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낮에 마당에서 톱질을 합니다. 두 아이가 아버지 곁에 달라붙어서 톱질을 지켜봅니다. 바람이 꽤 드세기에 늦가을 한낮이어도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렇지만 두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톱질을 재미나다는듯이 지켜봅니다. 한참 톱질을 하다가 빙그레 웃은 뒤 "도와줄래? 그 끝을 잡아 주라." 하고 말합니다.

두 아이는 얼른 손을 내밀어 나무판 끝자락을 꼭 잡습니다. 추워서 장갑을 낀 손으로 붙잡습니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톱질을 합니다. 바람이 훅 불어서 톱밥을 날립니다. 톱밥이 날리니 두 아이는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래도 나무판을 잡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어쩜 이리 대견하고 씩씩할까 하고 생각하며 톱질을 잇습니다.

겉그림
 겉그림
ⓒ 창비

관련사진보기

한참 톱질을 하니 큰아이는 춥다며 먼저 안으로 들어갑니다. 작은아이는 찬바람이 휭휭 불어도 톱질 구경을 끝내고 싶지 않습니다. 혼자서 일을 더 할 수 있지만 작은아이를 꽁꽁 얼릴 수 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고 함께 안으로 들어가기로 합니다.

해변에 떨어진 초록 샌들을 주워와 네게 주었다. 너는 내가 건넨 호박을 잘게 잘라 넣고 찌개를 끓였다. 곧 식탁 위에는 검은 물웅덩이 하나가 올라왔다. (평생)

김중일 님이 빚은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창비,2015)을 읽습니다. 시집에 붙은 이름처럼, 시인 김중일 님은 이녁이 살아갈 사람 이야기를 나긋나긋 들려줍니다. 이제껏 함께 살아온 사람이 누구인가를 이야기하고, 앞으로 함께 살아갈 사람은 어떠한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문득 우리 집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이 아이들은 이제껏 저희 어버이하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저희 어버이하고 살아갈 테지요. 이 아이들은 어버이 살림하고 함께 시골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하루를 새롭게 맞이하고, 앞으로도 이 시골에서 새 하루를 아침저녁으로 맞이할 테지요.

큰아이가 세 살이던 때까지 지낸 고장에서는 눈이 많이 내렸지만, 그 뒤로는 눈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고장에서 지냅니다. 큰아이는 눈을 보고 싶고 눈사람을 굴리고 싶다는 노래를 부릅니다만, 우리 고장에서는 눈을 구경하기 아주 어렵습니다.

나는 장미처럼 새빨간 석양을 온통 주름투성이 얼굴로 모두 받으며 서 있다. 주름이 얼마나 깊어야 꽃잎이 되는가. (장미가 지자 장맛비가)

십이월을 코앞에 둔 오늘 저녁, 우리 고장에도 처음으로 눈발이 날립니다. 다만 펑펑 쏟아붓는 눈송이는 아닙니다. 싸락눈이 가늘게 흩날립니다. 그래도 이 눈송이를 맞겠다면서 보름달이 환한 마당에서 두 아이는 춤을 춥니다.

지난겨울, 아이들은 저녁까지 마당에서 개구지게 놀았고, 밤새 눈이 내리는 줄 모르다가 아침에 깨어서 이렇게 살짝 쌓인 눈을 보고 대단히 반겼습니다. 올해에는 이보다는 조금 더 눈이 쌓여 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지난겨울, 아이들은 저녁까지 마당에서 개구지게 놀았고, 밤새 눈이 내리는 줄 모르다가 아침에 깨어서 이렇게 살짝 쌓인 눈을 보고 대단히 반겼습니다. 올해에는 이보다는 조금 더 눈이 쌓여 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밤새 눈이 조금이나마 쌓일 만할까요. 전라남도 끝자락에 깃든 이 고장에 모처럼 눈이 소복히 쌓인 모습을 보여줄 만할까요.

