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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누구나 요령을 생각한다.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해 혹은 좀 더 쉬운 길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기도 한다. 정치권은 국민을 위하기보다 당리당략에 급급하다. 이 사회는 여전히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서로 속이고 사기를 친다. 가짜가 판을 친다. 학위 논문을 표절하고, 돈으로 자격증을 사고 판다.

오지레이스에서도 이런 일이 생긴다. 경기가 진행되면 코스와 여정이 너무 힘들어 선수들은 주로를 이탈해 지름길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정해진 룰을 부정하며 경기 운영진에게 되레 화를 내기도 한다. 때로는 애써 경기를 포기할 핑계를 찾기도 한다.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았기에 강해진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완주자에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22명의 전사들과 함께
▲ 호주 아웃백 530km 레이스 출발 22명의 전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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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엘리스스프링스에서 에어즈 록까지
▲ 530km 레이스 맵 호주 엘리스스프링스에서 에어즈 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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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호주 노던준주 엘리스스프링스(Alice Springs)에는 전 세계 오지 마라톤 분야 최강자 23명이 모여 열흘간 560km를 달리는 지구상 최장의 레이스가 열렸다. 이 대회 또한 자신의 식량과 장비를 짊어지고 달려야 하는 서바이벌 경기이다.

독일과 스페인 등 11개 국가에서 모여든 선수들은 토드몰(Todd Mall)에서 합류한 후 비박 장소로 함께 이동했다. 경기 전날, 장비 검사를 마치고 경기 규정과 지형에 대한 브리핑이 시작되자 선수들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코스는 엘리스스프링스에서 호주의 정중앙에 있는 에어즈 록(Ayers Rock)까지 광활한 대지와 능선, 호수와 협곡을 가로질러 열흘 밤낮을 달려야 했다. 레이스 첫째 날, 대회 운영자인 프랑스 제롬(Jérôme)의 출발 신호가 떨어지자 선수들은 마치 스프링처럼 전방을 향해 튕겨나갔다.

레이스는 가파른 산 능선과 협곡을 오르내리는 마운틴 코스로 시작됐다. 멀리 보이는 호주의 산야는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가까이 다가선 즐비한 암벽과 잡풀들은 칼날처럼 독이 올라 선수들을 위협했다. 종아리가 날카로운 바위에 스칠 때 마다 사정없이 살점이 긁혀 나갔다.

필자의 닉네임은 슈퍼맨이 되었다
▲ 이 사진 한 장으로 필자의 닉네임은 슈퍼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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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질주는 이미 시작됐다
▲ 극한의 레이스 거침없는 질주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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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어깨를 찍어 누르는 배낭의 하중은 체내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 듯 선수들을 휘청거리게 했다. 걸어서는 제한시간에 걸려 결코 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낮에는 살을 녹이는 열기와 파리 떼로, 밤에는 추위와 들짐승들의 엄습에 몸을 도사려야 했다.

레이스가 계속될수록 몸은 부서지고, 인간의 감성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국의 명예를 건 듯 선수들 사이에는 순위를 다투는 묘한 기류마저 흘렀다. 레이스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네 명의 선수가 제한시간을 넘기거나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했다. 탈락자가 속출하자 운영본부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레이스 거리를 530km로 단축해야 했다.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로 온 대지가 뜨겁게 타들어가고, 노출된 내 목덜미와 종아리도 함께 익어갔다. 임도와 계곡, 강변과 하상(河床)을 따라 푸석한 흙먼지가 끊이지 않는 'Bed River' 코스가 이어졌다. 선수들은 살아남기 위해 먹고, 달리기 위해 먹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달렸다.

레이스 8일째, 온 대지가 화염에 휩싸였다. 자연발화로 산불이 난 것이다. 매케한 연기가 산야를 뒤덮었다. 불길은 주로(走路) 양 옆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나는 두려움조차 상실한 채 불기둥 속을 뚫으며 오로지 지평선 반대편에 있을 캠프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호주의 산야를 울리는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로 거세게 울려왔다.

그곳엔 대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 숨 쉰다
▲ 호주의 산야 그곳엔 대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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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출을 한단다
▲ 호주의 야생낙타 이젠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출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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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캠프는 물집과 인대가 늘어난 부상 선수로 야전병원을 방불케 했다. 과욕이 부른 선수들의 최후는 극심한 고통과 상처로 얼룩졌다.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선수는 눈물을 머금고 레이스를 멈춰야 했다. 내 왼쪽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도 진작 죽어 발톱이 흐물거렸다. 진물이 흘러 양말이 흥건히 젖었다. 어디로 장소를 옮기든 캠프 주변은 늘 생쥐와 개미떼로 들끓었다.

레이스 9일과 10일째, 지난 8일 동안 400km를 넘게 달린 터라 체내의 모든 진이 빠져버렸다. 이제 극한을 넘어 피니쉬 라인이 있는 에어즈 록으로 다가서는 무박 2일의 129km 구간만이 남았다. 에어즈 록은 호주 원주민들에겐 매우 신성시되는 곳으로 '그늘이 지난 장소'라는 뜻인 울룰루(Uluru)로도 불렸다.

한 발 한 발이 작두 위를 걷는 듯한 고통이 발바닥에서 두 다리를 타고 전신으로 전해왔다. 포기의 유혹이 다시 꿈틀거렸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내 안에는 '이만 포기하자'는 나와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더 가자'고 격려하는 또 하나의 내가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실낱같이 남아있는 희미한 의식마저 무너져 내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첫날 들러붙은 파리와 열흘 내내 동고동락
▲ 파리와 함께 춤을 첫날 들러붙은 파리와 열흘 내내 동고동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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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먹었다
▲ 만찬은 레이스의 최대 행복 선수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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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물집은 선수들의 공공의 적이다
▲ 레이스의 상흔 발바닥 물집은 선수들의 공공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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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높은 빅 듄(Dune : 모래언덕)을 기어오르거나 울퉁불퉁한 광야의 자갈길을 달릴 때 머리는 곧게 가라고 신호를 보내는데 다리는 좀 더 편한 길을 좇아 갈 지(之) 자로 왔다 갔다 했다.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니 지렁이가 기어 온 것처럼 가관이었다.

오히려 더 오래 걸리고 힘들게 달려온 것이다. 배낭 속 장비와 한 톨 남은 잡념까지 모두 던져버리지 않고 완주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마지막 남은 침낭과 태극기 중에 침낭을 내어줬다. 그래도 버릴 때의 간절함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았기에 힘들지만 나는 정도(正道)를 선택했다. 

지금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기는 거다
▲ 멈출수 없는 질주 지금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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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km 레이스의 끝, 피니쉬라인이 멀지 않았다
▲ 아! 울룰루 530km 레이스의 끝, 피니쉬라인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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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선에서
▲ 필자를 마중하는 대회운영자, 제롬 결승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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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이보다 더 혹독한 레이스는 없었다. 23명의 출전 선수 중 17명만이 완주를 이뤄낸 죽음의 레이스. 선수 모두 냉철한 자기 통제와 절제가 없었다면 완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한계는 넘어서라고 존재하는 경계일 뿐이다.

기다리는 자의 몫은 없지만 저지른 자의 몫은 분명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도전하는 자, 인내하는 자 그래서 한계를 넘어서는 자만이 그에 걸맞은 결실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울룰루가 보이는 야외 시상식장
▲ 완주자의 여유 울룰루가 보이는 야외 시상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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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는 아직도 가야할 곳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아직은 멈출 수 없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가야할 곳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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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 #직장인모험가, #오지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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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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