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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부르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 아버지의 형 중부(仲父)는 자신이 64년 전 다녔던 초등학교 교정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식구란 무엇이고, 형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 역시 눈자위가 시큰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극적이면서 단순한 것인지를. 아래는 내 아버지의 형제를 통해 본 보편적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단호했던 할아버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다

81세의 노인인 내 중부 홍순호. 그는 왜 64년 전 다니던 초등학교 교정에서 말이 없었을까?
 81세의 노인인 내 중부 홍순호. 그는 왜 64년 전 다니던 초등학교 교정에서 말이 없었을까?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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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일제강점기. 넉넉한 집안 형편에 힘입어 일본에서 공부한 조부는 내 아버지 4형제 중 셋을 나고야(名古屋)에서 낳아 길렀다.

1944년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오키나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본토 침공계획을 세우던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부는 연일 B-29 폭격기를 일본 상공에 띄워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나고야에는 꽤 큰 군수공장이 있었다. 당연지사 폭격 1순위 지역이었다. 죽음의 그림자 매일 낯선 얼굴을 디밀었다.

'이러다 귀한 새끼들 다 죽이겠다. 돌아가자.'

할아버지의 결심은 빠른 실행으로 옮겨졌다. 부동산은 급한 처분이 어려우니 그냥 뒀다. 동산만 현금으로 바꿔 벽시계에 숨긴 조부는 어린 아내에 아들 셋, 딸 하나까지 줄줄이 이끌고 부산행 배에 올랐다. 예기치 못했던 귀국이었다.

1940년대에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을 정도였으니 한빈한 집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원 딸린 집과 땅이 폭탄 앞에 위태위태해질 자식 목숨보다 소중했을 리야 없었다.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에 돌아온 조부는 몇 년 사이에 가지고 나온 돈을 모조리 사기당했다. 그것도 일가붙이와 친척들에게. 세상 물정 어두운 백면서생은 속여먹기도 좋았을 것이다. 무일푼이 된 내 할아버지. 냉수 한 사발 마시고 허허롭게 웃으며 부엌에서 저녁을 짓던 조모에게 짤막하게 일갈했단다.

"짐 싸라. 내일 부산으로 간다."

일본에서 밀양으로, 다시 부산으로 남부여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부산행 배를 탈 때와는 딴판으로 거지꼴을 한 조부 식구가 밀양발 부산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귀국해 낳은 막내아들은 당시 네댓 살이라 장남 등에 업혔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향에서 아내와 자식 다섯을 키워야 했던 할아버지의 삶은 간난신고(艱難辛苦) 또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이었으리라.

나고야에선 단팥으로 만든 양갱에 미국산 드롭프스를 쌓아놓고 먹다가, 한국에선 구제품으로 들어온 옥수수빵 하나도 쉽게 얻어먹지 못하는 형편으로 전락했지만, 아버지 4형제는 우애가 좋았다고 한다.

사단은 일본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 온 탓에 한국말보다 일본어에 더 익숙했던 큰아버지의 발음에서 시작됐다. 최근 한국사회를 시끌벅적하게 했던 '롯데그룹 사태'. 시원찮은 한국어 발음 탓에 여론의 뭇매를 맞은 롯데 신동빈 회장 정도의 발음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어린 나이에 비극과 참담을 두루 겪은 1950년대 소년들은 거칠고 드셌다.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부산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정글이었고, 이전투구 하는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 세계에 그대로 복사됐다.

아버지 형제들이 살던 부산 영주동 일대도 그랬다고 한다. 난리 통에 입학이 늦은 학생들이 많았고, 내 아버지와 중부 역시 그랬다. 부산시 중구 영주1동에 있는 봉래초등학교. 그 학교는 올해로 개교 120주년을 맞았다.

