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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입구이자 출구인 '산타 루치아역' 앞에서 바포레토를 갈아타면 베네치아의 본섬을 'ㄹ'자 모양으로 나누는 '카날 그란데'를 통과하여 '산 마르코 광장'까지 갈 수 있습니다. 아침에 본 '리알토 다리' 아래도 당연히 지나갑니다. 바람은 제법 매섭지만 바포레토 앞부분의 실외 좌석에 앉아 운하 주변의 경치를 감상합니다.

어떻게 저런 구조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물과 가까운 건물들. 문을 열면 발바닥이 바닷물에 젖을 것 같은 현관이나 어떤 지지 구조물도 없이 물 바로 위로 외벽이 서 있는 것은 너무나 흔한 모습입니다. 심지어 1층의 벽 없는 복도인 '로지아'가 물에 잠겨있는 건물도 있습니다. 햇빛과 하늘빛과 물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외관은 물론입니다.

카날 그란데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 ‘카 도로’는 베네치아의 특수성이 반영된 저택입니다.
▲ 카도로 카날 그란데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건물 ‘카 도로’는 베네치아의 특수성이 반영된 저택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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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록 세월의 무게 탓에 색이 많이 바래긴 했지만 '황금의 집'이란 뜻의 '카 도로(Ca' d'Oro)'는 오후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납니다. 원래 베네치아의 유력 가문이었던, '콘타리니 가문'의 저택이었던 이 건물은 고딕과 비잔틴, 이슬람 등 여러 개의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어 보는 이를 즐겁게 합니다.

비잔틴 제국과 스페인의 무어 왕국, 그리고 동방의 이슬람 세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베네치아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바포레토의 속도 때문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기둥과 발코니, 창문의 섬세하고 유려한 장식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입니다.

그렇게 '카날 그란데' 주위의 건물들을 감상하는데 어느 순간 바포레토의 속도가 조금 느려집니다. 앞을 보니 한 무리의 곤돌라가 지나갑니다. 베네치아의 또 다른 상징인 '곤돌라'. 비싼 요금 탓에 가난한 솔로 여행자인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지만 이렇게 바포레토에서 곤돌라와 운하가 만들어내는 그림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가난한 솔로 여행자에겐 그림의 떡인 곤돌라. 하지만 곤돌라와 운하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 곤돌라 가난한 솔로 여행자에겐 그림의 떡인 곤돌라. 하지만 곤돌라와 운하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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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 가량 걸려 '카날 그란데'를 통과하고 '산 마르코 광장' 앞에서 '탄식의 다리'에만 잠시 눈길을 주고 다시 바포레토를 갈아 탑니다. 크리스마스긴 하지만 미술기행이니 한 편이라도 미술 작품을 만나야지 하는 심정으로 저 멀리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큰 성당으로 향합니다. 바로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Basilica di San Giorgio Maggiore)'입니다.

작은 섬 위에 우뚝 서 있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은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작은 섬 위에 우뚝 서 있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은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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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코 광장'의 바다 쪽 입구인 '성 마르코의 기둥'의 맞은편 바닷가에 서 있는 이 성당은 이탈리아 베네딕토 수도회의 중심 성당이기도 합니다. 특히 성 스테파노의 유물이 안치되어 있어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성대하게 벌인다고 하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성당 안은 찾아온 이가 거의 없어서 조용합니다.

수도회 소속답게 장식이 거의 없는, 소박한 성당 실내에서 내가 만나려고 하는 작품은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그렇습니다. 피렌체의 기를란다요와 밀라노의 다빈치, 그리고 '레위가의 만찬'으로 이름이 바뀐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베로네세의 작품에 이어 또 다시, '최후의 만찬'입니다. 그런데,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지금까지 그 모든 '최후의 만찬'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입니다. 

우선 평면적이고 대칭적인 수평 구도 속에 식탁을 배치하여 예수를 비롯한 중심 인물들이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는 기존의 '최후의 만찬'들과 달리 틴토레토의 이 작품은 사선 구도입니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예수를 배치하긴 했지만 왼쪽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오른쪽 아래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들보다도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에게 성찬을 건네고 있죠. 신성보다 가난과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지금까지의 모든 ‘최후의 만찬’과 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입니다.
▲ 최후의 만찬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 지금까지의 모든 ‘최후의 만찬’과 는 전혀 다른 형태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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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도 특별합니다. 기존의 작품들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의 성스러움 때문에 소박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는 곳이나 (특히 베로네세의 경우처럼) 아예 귀족 취향의 화려한 곳을 배경으로 한 것에 비해 틴토레토의 만찬장은 어둡고 복잡한, 서민들의 삶의 공간입니다. 그러다보니 만찬의 시간에 맞게 조명도 어둡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의 몸에서 나오는 광배를 제외하면 천장의 화롯불이 거의 유일한 조명인데 그 희미한 빛으로는 작품 전체를 밝히지 못합니다.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어둠 속의 '최후의 만찬'인 셈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인물들의 심리 역시 표정이 아니라 동작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말이죠. 실제로, 얼핏 보면 예수와 제자들이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화면 오른쪽의 평범한 인물들이 객석에서 그 장면을 관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천장의 화로에서 나온 연기들이 천사로 변한 것은 인물들의 광배와 함께 이 그림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틴토레토 특유의 기법이죠.

