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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펠탑 테러이후 파리 에펠탑과 공공건물에서는 화려한 빛을 지우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빛(프랑스 국기를 상징하는 색)을 비추고 있다. ⓒ 김민수
파리에 입성하기 하루 전에 테러가 발생했고, 파리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프랑스가 시리아 IS근거지에 폭격을 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관련기사 : 난생 처음 간 프랑스, 에펠탑도 빛을 잃었다). 민간인 희생자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하루를 보냈을 때, 테러 용의자들이 숨어있는 곳에서 7시간 여의 대치 끝에 이번 테러의 주동자를 사살했으며, 몇 명의 용의자들을 체포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곳에 있었기에 11.13 파리 테러가 더 실감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초행길이기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만 파리는 나에겐 낯선 도시요, 내게 친근한 도시는 서울이다.

그곳에서도 나는 11월 14일, 서울 소식이 궁금했다. 서울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은 11월 14일 집회를 차벽으로 봉쇄하겠다는 소식이었기에 행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인터넷 환경은 좋지 않았고, 숙소의 와이파이는 신호가 미약해서 서울의 소식을 접할 수는 없었다.
헌화 개선문 가는 길에 놓여진 헌화 ⓒ 김민수
다음 날, 페이스북을 통해서 경찰의 물대포에 농민 한 분이 응급실로 실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해 경찰이 공공연하게 차벽을 설치하고, 캡사이신과 물대포를 사용하고, 채증을 심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에, 이번 대규모 집회는 더더욱 시위대에 대해 공격적으로 대할 것이라는 예상대로였다.

프랑스 친구는 말했다.

"국민을 마치 테러리스트를 대하듯 하는군."

파리를 유린한 테러, 중무장한 경찰은 곳곳에 있었지만 이방인인 내게도 웃음을 지었을 뿐 검문 검색은 하지 않았다. 공공장소에 들어갈 때에도 가방을 든 입장객들의 가방만 열어줄 것을 요구했을 뿐, 대부분 그냥 통과시켰다. 테러가 일어나지 않은 서울에서 경찰의 고압적인 태도로 행해지는 불심검문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그 모습이 상당히 이국적이었다.
파리 사르트르의 지정석이 있었던 카페, 많은 이들이 테러이후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 김민수
1980년 광주, 파리보다 더 많은 시민이 자국 군부의 테러에 의해 숨졌음에도 불구하고 참혹한 사건의 진실은 오랫동안 감춰졌다. 그리고 그 주동자들은 대통령까지 할 수 있었던 나라가 내가 살아가는 조국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1970년대 유신독재 하에서 각종 간첩조작사건으로 젊은 청춘들이 정당한 재판도 받지 못하고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으나, 그 진실은 아주 먼 훗날에나 밝혀졌다.

그리고,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오를 수 있을 만큼 민주화 된 나라는 컨데이너 박스로 시위대를 차단하던 명박산성의 시대를 넘어, 경찰차로 두겹 세겹 저지선을 만드는 것도 부족해서, 물대포와 캡사이틴과 각종 영상채증장비와 CCTV를 통해서 국민의 소리를 차단하고 있다.
파리전경 몽마르뜨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전경, 낮은 먹구름과 찬바람이 불며 스산한 가을비가 내렸다. ⓒ 김민수
파리를 유린한 테러에는 한 목소리로 비난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을 유린한 국가적인 테러에는 침묵하고 있다. 오히려 종편과 일베와 여당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시위대를 향해 2차적인 대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파리지엥, 그들이 테러에 반항하는 방식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카페에 앉아 늦은 시간까지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전처럼 화사하거나 풍족하지는 않지만, 테러리스트들에게 '아무리 파리를 공격해도 우린 끄떡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시위라고 했다.

파리지엥은 그냥 평소처럼 카페 테라스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테러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테러리스트를 소탕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바라는 대로 우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흐름들로 인해 거리도 대체로 평온했으며, 사이렌 소리와 폭발물처리차량과 응급차량이 거리를 질주해도 그들은 주시할 뿐, 일상의 평정을 잃지 않았다.

"어떻게 국가가 국민에게 테러를 감행하지? 우리 같았으면 저런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다면, 차량에 방화를 했을 거야."

프랑스 친구가 내 속을 뒤집는 말을 했다. 나는 그것이 서울의 일상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늘 그래왔다고, 그래서 1987년에 넥타이 부대까지 일어나 민주화를 이뤘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지금 내 조국의 현실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게 현실이므로.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폴레옹에 대해 물었다. 물론, 개인적인 평가겠지만 동행한 프랑스 친구의 평가는 냉혹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사람이야.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전쟁을 했던 전쟁광이지."
앵발리드 돔(생 제롬) 성당 나폴레옹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성당 ⓒ 김민수
역사적인 평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정복자들의 이름만 달달 외웠을 뿐, 피정복지의 아픔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국사 역시도 마찬가지다. 지배자들의 역사를 배웠을 뿐이지, 민중의 역사를 배우지 못했다.

겨우겨우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지배자의 역사가 아닌 민중의 역사, 객관성을 담보한 역사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역사를 강요당하고 있다.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프랑스 친구는 아주 냉담하게 대답했다.

"테러보다 더 무서운 짓을 하는군. 국민들이 가만히 있어?"

그래서 시위를 했고, 차벽이 막아섰고, 물대포를 쏘고, 어쩌구저쩌구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창피한 노릇이었다. 물대포를 맞은 농민이 사경을 헤매는 데 시위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각 나라의 사례를 들면서 시위대를 '폭도'라고 윽박지른다. 나는 물었다.

"너희들은 IS의 테러에는 그렇게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왜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흥분을 하지?"
"파리 테러는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한 테러가 아니라 IS가 한 것이니까. 그러나 너희는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테러를 한 것이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국가를 상대로 시위를 할 때는 한국 시위대보다 더 험하게 싸운다고 했다. 물론, 한 개인의 생각일 수도 있고, 그 친구의 입장일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업을 하면, 시민들이 당장 불편해도 그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할 줄 아는 시민들을 가진 프랑스가 아닌가?

우리는 어떠한가? 일베 같은 이들은 증오에 가까운 언행과 근거없는 주장들을 해대고, 여당 정치인들은 그것을 그대로 말로 옮기고, 종편은 또 그 말을 받아 확산시키고, 아무런 불편함을 겪지 않은 이들에게 조차도 증오심을 가득 차게 한다. 참으로 무서운 나라 아닌가?

이런 경향들이 테러가 발생한 파리보다 서울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다. 인간이 인갑답게 사는 길은 테러와 맞서 싸우듯 독재와도 맞서 싸우는 것이리라.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상실한 독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돌아봐야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국가가 국민을 테러 분자들을 대하듯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태그:#파리테러, #민주주의, #국가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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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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