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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는 쾌재를 불렀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영상이 나왔을 때 감독이 즐겁게 외치는 '컷'과 같은 것이다. 원래 한두 사람 정도 크게 다칠 것을 예상했으나 세 명이나 한꺼번에 죽은 것은 '출연진'들의 과도한 몰입 때문에 나온 결과로 봤다. 그만큼 다케우치에게 인간은 자신의 시나리오와 명령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단역이나 소품일 따름이었다. 그는 다음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오하라 검사를 부른다.

"이따가 저녁 뉴스 시간 전에 외무성 장관과 법무성 장관 기자회견 자료를 미리 보내라고 하도록. 그리고 일단 자네가 먼저 지시한 내용과 맞는지 검토하고 내게 보고 하게."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K라는 친구는 어떻게 할까요? 한국 대사관이 외무성은 물론 검찰에도 실종자에 대해 그 행적을 수사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데요."

"뭘, 어떻게 해? 내버려 둬. 대사관에다 계속 철저하게 수사할 것이고, 꼭 찾아주겠다는 립 서비스만 하면 되잖아? 그리고 그 친구는 독방에다 푹 썩혀 둬. 일단 자신이 고립돼 있고,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현실을 처절하게 느끼도록. 그래야 순응하는 법도, 체념하는 법도 배우지."

오하라는 마음이 무겁다. 이렇게까지 멀리, 되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떠내려 올 줄은 몰랐다. 자신이 선택을 받아 극우단체 간부요원으로 컸지만 이제는 힘겹다. 벗어나고 싶다. 다케우치를 떠나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겨자씨만큼 작은 불씨가 K를 태워버리고, 1억명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일본이라는 섬을 집단 광기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아프게 다가온다.

단지 오하라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다케우치의 관심과 기획력이 남다르다는 그의 칭찬을 받고 싶어서 내놓은 그의 뜻 없는 돌팔매질일 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나온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었다'는 말을 실현시키고 있다. 영화에서 본 괴물의 일그러진 모습이 다케우치와 겹친다. 자책감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괴물을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그 괴물이 벌이는 온갖 악행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마침내 그 괴물과 함께 불타 사라지는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미키가 K의 부재 중인 지금, 곁에 누워 사랑을 나눴을 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오하라 또한 비극적인 쇼가 시작된 지금, 다케우치와 처음으로 입 맞췄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지난해에 개봉된 영화 <프랑켄슈타인:불멸의 영웅>은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파멸로 이끈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불멸의 영웅> 지난해에 개봉된 영화 <프랑켄슈타인:불멸의 영웅>은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파멸로 이끈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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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라가 나간 다음 다케우치는 전화를 받는다.

"네, 이토 회장님. 몸은 좀 어떠세요. 한번 찾아뵙는다 하고 못 찾아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이토가 지팡이를 짚고 불편한 몸을 이끌어 약속 장소에 먼저 나타난다. 사무실로 찾겠다는 이토를 굳이 찻집에서 만나자며 비서에게 알려준 찻집이다. 약속 시간 보다 20분 가까이 지나자 다케우치가 들어온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계속 급한 일이 겹치네요."

"아니네. 바쁜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무슨 일이십니까?"

인사치레로 죄송하다는 말에 이어 바쁘니까 용건만 얘기 하라는 말투다.

"지난번 혼사도 깨지고 염치가 없어서 원…."

"이미 지난 일입니다. 어떤 일인지 말씀해 보세요."

"자네에게 꼭 부탁할 게 있네."

"말씀해 보세요.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나오셨는데 들어드려야죠."

그럴 것 같았다는 표정으로 선심을 쓴다.

"사람 좀 찾아주게."

"그건 경찰서에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낯빛이 굳어지며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한다. 분명 K에 관한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다.

"아니, 좀 시급해서 그런다네. 제발 좀 부탁하네."

이토 회장이 보여주는 메모지에 적은 글은 미키의 필체다. 그리고 미키와 함께 찍은 사진이 클립으로 끼워져 있다. 다케우치는 다 알면서도 의례적으로 찌푸리며 되묻는다. 

"이 사람이 누굽니까? 미키의 친구라도 되나요?"

"미안하네. 미키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네."

다케우치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그러나 늘 그랬듯이 평정심을 가장하고 웃는다. 착한 사람으로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특기인 사람답다.

"제가 요즘 워낙 일이 많습니다만, 시간을 내서 찾아보겠습니다."

"부탁일세. 자네가 큰일을 한다는 것, 다 알아. 그만한 일쯤은 지금이라도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이토는 다케우치를 치켜 주는 것처럼 표현했지만 강하게 요구하듯 말한다. 산전수전을 겪은 베테랑의 강한 기세에 다케우치는 머쓱해진다.

