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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마을 담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용히 스러져가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금치는 화초마냥 집안에서 잘도 자란다
▲ 고란마을 흙돌담 고란마을 담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조용히 스러져가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금치는 화초마냥 집안에서 잘도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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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新安)은 섬 고을, 뽀얀 소금의 고장이고 1004개 섬이 있어 '하얀 천사 섬'이라 불린다. 섬 개수가 여수는 365개, 신안은 1004개(유인도 72, 무인도 932)란다. 어찌 '요로코롬' 딱 맞추었을까? 뱃사람들이 말하길, 섬 구경하기에 좀 늦었다는 11월초, 신안 도초도, 비금도, 흑산도를 찾았다.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차도선(車渡船)이나 카페리로 2시간 정도 걸린다
▲ 도초도 가는 배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차도선(車渡船)이나 카페리로 2시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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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초 고란마을과 비금 내촌마을, 흑산 사리마을에 그럴싸한 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든 것이다. 먼저 도착한 섬은 도초도. 다리로 왔다 갔다 하는 비금도와 형제뻘 되는 섬이다.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은 섬, 도초도

도초도를 소개하는 첫마디가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은 곳'이라 했다. 섬이 아니라 김제평야의 어느 마을을 두고 하는 말 같다. 벼와 시금치농사가 소금, 대하, 전복 '농사'를 압도한다. 넉넉한 땅에서는 자식농사도 잘 되나 보다. 인재의 고장으로 소문이 자자한데 이를 자랑하듯 화도선착장 돌비석에 '꿈이 있는 인재의 고장'이라 박아놓았다.

이 평야를 보고 있으면 섬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 궁항마을 앞 고란평야 이 평야를 보고 있으면 섬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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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당(唐)과 교역 기항지였던 도초도는 당나라 사람들 눈에 꼭 자기 나라 수도, 장안(長安)과 닮았고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목마지로 이용되었기에 도초도(都草島)라 불렸다고 한다. '도초' 이름처럼 풀과 나무에서 나온 지명이 많다.

매화가 만발한 모양이라 발매(發梅)라 했고, 대나무가 무성하여 죽련(竹連), 삐비(삘기)가 흔한 들녘이라 신교(莘郊), 난초가 많이 자생한다하여 고란(古蘭), 버드나무가 수두룩하여 오류(五柳), 엄나무가 우거져 엄목(奄木)이라 했다. 도초도 으뜸 해수욕장, 시목(柿木)도 감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도초도 돌장승들 

도초도에는 돌장승이 셋 있다. 장승은 마을을 지키고 길손의 안녕을 빌며 나그네 길잡이 노릇을 한다. 고란마을에 가려면 고란평야 곁에 있는 궁항마을과 외상마을을 거쳐 가는데 이들 마을 앞에 서 있는 돌장승을 길라잡이 삼아 찾아들면 고란마을이다. 고란리 돌장승은 마을 앞에 서서 천리 길 달려온 길손을 반기며 다독인다.

돌장승 모양은 제각각이다. 궁항리 돌장승은 민머리, 부처귀에 다소곳한 표정이 민불(民佛)을 닮았고 1946년에 세워진 외상마을 돌장승은 갈비뼈가 앙상하고 턱수염자리에 구멍이 숭숭하며 갓 모양의 모자를 둘러써 어수룩해 보인다.

갈비뼈가 앙상하고 턱수염자리에 구멍이 숭숭하여 파격이다
▲ 외남리 외상마을 돌장승 갈비뼈가 앙상하고 턱수염자리에 구멍이 숭숭하여 파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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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흉하여 뭉개버렸으나 만들 당시에는 옷자락 밑에 남자 성기를 도드라지게 표현하여 전통미학과 도덕을 파괴한 20세기 그로테스크(grotesque) 요소를 갖고 있는 돌장승으로 보기도 한다. 이런 해석이라면 앙상한 갈비뼈는 당대의 헐벗은 민중, 궁핍한 삶, 사회불안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수많은 돌장승을 봤으나 이처럼 파격적인 장승은 본 적이 없다.

고란리 돌장승은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붙었으나 코는 매끈하여 잘 생겼다. 아래윗니를  드러내고 있으나 히죽 웃는 건지 화가 난건지 종잡을 수 없고 양손을 축 내리고 있어 잔뜩 겁먹고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자세다.

제주 돌하르방을 닮은 돌장승으로 보기도 하나 팔 모양을 중시하는 돌하르방과 팔 모양이 많이 다르다. 손을 생략한 육지 돌장승과도 달라 의미 있는 돌장승으로 받아들여진다.
▲ 고란리 돌장승 제주 돌하르방을 닮은 돌장승으로 보기도 하나 팔 모양을 중시하는 돌하르방과 팔 모양이 많이 다르다. 손을 생략한 육지 돌장승과도 달라 의미 있는 돌장승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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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은 2000년 이상 우리 민족 삶 속에 깊게 뿌리내린 민간신앙 조형물로 민중의 얼굴 같다. 1925년 친일지주들의 악랄한 수탈에 못 이겨 소작쟁의를 벌인 도초 소작인들의 성난 얼굴처럼 평상시 온순한 태도를 보이나 핍박받고 분노하면 왕방울만한 두 눈을 위로 치켜뜨고 벌름거리는 주먹코에서 분노의 뜨거운 콧김을 내뱉으며 돌변하는 그런 얼굴이다.