르네상스 최후의 거장이자 베네치아 화파의 최후의 거장이기도 한 틴토레토. 그는 흔히 '미켈란젤로의 드로잉과 티치아노의 색채'를 본받으려 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제 그의 수많은 작품들에는 그 두 거장의 흔적들이 보이죠. 그런데 일흔을 훨씬 넘긴 틴토레토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이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르네상스 미술이 지향했던 그 모든 가치들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처럼 보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것이지요. 그래서, 흔히 매너리즘이라는 틀로 틴토레토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물론 매너리즘의 대가, 틴토레토도 어느 정도 타당한 평가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이 작품 '최후의 만찬'도 마찬가지죠.

늘 비판과 야유의 대상이 되어 왔던 매너리즘. 아니 재능에 비해 늘 야박한 평가를 받아왔던 틴토레토.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이후 여러 차례 그의 작품을 만나고 나니 과연 그 평가들이 합당한지 의문이 듭니다. 이틀 후 만날 '산 로코 대 신도 회당'이 다시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틴토레토를 만난 뒤, 주 제단 뒤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종탑에 오릅니다.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식처럼 높은 곳에 올랐습니다. 마땅히 오를 만한 곳이 없었던 로마를 제외하고 오르비에토, 피렌체, 산 지미냐노, 시에나, 아시시, 피사, 볼로냐, 밀라노, 토리노, 코모, 베로나 등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올랐지요. 도시와 자연 환경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미술 작품이었으니까요.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종탑에서 바라보는 노을빛 베네치아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줍니다.
▲ 해질녘의 베네치아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종탑에서 바라보는 노을빛 베네치아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져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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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종탑에서 바라보는 베네치아의 전경. 그 주인공은 뭐니뭐니 해도 바다였습니다. 이탈리아에 온 지 20일 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바다. 바포레토를 타고 '부라노섬'과 '카날 그란데'를 누비고 다녔는데도, 운하와 인간의 도시가 만들어낸 풍경에 넋을 잃어 잠시 잊고 있었던 베네치아의 바다 말입니다.

천년도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바다를 메우고 세워진 도시 베네치아. 우리는 흔히 서양 문화는 자연과 융합하지 못하고 자연을 정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 배워 왔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베네치아의 바다와 도시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단편적인 사고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산업혁명 이후 근대라는 미명하에 지금까지도 자행되고 있는 자연환경에 대한 폭력적 파괴를 보면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양의 현실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화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인식의 차이로 환원시킨다면 그 또한 지나친 편견일 뿐입니다.

만일 베네치아인들이 자연을 정복하려 했다면, 지금처럼 아름다운 베네치아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인간의 손에 파괴된 자연이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우리는 남태평양 '이스터섬'의 역사에서 배운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닥쳐온 지구 온난화도 그 실증 중의 하나겠지요.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 환경에 적응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베네치아의 바다와 도시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경은 (오늘날 환경론자들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도 환경 파괴의 산물이겠지만) 산업혁명 이전 서양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연 환경에 적응해 왔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이 지금같은 속도로 진행된다면 머지 않아 이 아름다운 도시, 베네치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전망은 그래서 우리를 더 우울하게 합니다. 자연 환경에 대한 파괴를 최소화하고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 크리스마스의 일몰을 맞이하고 있는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전경은 이렇게 깊은 고민도 안겨 줍니다.

베네치아 화파의 유려한 빛과 색채의 근원이었던 베네치아의 일몰은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언젠가 사라질 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 베네치아의 낙조 베네치아 화파의 유려한 빛과 색채의 근원이었던 베네치아의 일몰은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언젠가 사라질 지도 모를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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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바포레토를 타고 본섬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바쁜 걸음으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제, 그러니까 베네치아에 처음 입성했던 12월 24일, 베네치아의 관문 '산타루치아 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각종 '베네치아 패스'들을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산마르코 광장 패스', '성당 패스', '바폴레토 자유 승선권' 등, 모두 입장료와 교통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베네치아 여행에서 필수적인 것들이지요.

그런데 지금 와서 계산해 보니, 베네치아의 16개 성당을 볼 수 있다는 '성당 패스'는 굳이 사지 않아도 될 뻔 했습니다. 알고 보니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대부분 성당들이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료 개방이었던 것이죠. 정말 바보같은 일이었는데, 어쨌든 그 '성당 패스'를 구입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곳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입니다.

베네치아 최초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 이곳에서 우리는 ‘회화의 군주’ 티치아노를 만납니다.
▲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베네치아 최초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성당으로 이곳에서 우리는 ‘회화의 군주’ 티치아노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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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체스코가 교황으로부터 수도회 설립을 인가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222년,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베네치아에 도착해 지은 이 성당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성당 중 하나입니다. 붉은 벽돌로 장식된 성당의 외관은 지극히 소박하지만, 이곳에는 반드시 만나야 할 작품이 있습니다. 티치아노의 위대한 걸작, '성모 승천'입니다.

