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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2월 9일 황장엽씨의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호를 받으며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지난 2003년 12월 9일 황장엽씨의 출판기념회가 끝난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호를 받으며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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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이른 나이에 정치적 명성을 얻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그의 평생 소원이던 대통령이 되었다. 평생 복이 많았던 그는 천수를 누렸고 10만 명이 넘는 조문객의 추모를 받은 데다가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가장의 예우까지 받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업적은 불변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뒤집는 '3당 합당'으로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면서까지 평생 소원이던 대통령의 꿈을 이루었다.

집권 후 WTO 가입과 쌀시장 개방선언으로 인해, 그 후 20년이 지난 지난해 쌀시장 완전 개방의 길로 가는 문을 열어 농민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도록 했다. 또한 섣부른 OECD 가입과 금융시장 개방으로 IMF 외환위기를 자초했다. 수십 년 민중의 피땀으로 일군 나라 재산을 국제투기자본에 탈탈 내어주고 수많은 민중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렸다.

총과 칼, 경찰의 방패, 물대포만이 살인도구는 아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경제는 지난 18년 동안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로 급변했다. 이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과 농민, 노동자, 소상공인, 청년의 비참한 삶은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 '헬조선'으로 상징된다.

비록 김영삼 전 대통령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지만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그에게서 비롯된다.

민주화운동가, 농민운동가이기 이전에 평범한 농민의 한사람이었다
▲ 농민과 더불어 산 백남기 농민 민주화운동가, 농민운동가이기 이전에 평범한 농민의 한사람이었다
ⓒ 민중총궐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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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백남기. 평생 낮은 자리에서 민주화운동과 농민운동을 하고 이웃과 더불어 평범한 농민의 길을 걸으며 세속적 부귀를 좇지 않았다. 그는 칠순잔치를 코 앞에 두고 밥쌀 수입개방 반대와 대통령의 쌀값 공약 이행을 요구하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12일째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

한 사람은 제도권 정치인으로, 또 한 사람은 학생운동가로서 우연찮게도 민주화운동진영에서 한 때나마 한솥밥을 먹었던 두 사람은 인생의 말년을 서울대병원에서 며칠 동안 함께 했다. 다시 한번 우연찮게도 두 사람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을 섬기는 인생을 살았다. 한 사람은 개신교도로서, 또 한사람은 가톨릭 신자로서.

수많은 조문객들과 이른바 사회명사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문했지만 바로 옆 중환자실의 백남기 선생을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백남기 선생 쾌유를 기원하는 촛불문화제에서 어느 신부님께서 말하셨듯이 예수님의 뜻을 평생 실천한 농민 백남기 선생보다 세속적 부와 명예를 이룬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받드는 꼴이지 않은가?

가장 높은 곳의 대통령과 가장 낮은 곳의 농민.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느 사람을 더 환대하실까?

낮고 낮은 농민의 삶을 앞장서서 대변하다 물대포를 맞고 차가운 아스팔트에 쓰러지다
▲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농민 백남기 낮고 낮은 농민의 삶을 앞장서서 대변하다 물대포를 맞고 차가운 아스팔트에 쓰러지다
ⓒ 민중총궐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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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영삼, #백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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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에서 유기농 농사를 짓고 있는 단양한결농원 농민이자 한결이를 키우고 있는 아이 아빠입니다. 농사와 아이 키우기를 늘 한결같이 하고 있어요. 시골 작은학교와 시골마을 살리기, 생명농업, 생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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