"네. 알아보고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다케우치는 더 이상 볼 일은 없을 것처럼 떠난다. 이토는 그런 다케우치를 못마땅하게 노려본다.

'저 친구가 내 사위가 될 뻔한 녀석이었나.'

그리고 그때서야 그 미움을 다스리려는 마음으로 옥로차를 주문한다.

어떤 전투보다 더 격렬했던 정사가 끝난 다음 찾아온 안온함이다. K의 팔베개를 벤 미키는 그의 심장에 귀 기울인다. 쉴 새 없이 '템페스토소, 비바체'로 쿵쾅거리던 그의 심장도 서서히 평화롭게 '돌체, 모데라토'로 돌아온다.  

"미키, 혹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어?"

"갑자기 웬 죽음?"

"아니, 그렇잖아. 우리가 살아 있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느끼고, 서로 만질 수 있는데 죽으면 그렇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후회 없이 삶을 마음껏 누려야 되는 거 아냐?"

"그래야지.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에 우리가 원하는, 의지하는 일들을, 우리가 옳다고 믿는 일들을 해야지. 그러고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가장 평등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진 자, 못 가진 자들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찾아가는 밤이니까. 다만 그 밤이 지나면 다시 해가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죽음을 맞기 위한 준비도 필요한 거고."

"갑자기 의사에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 같아. 그럼 다음은 '버킷 리스트'를 작성해야 하겠네. 내가 받아 적을게."

미키가 알몸으로 책상으로 다가가 수첩과 볼펜을 찾는다. 은은한 조명에 비친 그녀의 뒷모습 실루엣은 아름다움이라는 언어적 표현으로는 부족한, 낙원의 한 장면이다. 그 모습은 K에 망막에 강렬하게 맺히고, 이내 기억 저장장치에 날카롭게 파고들어 석판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는 판화가 된다. 그림만 봐도 숨 막힐 듯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다나에>나 <유디트>를 떠올릴 만큼 고혹적이다.

"버킷 리스트 첫 번째는 벌써 떠올랐어."

"뭔데?"

"지금 너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 최소한 너를 온전하게 내가 알 수 있는 것, 너의 모든 것을 느끼는 것이 나의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소원이야."

"그럼 두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추억하며, 외롭지 않게 죽는 것."

"그게 뭐야. 전부 평범한 것뿐이잖아."

"그렇지 않아.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게 있어. '셀프 장례'라고 들어 봤어?"

"그게 말이 돼? 죽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장례를 치러?"

"아니 죽는 사람이 장례를 치르는 게 아니라 미리 준비해 놓는 거래. 일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고, 요즘 수많은 사람들이 홀로 죽어가는 게 현실이잖아. 그래서 자신이 고독사할 가능성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죽을 때 입을 수의나 자신이 들어갈 관, 그리고 장례 절차까지 모두 미리 장례업체와 예약을 해놓는 게 셀프 장례라는 거래. 참 우울한 얘기지?"

"그렇다. 너무 슬프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추억하며, 외롭지 않게 죽는 것이 그리 평범한 소원은 아니지. 그러니까 내가 먼저 좋은 데로 가든, 미키가 먼저 가든 우리 둘은 떠나는 한 사람을 꼭 바래다줘야 해. 알았지?"

"알았어. 당신도 꼭 그렇게 해줘야 돼? 약속!"

달콤한 기억에 어울리지 않게 머리가 아프다. 미키가 의식이 돌아온 다음 느낀 것은 심각한 두통이었다. 그리고 병원 특유의 냄새.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에 휩쓸려 넘어진 기억 밖에 없다. 카메라에 부딪혀 얼굴에 상처를 입은 카메라 기자는 구급차를 불러 미키를 급히 인근에 있는 동대병원으로 옮겼다. 아버지에 이어 미키도 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미키가 구급차에 실려 올 때는 의식이 없었다. 중상을 걱정했으나 1차 검사결과 약간의 뇌진탕 때문이란다. 천만다행이다.

"이토 기자, 괜찮아?"

"네,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큰 일 날 뻔했어. 시위현장에서 취재 중 넘어진 거 기억나지? 그때 의식을 잃었어. 내가 얼른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온 거야. 중상은 아니라니까. 일단 병원에 있어. 나는 회사에 들어가서 상황 정리 좀 하고 올 게."

"영상은 떴죠?"

"응, 먼저 보냈어."

"고마워요. 부탁해요."