어린 아내를 남기고 갑작스레 사망한 조부 탓에 장남이 아버지 노릇을 맡은 지 1년 남짓. 하교해 형과 엄마를 기다리던 중부와 아버지, 숙부 귀에 큰아버지의 고함이 들렸다 한다.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서럽게 울더란다. 이유인즉, 예의 그 일본식 한국어 발음 탓에 시비가 붙었고, 이름만 대면 동네 사람들이 벌벌 떨던 건달패 무리에게 두드려 맞았던 것.

형제가 함께라면 곰도 무서울까?

2008년 하늘로 돌아간 내 아버지 홍순영. 중부 홍순호에겐 언제나 걱정스럽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2008년 하늘로 돌아간 내 아버지 홍순영. 중부 홍순호에겐 언제나 걱정스럽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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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뜨겁고 성격 괄괄하기로 남에게 빠지지 않던 열여덟 중부가 손목 두께의 참나무 몽둥이를 먼저 들었다 한다. 연이어 내 아버지가 헛간으로 달려가 곡괭이 자루를 뽑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밤늦도록 동네가 떠나가라 외치고 다녔다. 그 건달패들을 찾아서.

"내 형을 때린 OOO 나와라."

거구의 씨름꾼 다섯도 곰 한 마리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부자(父子) 사냥꾼은 몽둥이로 곰을 때려잡는다. 혈육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이 도망가면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다치는데 까짓 곰이 무서울 것인가. 그랬다. 그날 밤. '형제는 용감했다.'

이상이 내 어린 시절, 추석이나 설 명절 때 아버지 형제들의 술자리에서 얻어들은 이야기다. 다소간의 과장이 섞였을 수 있으나, 그 안에 담긴 뜨거운 형제애는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세월이 흘렀다. 그날 '용감했던 형제' 중 백부(伯父)는 2000년 세상을 떴다. '100세 시대'라 불리는 21세기 걸맞지 않게 겨우 67세였다. 2005년엔 숙부가 회갑을 치르지 못하고 육십 나이에 귀천했다. 간암이었다. 그리고 2008년 3월 10일 내 아버지도 형과 아우를 찾아 하늘나라로 갔다. 일흔 살 생일을 3개월 앞두고. 사인은 전이성 간암.

해서, 중부는 홀로 남았다. 아니, 서로를 제 몸처럼 아끼던 청년 시절 형제의 기억은 함께 남았겠지. 이제 뜬금없이 보였을 이 글의 서두에 관한 부연이다.

홀로 살아남은 팔순의 중부에게 형제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바닷가 도시 부산에서 홀로 사는 중부가 계단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고 했다. 문병을 갔다. 다행히 2주간의 병원 치료가 끝나고 상황은 좋아져 있었다. 그는 81세의 노인이지만, 조카들이 걱정할까 염려해 어지간한 일은 알리지 않고 사는 사람. 그게 더 안타까워 좋아하는 복매운탕을 대접하고 싶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인터넷에서 검색한 맛집 앞에 내렸다.

아, 그런데, 바로 길 건너편이 봉래초등학교였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풍경이지만, 중부는 60년 전 먼 기억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냈다. 후다닥 점심을 먹고 봉래초등학교 교정에 함께 들어섰다. 내가 멀찌감치 서서 담배 2개비를 다 피울 동안 중부는 말이 없었다.

1951년 앞서 언급한 큰아버지의 서툰 한국어 발음이 유발한 '영주동 폭력 사태'가 있은 지 64년. 그는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동생 둘과 형의 소년 시절 얼굴을 기어이 떠올리고자 했을 것이다. 노인의 슬픔은 그 진폭이 깊고도 넓은 것. 함께라면 곰도 때려잡을 수 있었을 손가락 같은 형제들 생각이 없던 말이 더 없어진 것이 분명했으리라.

그날 나는 생각했다. 굳이 '함경도의 절창' 백석(본명 백기행)의 시 구절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높고 가난하고 쓸쓸한' 일인가를. 그리고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이런 기도를 했던 것 같다.

형제들 모두가 떠난 외로움이 힘겹더라도 내 아버지를 대신할 유일한 분 중부께서는 꼭 100살까지 살아주시기를.


태그:#중부,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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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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