶다고 한 입으로 대답한다. 평범하지만 정의롭고 도덕적인 시민으로 살겠다고 대답하는 아이는 없다. 한 번도 돈 많이 벌어 부자로 살라고 하지 않았건만, 11살짜리 큰딸은 나중에 돈 많이 벌겠다고 한다. 식구들에게 맛있는 것 많이 사주고 싶어서라지만 왠지 씁쓸하다.

저자는 결론에서 우리가 '뒤틀린 목재론'이라는 인간관을 인정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내면을 응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모두 휘청거리며 산다. 균형을 잃고 감정에 휩쓸리거나 세상과 타인의 공격에 언제든 나가떨어질 수 있다. 그렇게 힘 없고 흠 많은 우리 자신을 차분히 응시하면서 겸손하게 세상에 응전하기를 권한다.

'겸손한 사람은 자애롭게 마음을 달래 주는 반면,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취약하며 늘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입증해 보여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만심에 빠진 사람은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이기심, 경쟁심, 우월해지고자 하는 욕구에 탐욕스럽게 허덕인다. 겸손에는 존경심과 동료애,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과 같은 아름다운 감정이 배어 있다. (중략)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 본성에 있게 마련인 편견과 자만심을 어느 정도 극복한 사람들이다. 지적 겸손의 가장 완전한 의미는 멀리서 바라본 자신에 대한 정확한 자각이다. 스스로를 아주 가까이에서 클로즈업해 보며 캔버스를 온통 자기 자신으로 채우는 청소년기의 관점에서 시야를 확대해 풍경 전체를 조망하는 관점으로 삶의 과정이 이행해 가는 것이다.' (30~31쪽)

진정으로 용기있는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갈등에서 성숙해진 사람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과 악을 가르는 경계는 국가나 계급, 혹은 정치적 당파를 가로질러 나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각자의 심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인간의 품격>(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11.20. / 494쪽 / 1만 6500원)
정은균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인간의 품격 -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빌 게이츠 선정 올해의 추천도서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2015)


태그:#<인간의 품격> , #데이비드 브룩스, #성장, #성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