눈두덩에 반창고를 붙인 카메라 기자가 떠나자 응급실 침대에 미키 홀로 남았다. 핸드백에서 거울을 찾아 비춘다. 얼굴에는 상처가 없다. 하지만 오른 쪽 팔이 아프다. 넘어지면서 충격이 있었던 것 같다. 환자복을 입었지만 부목을 대지 않은 것을 보니 부러진 것은 아니다. 어깨도 결리는 듯하다.

갈증을 느낀다. 간호사에게 무엇을 마셔도 되는지 물었다. 물은 마셔도 된다고 한다. 두리번거렸다. 응급실 내에는 물이나 정수기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옆에 놓인 슬리퍼를 끌고 응급실을 천천히 나선다. 슬로비디오처럼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그러나 천천히 오갈 뿐 정수기는 보이지 않는다. 화장실을 지나 로비로 향한다. 정수기를 발견한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돌아선다. 사람들이 모여 TV를 바라보면서 웅성거린다. 무슨 일인지 다가가 본다.

사람들 시선은 TV에 쏠려있다.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벌어진 시위대의 싸움에서 사상자가 나왔다는 뉴스다. 공교롭게도 미키가 일하는 방송사 보도다. 죽은 사람의 신상과 다친 사람들의 이름이 이어지고, 긴급 편성된 해설에서는 전문가들이 나와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논평한다. 계속 반복해서 틀어주는 시위 관련 뉴스에 미키가 넘어져서 당황하는 모습과 카메라 앵글이 어지럽게 흔들리는 모습도 되풀이된다.

재팬 시리즈 야구 중계도 아닌 반복된 장면은 당시 시위 현장의 급박함을 알리려는 의도다. 그러면서 자사 방송기자 한 명이 취재 중 중상을 입어 동대병원 응급실에서 처치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도 곁들인다. 졸지에 미키는 새삼스럽게 '종군기자'로 변신했으며, 마치 황궁과 야스쿠니 신사가, 아니 도쿄 전체가, 일본 전체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그리고 속보가 뒤를 잇는다. 그 내용은 훨씬 비약적이다. 경찰이 연행한 살인 용의자 중에 한국인 2명이 포함됐다는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재일 한국인의 잇따른 '헤이트 스피치' 반대에 극렬한 참여와 다른 외국인들의 군중심리를 통한 시위 참여 등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의견을 아무런 사실이나 검증도 없이 쏟아내고 있다.

재야 학자나 온건한 합리주의적 해설가, 패널은 보이지 않는다. 늘 우익 입장을 극단적으로 옹호했던 '망언 제조자'들로 채워진 극우 기관방송이나 다름없다. 한국에서 군사독재 시절 봐 오던 '관제언론' 뺨친다. 늘 해오던 것처럼 사상자를 낸 시위에서 보였듯 일본인은 피해자이며 가해자는 외부로부터 온 '가이진(外人)'이라는 논리다.

미키는 순간 숨이 멎는다. 한국에서 일어난 폭력사태 때 보여준 야쿠자 모습, 오사카 조선인학교, 교토 우토로 마을 폭행 사태, 그리고 오늘 일어난 시위대 충돌 사건 등 일련 사건들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움직임, 아울러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난폭한 힘이 분명히, 그리고 완강하게 느껴진다.

TV의 화면이 바뀐다.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는 장면이다. 잠시 후 기시이 야쓰나리 관방장관이 나타나고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최근 발생한 일본 천황폐하 어진 훼손사건 및 한국 내 극심한 반일 감정과 반일 시위, 다케시마 어선 접근에 대한 한국군의 총격과 그로 인한 어선 손상 등 한국의 일본에 대한 적대적이고 감정적인 일련의 상황에 대한 항의 표시로 본국의 한국파견 대사를 소환하고, 한국 대사관 및 영사관을 잠정적으로 폐쇄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본국 국민들에 대한 조속한 귀국을 권고하는 훈령을 발표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발생한 한국의 비우호적 행태를 규탄하는 국내 반한 시위가 심각해져 가는 현실을 감안, 국내에 체류 중인 한국인을 포함, 한국 국적을 가진 자와 북조선 국적을 가진 자들의 조속한 귀국을 종용한다. 이에 대해 이달 말까지 유예기간을 두되 향후 미귀국자들의 안전에 대해 일본 정부는 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다."

충격, 그 자체다. 거의 전쟁 직전에야 내놓을 수 있는 극단적인 외교조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것, 더 무서운 것은 기자회견을 보고 있던 사람들 반응이다. 언론매체 수용자로서 방송에 대한 비판적인 수용이나 의견은 전혀 없다. 그저 '한국은 안 돼', '한국인은 일본에서 내쫓아야 돼'라는 반응, 그러니까 매체의 숨겨진 의도가 담긴 전달 내용을 그대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태그:#프랑켄슈타인,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셀프장례, #대사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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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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