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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의 노인에게 물대포를 쏘아 사경에 빠트린 폭력을 '공권력 행사'라고 말한다. 집행의 공정함을 나무라는 목소리는 없다. 더 강력한 힘을 주문하기도 한다. 막아선 차벽, 쏘아대는 최루액에 참을 수 없어 물병이라도 던지면 구제받을 수 없는 폭도로 몰린다.

폭력은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갈린다. 공권력과 집회·시위의 자유 사이에서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헌법조항은 당연하다는 듯 무시된다.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농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 물대포가 아니라, 농민을 구조하려던 '빨간 우의'를 입은 사람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주먹으로 농민을 가격한 것 같다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경찰은 '빨간 우의'에 대한 수사에 직접 나섰다.

'일베'발 의혹 제기를 받아 수사를 요구하는 집권 여당.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한 경찰. 뇌가 부어서 머리뼈를 닫지도 못하고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는 촌로에게 그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보성에서 서울로 달려와 비 오는 아스팔트에 선 이유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

생존권 투쟁을 '불법'이라 규정하는 정부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농민 백남기씨(69세)가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직후 구조에 나선 한 시민(빨간 비옷)이 강한 물대포에 맞아 백남기씨 쪽으로 쓰러지고 있다.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농민 백남기씨(69세)가 경찰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직후 구조에 나선 한 시민(빨간 비옷)이 강한 물대포에 맞아 백남기씨 쪽으로 쓰러지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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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은 13만 명이 모인 시위에서 분노의 크기를 가늠하기보다는, 그 분노를 축소하고 폭력으로 덧칠하기 바쁘다. 이 기회에 동료를 때린 패륜 시위대로 몰아, 교과서 국정화의 수세 국면을 한꺼번에 뒤집어 보겠다는 얄팍한 술수도 읽힌다. 옹졸하다. 집권 여당의 포용력과 국정 장악 능력은 여전히 민심을 둘로 갈라 자기 편을 만드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열흘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대통령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24일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14일 민중총궐기 투쟁을 불법 폭력 시위로 규정한 뒤, 불법을 조종하고 폭력을 부추기는 세력들을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하게 처리할 것을 주문했다. 또 통진당 부활, 이석기 전 의원 석방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까지 등장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복면 시위를 못 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여당이나 정부의 주장은 옳지 못하다. 사실관계도 모순투성이며 일방적이다. 13만 명이 모인 14일 민중총궐기의 원인 제공자는 누가 뭐래도 박근혜 정부다. 국민의 뜻에 반하는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노동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 악법 밀어붙이기, 농민 생존권은 안중에도 없는 자유무역협정 추진 등, 숱한 패정이 국민을 화나게 했고 서울 광장에서 그 분노가 드러난 것이다. 민주노총·전교조·전농이 아무리 인원을 동원했다고 해도, 박근혜 정부의 나쁜 정치가 없었으면 13만 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농민이 재벌 위주의 FTA 협상을 규탄하기 위해 모이고, 노동자가 값싼 노동력과 손쉬운 해고를 목표로 하는 노동악법을 거부하기 위해 단결하는 것은 생존권 투쟁이다. 민생과 경제 성장을 입버릇처럼 되뇌는 정부가 농민·노동자의 삶의 절규를 불법으로 몰아붙이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또 교과서 국정화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많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여론에 눈감고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국정화 작업에, 국민들의 저항은 기껏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었다. 이마저도 불법이라면 국민들을 제 목소리를 낼 방법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국민이 테러리스트? 대통령의 무서운 궤변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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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하나 드나들 수 없는 차벽. 그 위에 채증조와 물대포의 정연함. 애초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협상하고 보호하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차벽 설치는 시민의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불법으로 판결되었다. 정부가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면서 국민들에게 법의 테두리를 강요하는 것. 낯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2005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사학법 개정에 항의하며 53일을 국회를 멈추고 거리를 누볐다. 사학법 개정 반대의 소신으로 거리에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대통령이 된 지금은 교과서 국정화 반대 집회에 경찰차로 차벽을 치고 물대포로 시민을 제압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시쳇말로 남의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그런 기준인가?

대통령의 복면 시위 발언도 그렇다. 일부 집회 참가자의 과격한 행동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시위에 평화적으로 참가한 시민들에게도 물대포를 쏘고 채증을 해서 소환장을 남발해온 것이 경찰이었다.

'IS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이 한마디 발언은 대통령이 거리에 나선 시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거리에 나선 시민을 테러리스트로 보는 대통령. 차벽을 치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난사하는 경찰은 동전의 양면처럼 닮았다.

시위에 참가한 국민들에게 복면 벗을 것을 요구하는 정부와 새누리당.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헌법이 정한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차벽으로 가두고 물대포를 쏘고 사진 찍어서 두고두고 괴롭히는 후진적 시위 탄압을 중단하는 것이 먼저다.

정작 교과서 국정화 집필진에게 서로가 누군지도 모르게 복면을 씌워놓고 자유로운 집필을 위한 조치라는 강변을 하고 있다. '소고기 이력제' 정도의 투명성도 보장하지 못하는 '복면 집필'부터 중단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모여드는 국민들보다 등 돌려 떠나가는 국민들이 더 무섭다

지난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이 참가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있다. '민중총궐기 대회'는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언론장악, 철도-의료-교육민영화, 노동개악 등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며 개최한 대회다.
▲ '민중총궐기 대회', 경찰의 마구잡이 물대포 지난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이 참가자들에게 물대포를 쏘고 있다. '민중총궐기 대회'는 민주노총 등 53개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로 이뤄진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세월호 참사, 역사교과서 국정화, 언론장악, 철도-의료-교육민영화, 노동개악 등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며 개최한 대회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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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권력은 공정한 집행으로 신뢰를 얻는다. 차벽을 치고 시민을 위해 물대포를 쏜다고 해서 공권력의 위엄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또, 공권력이 신뢰를 잃으면 정권의 도덕성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14일 민중총궐기 투쟁에서 경찰이 보여준 것은 권력의 폭력이었지 공정한 공권력 집행이라고 할 수 없다. 69세 백남기 농민의 회복하기 힘든 부상은 공권력의 집행에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정부와 경찰의 안일한 인권 의식이 빚어낸 결과다.

나는 지난 14일, 서울 도심에서 공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무차별 국가폭력을 목격했다. 차벽을 치고 위에서 하는 일이라고 발뺌하는 경찰을 잡고 항의라도 해보고 싶었다. 시민들 향해 조준사격을 하는 물대포를 보며 물병이라도 던지며,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절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건, 내 행위의 정당성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진 찍히고 불려다니고 재판정에 설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은 교과서 국정화 추진에 등 돌린 민심에 화풀이라도 하듯, 지난 14일 집회를 불법 폭력 시위로 규정하고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경찰은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를 불허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또다시 국민과 대척점에 선 박근혜 정권. 공권력은 정권을 지키는 무기가 아니다.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위험한 질주를 멈추어야 한다.

어둠은 여명을 이길 수 없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다. 국민들의 절규를 차벽으로 막고 듣지 않겠다는 대통령이 모르는 게 있다. 몰려드는 국민들보다 등 돌려 떠나가는 국민들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민중 총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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