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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앞 전원일기 속 기와집 풍경을 간진한 지붕에 살포시 내려앉은 도둑 첫 눈 풍경.
 빌라 앞 전원일기 속 기와집 풍경을 간진한 지붕에 살포시 내려앉은 도둑 첫 눈 풍경.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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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말아요 / 하얀 첫 눈이 온다구요 / 그리운 사람 올 것 같아 / 문을 열고 내다보네"(이정석의 '첫 눈이 온다구요' 중에서)

밤새 도둑 첫 눈이 왔습니다. 실은 눈이 내렸는지도 몰랐었죠. 출근 길 빌라 계단에서 우연히 바라본 고즈넉한 풍경에 잠시 넋을 놓고 멍을 때렸습니다.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그 무엇을 향한 그리움과 향수가 짙게 배어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 넉 달을 고생한 끝에 아늑하고 외진 곳에 숨어 있는 빌라 옥탑방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 동네는 현대식 공동주택과 옛 기와집, 좁디 좁은 골목길 풍경, 할머니의 작은 텃밭 상자들이 소박하게 놓여있는 정겨운 마을입니다. 예전부터 이런 동네에 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던지라 전셋집을 구하러 고생했던 넉 달의 기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요즘엔 시골향기가 가득한 전원일기 속 풍경을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가벼워집니다. 바로 곁에는 산책로 공원도 있어 기꺼이 차를 버리고 '워킹 출퇴근'을 한 지 한 달이 되었지요. 그동안 몰랐던, 아니 너무 바빠서 무심코 흘려버렸던 이 소박한 아름다움의 풍경들을 이젠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풍경만큼이나 제 마음 속에도 따듯한 사랑이 들어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첫 눈, 첫 사랑, 따듯했던 추억들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 어린왕자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 열린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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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부터 첫사랑의 설렘과 따뜻했던 시절 인연을 잊은 채 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만큼 먹고 살기 바쁘고 두렵기만 한 현실의 벽이 너무 크기 때문이겠지요. 하루살이처럼 온 정신을 일에 매달려 살다보니 이해타산적인 관계만이 올가미처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1988>처럼 지금보다 더 어렵게 살던 시절에도 애틋했던 사랑의 감정과 포근했던 친구의 우정은 더 충만했는데도 말이지요.

홀로 42년을 살아오며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저 또한 30대 중반부터 내면의 순수성이 점차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영어선생님을 향한 풋사랑의 기억도, 초콜릿을 주며 저에게 첫사랑을 고백했던 당찬 소녀와의 추억도, 그리고 국문과 사무실함에 몰래 편지를 넣으며 짝사랑을 고백했던 순수함의 시절도 모두 사라져버린 느낌입니다.

1980년대 초반 부모님과 같이 살던 옥상이 있는 양옥집 앞은 온통 논과 밭으로 뒤덮였습니다. 비만 오면 진흙탕 놀이터로 들어가 동네 아이들과 소꿉장난을 하며 뛰놀던 추억이 아른거립니다. 이맘때처럼 추운 겨울이면 장작불을 놓고 쥐불놀이, 팽이 돌리기, 잣 치기, 얼음 비석 까기, 구슬치기 등을 하며 얼굴이 까매지도록 놀았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 시절 저에게 있어 또 하나의 추억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의 대면입니다. 오늘 같이 첫 눈이 소복히 내렸던 초등 5년 시절, 이름 모를 묘령의 대학생 누나가 마치 나에게 종교의식을 치르듯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읽었던 <어린왕자> 스토리를 전해주며 울먹였던 이상한 기억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신비롭기만 했습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그 묘령의 누나가 눈꽃여왕처럼 정말 예뻤다는 것이었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던 누나는 코끼리를 삼키고 있는 보아뱀의 장면을 보여주며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눈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당시 꼬맹이였던 저는 절대로 알 수 없는 말 만 남기고 그녀는 홀연히 떠나갔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죠.

어린시절 우연히 만난 눈꽃여왕의 메시지

진정한 사랑을 꿈꾸었던 어린 왕자 생떽쥐베리의 글 모음. 시간을 초월하여 별처럼 빛나는 생떽쥐베리의 아름다운 문장들은 우리를 깊은 사색과 매혹적인 문학세계로 인도해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관계와 사랑에 대한 사색은 우리의 세상을 맑게 정화해준다<책 소개글 중에서>
▲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진정한 사랑을 꿈꾸었던 어린 왕자 생떽쥐베리의 글 모음. 시간을 초월하여 별처럼 빛나는 생떽쥐베리의 아름다운 문장들은 우리를 깊은 사색과 매혹적인 문학세계로 인도해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관계와 사랑에 대한 사색은 우리의 세상을 맑게 정화해준다<책 소개글 중에서>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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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대학생 시절,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책을 접하고 나서야 누나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이의 세계에서 바라봤던 그 보아뱀과 코끼리가, 어른들에 눈에는 그저 모자에 불과했다는 편견이었죠. 어른이 되고 나면 자신이 보는 것과 아는 것만으로 모든 사물을 단죄해버리고 그 안에 감춰진 그 진실들은 아예 무시해버린다는 의미를 알아챈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마치 뭐에 홀린 사람처럼 한 달 내내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혹시 정말 그 분이 눈꽃여왕이 아니었나' 싶어서 말이죠. 여하튼 그것도 잠시였을 뿐, 다시 문명의 이기 속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잊은 채 삶에 찌들어 갔답니다. 그 후 가족과의 이별, 생사의 아픔, 사랑과 우정의 배신 등의 경험을 맛보고 어느새 40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세상에 홀로 남겨진 채 말이죠.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지만, 오늘 잠깐 본 첫 눈만으로도 순수의 시대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입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그대로 담아놓은 책, <어린왕자>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오늘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점점 메말라가는 요즘, 첫 눈 세상의 눈꽃여왕과 마주하면서 다시 순수의 세계로 돌아가 보는 게 어떨는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 <어린왕자> 명대사 중에서


태그:#첫 눈,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을까, #순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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