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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운 항일투사와 아내
▲ 만주의 항일투사 김철운 김철운 항일투사와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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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운 항일혁명투사의 무덤에서 60년만에 발견된 편지. 당시 항일유격대에서 싸웠던 류경수, 강위룡 유격대원이 1940년 비밀조직원 김철운을 만나러 왔다가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식들이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묘지 돌 아래 묻었다고 한다. 편지를 봇나무껍질로 싸서 남겼두었던 것을 김철운 항일열사의 막내아들 김문필(88세) 옹이 2000년에 발견하면서 60년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류경수항일투사의 편지 김철운 항일혁명투사의 무덤에서 60년만에 발견된 편지. 당시 항일유격대에서 싸웠던 류경수, 강위룡 유격대원이 1940년 비밀조직원 김철운을 만나러 왔다가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식들이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묘지 돌 아래 묻었다고 한다. 편지를 봇나무껍질로 싸서 남겼두었던 것을 김철운 항일열사의 막내아들 김문필(88세) 옹이 2000년에 발견하면서 60년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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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수(해방 후 북에서 105탱크사단장), 강위룡(해방 후 김일성주석 호위사령부 책임자)이 1940년 비밀조직원 김철운 동지 무덤에게 남긴 편지 내용
▲ 만주 조선족 항일투사들의 비밀편지 류경수(해방 후 북에서 105탱크사단장), 강위룡(해방 후 김일성주석 호위사령부 책임자)이 1940년 비밀조직원 김철운 동지 무덤에게 남긴 편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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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수(해방 후 북에서 105탱크사단장), 강위룡(해방 후 김일성주석 호위사령부 책임자)이 1940년 비밀조직원 김철운 동지 무덤에게 남긴 편지 내용
▲ 만주항일투사 류경수, 강위룡의 비밀편지 류경수(해방 후 북에서 105탱크사단장), 강위룡(해방 후 김일성주석 호위사령부 책임자)이 1940년 비밀조직원 김철운 동지 무덤에게 남긴 편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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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운 항일투사의 셋째아들 김문필씨가 아버지 김철운 열사가 가르쳐준 추도가를 부르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 항일투자의 막내아들 김문필 씨 김철운 항일투사의 셋째아들 김문필씨가 아버지 김철운 열사가 가르쳐준 추도가를 부르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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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운 항일투사의 무덤에서 편지가 발견된 2000년 당시 관련 길림성 언론 보도
▲ 김철운 항일투사 관련 보도 김철운 항일투사의 무덤에서 편지가 발견된 2000년 당시 관련 길림성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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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국 의용군으로 참전하여 류경수 탱크부대에서 싸웠던 김철운 항일투사의 셋째아들 김문필 씨의 모습(맨 왼쪽), 105탱크사단 류경수 사단장이 동지였던 김철운 항일투사의 자녀들을 그렇게 찾고 싶어했다는 것을 이때는 알 수 없었다.
▲ 조선지원군 시절 김문필 씨 한국전쟁 중국 의용군으로 참전하여 류경수 탱크부대에서 싸웠던 김철운 항일투사의 셋째아들 김문필 씨의 모습(맨 왼쪽), 105탱크사단 류경수 사단장이 동지였던 김철운 항일투사의 자녀들을 그렇게 찾고 싶어했다는 것을 이때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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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연변 항일유적지를 취재하는 과정에 동북항일련군 소속 항일부대 비밀조직원으로 일제를 격멸소탕하는데 많이 기여했던 김철운 항일투사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2000년 그의 무덤을 돌보던 셋째아들 김문필(당시 73세)씨가 무덤 큰 돌 아래에서 류경수, 강위룡 유격대원이 봇나무껍질로 싸서 묻어둔 편지가 발견했는데 그 안에 항일무장투쟁과 관련된 생생한 자료들이 담겨 있었다.

류경수와 강위룡 유격대원은 일제치하 재만 젊은 조선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항일유격대에서 싸우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북에서 탱크부대를 지휘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주목이 되었다.

편지는 김철운 열사의 세 아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는데 "적통치구역에서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했던 김철운 열사가 수시로 보내준 적정 탐지정보 덕에 홍기하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고 일제의 밀정도 제 때 처단, 조직을 보위하는데서 큰 도움을 받았다"며 아버지를 훌륭한 애국자로 평가하고, 그 아버지가 준 정보로 적의 밀정을 처단하고 돌아가는 길에 만나러 왔는데 안타깝게도 일제 감옥에서 조직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입을 꼭 다물어 당하게 된 극악한 고문 후유증으로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며 아들들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 애국의 길을 걸어가길 바란다는 두 유격대원들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편지에는 특히 편지를 발견했을 때 만약 해방이 되었다면 이 편지를 들고 민주정부를 찾아가고 일제와 계속 싸우고 있다면 동북항일련군 부대를 찾아와 함께 싸우자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 편지를 김문필씨가 길림성 정부에 신고하니 유물국에서 신중히 검토한 결과 진본임을 확증하고 2급 국가유물로 판정, 연벽박물관에 소장한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김철운 항일투사에게 항일열사증을 수여하였다.

