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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제주올레걷기축제 첫날인 지난 10월 30일 김녕성세기해변~제주해녀박물관 코스 끝무렵인 평대리 바닷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15 제주올레걷기축제 첫날인 지난 10월 30일 김녕성세기해변~제주해녀박물관 코스 끝무렵인 평대리 바닷가에서 축제 참가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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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한 코스씩, 일주일 동안 올레 길을 걸었다. 길을 걷다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 만나는 데도 말문이 쉽게 트인다. 두 사람도 비켜가기 힘든 오솔길이 많기 때문일까. 대화가 쉽게 이뤄진다. 해녀박물관에서 종달바당까지 가는 21코스 길에서 만난 여성은 30대 후반이나 될까, 동행도 없이 혼자였다. 씩씩했다. 키도 크고 자세가 똑바랐다. 등에 진 배낭은 상당히 무겁게 보이는데.

"어디서부터 걸으십니까?"

어제 제주에서 시작해 18, 19코스, 오늘은 20, 21코스를 걷는 중이란다. 하루에 2개 코스씩 30km가 넘는 강행군이다. 3박 4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진단다.

이십여 분 같이 걷다가 그는 우리 일행을 앞질러 갔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왜 걷는가?' 묻지 못했다. 사실 호기심이 생길 만하다. 젊은 여성이 혼자서 며칠씩 산길 바닷길을 걷는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그러나 올레 길에선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홀로 걷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이들, 그중에서도 여성이 더 많은 듯하다.

'왜 걷는가?' 내가 찾은 답은...

그에게 묻고 싶었던 '왜 걷는가?'라는 질문은 사실은 나의 '화두'였다. 올레 길을 참선하듯 걷고 싶어 내가 만든 화두였다. 불가의 '이 뭣고?'처럼 무슨 '도를 깨치기 위한 과제'는 아니고 그냥 잡념을 줄이기 위한 장치였다. 지난해 2주일, 올해 1주일, 모두 20개 코스의 올레 길을 걷는 동안 내내 배낭처럼 잊지 않고 챙겼다.

덕분에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보였다. 길 따라 수를 놓은 듯 돌담 선들이 정겹게 다가왔다. 무밭, 감자밭, 당근 밭, 밀감 밭들이 까만 돌담 안에서 더욱 진한 녹색으로 돋보인다. 누군가 말했었다. 제주 돌담은 '생존의 디자인'이라고. 몇 대에 걸친 농부들의 삶이 새겨진 작품, 억센 제주바람과 소통하는 숭숭 뚫린 자연스러움이 손에 만져진다. 사람이 대지위에 새긴 삶의 디자인이다.

오름을 오르내리는 즐거움도 새로워졌다. 조물주께서 크나 큰 바가지를 그대로 엎어 놓은 것 같은 오름들은 대개 해발 200m가 안 되는 높이지만 만만치 않다. 똑같은 기울기로 쭈욱 올라가는 오르막이 숨차다. 21코스 마침표는 '제주도 땅끝'이라는 지미(地尾)오름이다.

올라가는 흙 계단 앞에 표지판이 서있다. "높이 166m, 20분이면 오를 수 있다". 오른쪽으로는 평탄한, 돌아가는 길이 열려있다. 주저하다 오름길로 들어선다. 발 밑만 쳐다보며 한 발짝 한 발짝 올라간다. 땀이 난다. 말대로 20분 못 미쳐 하늘이 확 트인다. 한 걸음 한 걸음 쌓아올린 에너지를 한꺼번에 탁 터뜨리는 기분이다.

내려갈 땐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 시인이 말한 '그 꽃'의 경지가 조금 느껴진다. 강아지풀, 억새, 갈대밭, 구절초, 들국화가 친해진다. 지천으로 꽃을 피운 '배초향'은 사진을 찍어 보내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인생살이와 닮은 걸까, 코스마다 한두 개씩 꼭 오름이 있다. 1코스 시작점은 말머리를 닮았다는 말미오름(146m)이다. 완만한 능선을 30여 분 오르자 남쪽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멀리 바다 한가운데 성산일출봉(180m)이 성곽처럼 우뚝 솟아있다.

쇠소깍에서 시작하는 6코스엔 제지기오름(95m)이 있다. 내려와 짙은 나무숲 섶섬을 바라보는 바닷가 절경 할망카페에서 '쉰다리' 한 사발을 마신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거치는 3코스엔 통오름, 독자봉(159m)이 잇대어 기다린다. 일주일씩이나 일상을 떠나 걸을 수 있다는 건 큰 복이다. 李太白의 <山中問答>이 생각난다.

"問余何事棲碧山(왜 푸른 산속에 사느냐고 나에게 묻네) 笑而不答心自閑(웃으며 답하지 않지만 마음은 저절로 한가롭네)"

산 속에 사는 은둔자의 유유자적한 마음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올레 길을 걷는 올레꾼도 그럴 것이다. 그냥 걸으면서 느끼면 되지 무슨 이유인가? 걷는 사람만이 느끼는 그 편안함, 그 황홀경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태그:#올레길, #걷기, #오름, #돌담, #성산일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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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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