돌장승 얼굴이 우습고 해학적으로 보이나 때로는 무섭게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을 앞 혹은 광활한 들녘에 홀로 서서 핍박하는 자, 자기 배만 채우려는 배려 없는 독한 자들에게 엄중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섬마을에 흙돌담이라니

고란마을 담은 섬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육지 담 닮은 흙돌담이다.
▲ 고란마을 흙돌담 고란마을 담은 섬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육지 담 닮은 흙돌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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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마을은 약 400여 년 전에 생겼다. 난초가 많이 자생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란마을은 이곡리(二谷里)로 넘어가는 길을 중심으로 둘로 나뉜다. 이쪽저쪽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두 다 고란이라며 한 동네라 힘줘 말한다. 한때 200여 가구가 몸 두고 살았으나 이제 50여 가구가 잔정을 나누며 가족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웃 정 실어 나르느라 마을담은 등 굽었다
▲ 고란마을 마을담 이웃 정 실어 나르느라 마을담은 등 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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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담은 돌로만 쌓은 강담이 아니라 섬마을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흙돌담이다. 고란평야를 곁에 두었으니 그럴만한 게지. 그래도 섬은 섬인지라, 육지담과 다르게 흙보다 돌이 많다. 얼핏 보면 돌담으로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촌로의 말을 들어 보았다. 

"나도 들은 건디, 우리 할아버지으 할아버지가 지게로 날라다 쌓았다 들었소. 나도 젊었을 때 무너진 담 고쳐 쌀라고 돌을 져 날랐지라. 여그 담은 딴 섬과 다르오. 돌로만 쌓지 않았제. 우리 마을 할아버지는 담 쌓는디 도사들이엇소."

흙 귀하다는 섬마을이라지만 고란은 달랐다. 담 모양도, 풍속도 섬이라기보다는 육지에 가깝다. 수다리(水多里)에서 시작하여 여기 고란까지 20리는 넉넉히 돼 보이는 고란평야 덕이다. "우리도 일 년에 한번 바다에 나갈 뚱 말똥 한다요." 아까 만난 촌로의 말에는 고란평야와 흙 섞인 담에 대한 자부심과 거친 바다일 않고 살아가도 된다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언덕바지로, 고란평야로, 산비탈로 마을담은 느릿느릿 춤추듯 이어진다. 시금치 감싼 밭돌담은 자갈자갈 자그락대고 주인 잃은 초가담은 푸석푸석 포삭거린다. 고란평야로 내리막 탄 죽담은 굽이굽이 굽었고 언덕바지 골목담은 서리서리 꿈틀댄다. 억새 찾아 산등성 향하는 흙돌담은 사각사각 서걱대고 그을린 마을 바깥담은 반듯반듯 곧다.

마을담은 평야로, 언덕바지로, 산등성이로 춤추듯 이어진다
▲ 고란마을 마을담 마을담은 평야로, 언덕바지로, 산등성이로 춤추듯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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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드문 자식한테 간다며 비운 집들이 있지만 담은 핏줄처럼 이어진다. 빈집담은 '신분'이 바뀌어 밭담 되고 밭담은 마을담이 되었다. 빈집 마당에는 제일 먼저 '점령군' 행세하는 풍년대(개망초) 대신 시금치, 마늘, 배추, 무, 파가 화초마냥 자라고 있다. 

빈 집담은 밭담 되고 밭담은 다시 마을담 되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 고란마을 빈집담 빈 집담은 밭담 되고 밭담은 다시 마을담 되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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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구석에 사람이 살지 않은 초가 한 채가 스러져가고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이 마을에 초가집이 많았다 들었는데 이 초가가 이 마을 마지막 초가인 듯싶다. 사람 기운이 나가면 담과 벽은 금세 스러지는 법이다. 이 담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고란평야 위에, 마을 뒷산 아래, 양지바른 마을 언덕바지에 마을담이 곱게 나있다
▲ 고란마을 골목담 고란평야 위에, 마을 뒷산 아래, 양지바른 마을 언덕바지에 마을담이 곱게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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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마음에 한 촌로에게 물어보았으나 "군(郡)에서 (보존)지원은 하는디, 저 건너 비금도 내촌마을마냥 (등록문화재로는) 등록 안 되었소"라는 대답뿐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뭔가 하고픈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완도 여서마을이나 제주 하가리마을과 달리 문화재로 등록하는데 불만은 없어보였다.

마을담은 옛 마을사람들 문화나 삶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마을 사람들 것이다. 마을사람들과 충분한 논의를 거쳐 보존대책을 서둘렀으면 하는 마음이다. 길손인 나는 마음만 전하고 비금도 대동염전으로 향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11/9-11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태그:#신안, #도초도, #고란마을, #고란평야, #흙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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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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