편지는 연필로 반듯반듯 정성을 다해 썼으며 글씨를 쓴 면에 촛물을 먹여 종이가 썩지 않게 한 후 다시 봇나무껍질로 싼 다음 모든 틈과 입구를 촛물로 완전히 밀봉하여 돌 아래에 끼워두었었다.

김문필씨는 13살에 이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비밀편지 심부름을 하는 등 아버지의 비밀지하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묘지를 잘 관리해왔는데 그 과정에 이 편지를 발견한 것이다.

김문필씨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 김철운씨는 일제의 감옥에 끌려가 창자가 보일 정도로 인두로 복부를 지지는 고문을 당했지만 조직의 비밀을 철저히 지켰다고 한다. 그 만신창이 몸으로 집에 돌아와 치료를 받으면서도 김철운씨는 계속 정보를 모아 지정된 통로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정보를 젊은 조선인 주축의 항일유격대에 보내주었다고 한다. 오히려 치료받으러 용한 의사 찾아 간다고 복부의 상처를 일제 검문소에 보여주는 등 아픈 몸을 이용하면서 정보수집과 전달임무를 열성적으로 진행하였다.

특히 일제가 만주의 항일련군을 완전히 없애려고 대대적인 병력을 끌어들였던 1930년대 말 김철운 열사의 일본군 이동 관련 정보는 항일부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이 시기 양정우, 위증민 등 중국의 항일련군 지도자들이 희생되고 민족주의계열 구국군이 거의 와해된 것만 봐도 얼마나 일제의 유격대 토벌작전이 대대적으로 악랄하게 진행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런 상황에서 젊은 조선인 주축의 항일유격대는 홍기하전투, 대마록구전투 등에서 일본 관동군 토벌대를 번번이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는데 대부분 매복전을 통한 승리였다. 미리 적들의 움직임을 통보받고 매복해 있다가 쓸어버렸던 것이다.

김철운 비밀조직원이 항일부대 사령부에 통신을 보내는 과정을 보면 이런 비밀조직원이 한 둘이 아니었으며 연락방법도 매우 안전하고 체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철운 투사가 임무를 수행하러 국내에 두 번이나 들어갔다가 체포되어 만신창이 몸으로 풀려나온 후에도 바로 조직과 통신을 재개한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것만 봐도 소위 말하는 젊은 조선인들이 주축이 된 항일유격대가 산에서 싸우는 유격대원들만 잘 준비시킨 것이 아니라 적통치구역 안에도 치밀한 조직체계를 세우고 질서정연한 연락망을 얼마나 튼튼하게 꾸려놓았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여전히 김일성 부대는 북이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나 보수언론들은 중국에서 드러난 이런 자료를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의 우연인지는 몰라도 류경수 유격대원이 그렇게 찾던 동지의 아들 김문필씨는 한국전쟁시기 자신이 지휘하던 105탱크사단 측지병으로 활약하였다. 만약 그때 김문필씨가 류경수 사단장이 그렇게 찾던 동지의 아들임을 알았다면 김문필씨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해방 후 북에서는 민족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만주에서 함께 싸우다가 희생된 열사들의 유자녀들을 찾아 잘 키우기 위해 만경대유자녀학원까지 세우고 정성과 사랑을 다 주었다고 북은 주장하고 있다. 항일투사 김구선생도 방북하여 이 만경대유자녀학원에 공산주의 독립운동자 자녀만이 아니라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유자녀도 다 찾아다 보살피고 있는 것을 보고 감복했었다고 한다.

머리가 명석하고 성실하게 지원군 활동을 했던 김문필씨는 전쟁이 끝난 후 북에서 중국으로 가지 말고 북에서 살자며 학교에까지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는 등 그렇게 잡았지만 부모형제가 다 고향에 있어 기어이 뿌리치고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근면 성실한 그이기에 중국에서 자녀들을 다들 어엿하게 잘 키웠으며 지금은 연로보장도 잘 받고 있어 구순이 가까운 나이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북에 남지 않은 것에 후회는 없냐는 물음에 "북에서 살았다면 경제난 때 못 먹어서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며 중국으로 온 것을 잘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젊은이들이 점점 우리의 선배들의 애국 투쟁의 역사를 점점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점은 안타깝다고 말했다.

김문필씨는 아버지가 죽으면서 장례를 치를 때 불러달라며 가르쳐준 추도가 가사와 선율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추도가를 그가 눈물을 흘리며 불러주었는데 "몸은 비록 죽었어도 혁명정신 살아있다"는 가사를 듣고 나니 아버지가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지 짐작이 갔다.

이 유언, 어찌 아들에게만 남긴 것이겠는가. 우리민족 후대들이 모두 가슴에 새겨야 할 유언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여전히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지금도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 우기고 있으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망상을 이루겠다고 재침략 야망에 미쳐 군국주의의 길로 노골적으로 들어서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만주 개산툰 김문필 씨 집을 방문한 필자(오른쪽)
▲ 김문필씨와 필자 만주 개산툰 김문필 씨 집을 방문한 필자(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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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자주시보와 함께 올립니다.



태그:#만주항일투쟁, #류경수, #김철운, #김일성부대, #비밀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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