아이들은 눈을 바랍니다. 나는 눈보다는 빨래가 잘 마르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눈놀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가을비가 자꾸 내려서 빨래를 말리기 힘든 요즈막 날씨를 헤아리면서, 부디 햇볕이 쨍쨍 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눈을 뜰 적에 눈이 소복히 쌓인 마당을 바랍니다. 나는 찬바람이 사그라들어 포근한 볕이 고운 하루를 바랍니다. 이러다가 생각을 좀 바꾸기로 합니다. 한낮까지 눈을 누릴 수 있은 뒤에는 빨래도 잘 마르도록 해가 잘 나 주면 고맙겠네 하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잃어버린 책이 있네. 그럴 때가 있네. 그런 밤이 있네. 책장을 한장 넘기면 벌써 그런 새벽, 또 한장 넘기면 이미 그런 아침이 있네. (사랑이라는 상실)

노래할 수 있다면. / 입 크게 벌리고 이마에 주름 깊이 잡아가며 / 노래할 수 있다면. (노래할 수 있다면)

곁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꿈을 꿉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적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지을 삶을 꿈으로 꿉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모르거나 찾지 못했다면, 앞으로 만날 누군가를 그리면서 새롭게 일구고 싶은 삶을 꿈으로 꾸어요.

꿈을 노래로 부릅니다. 내가 이루려는 꿈을 노래로 부릅니다. 내가 가려는 길을 꿈으로 지어서 노래로 부릅니다. 내가 나누려는 사랑을 바로 이 길에서 이루려는 꿈으로 가슴에 품으면서 노래로 부릅니다.

흐린 책을 읽고 나는 계절이 뒤바뀌는 소리를 듣지 과연 밤낮은 무엇인가 흐린 책을 읽는 밤엔 고대하던 깊은 잠을 잘 수 있지 비는 밤새 이불로 조금씩 스며들어 대낮의 꿈속으로 뚝뚝 떨어지고 (흐린 책)

단식하는 그와 과힉하는 나 사이. 굴뚝과 굴뚝 사이. 철탑과 철탑 사이. 무덤과 무덤 사이. 지구 저편 폭격과 폭격 사이에 내걸린 부재자의 잿빛 외투 속에서. 오늘은 우주선이 솟구쳐오르는 마술이 상연되었다. (성간 공간)

차갑게 부는 바람이 창호종이로 댄 문을 흔듭니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마을고양이 여러 마리는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서 웅크립니다. 자전거 밑에서 두어 마리가 웅크리고, 섬돌 옆에 쌓인 종이상자 귀퉁이에서 두어 마리가 웅크립니다. 광에서 두어 마리가 웅크리고, 손수레 밑에서 또 두어 마리가 웅크립니다.

방으로 빨래를 옮길 적에 큰아이가 늘 씩씩하게 도와줍니다. 이 아이들하고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짓습니다.
 방으로 빨래를 옮길 적에 큰아이가 늘 씩씩하게 도와줍니다. 이 아이들하고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짓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바람 찬 오늘은 빨래가 다 안 말라서 마루로 들였으나 마루에서도 마를 낌새가 보이지 않아 방으로 다시 들입니다. 밤새 잘 말라 주렴 하고 자꾸 만져 봅니다. 깊이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여미고, 이마를 쓸어넘기며, 볼에 쪽쪽 뽀뽀를 합니다. 부엌하고 방바닥을 치우고, 비질도 하다가는, 흩어진 장난감을 주섬주섬 모아서 갈무리합니다.

시집 <내가 살아갈 사람>을 쓴 시인은 이녁한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님하고 이 겨울에 새로운 살림을 즐겁게 가꿀 테지요. 그리고 시인은 시인대로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님이 되어 이녁 둘레에 있는 사람한테 즐거운 웃음을 나누어 줄 테고요.

이제 두 아이 사이로 파고들어 함께 잠들기 앞서 조용히 생각에 잠깁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부터 내다볼 테고,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떤 밥을 지어서 맛나게 함께 먹을까 하고 바지런을 떨 테지요.

덧붙이는 글 | <내가 살아갈 사람>(김중일 글 / 창비 펴냄 / 2015.5.8. / 8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 함께 올립니다.



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지음, 창비(2015)


태그:#내가 살아갈 사람, #김중일, #시집, #시읽기, #삶노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