1510년 조르조네가 요절하고, 1516년 조반니 벨리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베네치아 화파의 앞날은 채 서른이 되지 않은 젊은 티치아노에게 맡겨집니다. 20대 초반부터 벨리니의 문하생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티치아노. 그는 벨리니가 죽음을 맞이한 그 해, 처음으로 초대형 성화 제작을 의뢰받게 되는데 바로 이 작품, '성모 승천'입니다.

그리고 2년 후 작품이 완성되자 베네치아인들은 베네치아 화파의 새로운 주인공, 아니 이른바 '회화의 군주'의 탄생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 작품으로 인해 조르조네의 혁신도, 소박하면서도 유려한 조반니 벨리니의 색채도 순식간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티치아노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티치아노, ‘성모 승천’,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그 누구라도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 성모 승천 티치아노, ‘성모 승천’,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그 누구라도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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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7미터에 달하는 대형 성화, '성모 승천'은 분명, 격식을 제대로 갖춘, 가톨릭 성당의 중앙 제단화입니다. 하지만 보는 순간, 그 누구라도 매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아니 (심지어 개신교 신자를 포함해서) 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도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가득 채운 화면과 빛을 통해 완성되는 드라마틱한 연출에 눈을 뗄 수 없을 테니까요. 피렌체의 대가들이 화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요소로 소묘를 중시했다면, 티치아노를 비롯한 베네치아 화파는 빛과 색채를 통해 그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는데, 이 그림을 보면 누구라도 그 의미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상에는 성부가 있고, 지상에는 성모의 승천을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예수의 제자들이 있죠.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오로라를 배경으로 매혹적이면서도 신성한 표정의 성모 마리아가 화면 중앙에서 율동감 넘치는 실루엣을 드러내며, 말 그대로 승천하고 있습니다. 성모 주위의 천사들은 지상과 천상을 구분하며 성모의 승천을 경축하거나 돕고 있죠.

그런가 하면, 성모 마리아의 붉은색 옷은 그 아래 두 제자의 붉은색 옷과 함께 절묘한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사용된 과도한 단축법과 어울려 관람객의 시선을 성모에게로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죠.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색채와 빛의 사용, 상승감 넘치는 구도, 인물들의 생생한 표정과 동작. 어느 하나라도 빼놓을 것 없는, 참으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비평가는 이 그림을 두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함과 경이로움, 라파엘로의 즐거움과 우아함, 그리고 자연의 진정한 색채가 있다."

비록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나는 한참 동안 그림 앞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서서, 나중엔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보고 또 보았지요. 완벽한 작품 앞에 서면 두려움마저 느껴진다던 누군가의 말도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경외감'이란 단어의 의미를 바로 이 작품, 티치아노의 '성모 승천'에서 깨달았습니다.

이제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 성당에는 '성모 승천'외에도 빼놓지 말아야 할 작품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역시 티치아노가 그린 '페사로의 제단화'입니다.

 티치아노, ‘페사로의 제단화’,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슬며시 비틀어진 소실점은 이후 다양한 구도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 페사로의 제단화 티치아노, ‘페사로의 제단화’, 베네치아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슬며시 비틀어진 소실점은 이후 다양한 구도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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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오른쪽 중앙 부분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있고, 그 왼쪽 아래에는 성 베드로, 그리고 앞줄 오른쪽에는 그림을 주문한 야코포 페사로가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 그러니까 왼쪽에는 페사로 가문의 문장이 있는 붉은 깃발을 든 기사가 서 있고, 잡혀온 터키군 포로까지 보입니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새로운 구도 때문입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있는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일점투시도법을 이용한 원근법으로 그려진 최초의 그림 말입니다. 그 그림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그림 중앙에 소실점을 놓고 좌우 대칭 구도로(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마찬가지) 그렸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번 밝혔습니다.

그런데 티치아노의 이 작품은 그것을 슬며시 비틀어 놓았습니다. 그림의 주요 인물인 성 모자는 오른쪽 위편에 위치시키고 소실점은 왼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중앙과 왼쪽의 빈 공간은 커다란 기둥과 붉은 깃발로 채웠지요. 소실점의 이동! 그렇습니다.

이것은 미술사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가능케 한 또다른 혁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유럽 화가들은 다양한 소실점을 발견하고, 그래서 또 그만큼 다양한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에서 만났던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데뷔작과 같은 장소에 묻힌 ‘회화의 군주’ 티치아노의 무덤입니다.
▲ 티치아노의 무덤 자신의 데뷔작과 같은 장소에 묻힌 ‘회화의 군주’ 티치아노의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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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티치아노의 무덤 앞에 섭니다. 자신을 세상에 알린 최초의 작품과 같은 공간에 묻혀있는 티치아노. 베네치아 화파의 대표이자 베네치아 회화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티치아노. 서양 회화사에 끼친 티치아노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칠해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오늘의 화가들은 비록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사실 모두 티치아노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거장의 최초와 최후를 한 자리에서 만나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문화를 윤택하게 하는데 일조한 그와 그의 후예들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찬사입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티치아노, #카날그란데, #산조르조마조레, #틴토레토,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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