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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첫 아침. 낡은 벽돌 건물들 너머로 떠오른 아침 햇살이 역광을 이루며 은은하게 수로를 비추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은 이 작은 수로와 골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수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건물들, 그 아래로 나있는 골목은 두세 명 정도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길은 아예 없고 수로만 있는 경우도 많죠. 포강의 하류와 아드리아해가 만나는 삼각주, 그 수많은 모래톱과 갯벌에 말뚝을 박고 지반을 다져서 세운 마법같은 도시, 베네치아는 이렇게 기존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어느 곳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골목 골목마다 펼쳐집니다.

낡은 벽돌 건물들 너머로 떠오른 아침 햇살이 역광을 이루며 은은하게 수로를 비추고 있습니다.
▲ 베네치아 아침의 소 운하 낡은 벽돌 건물들 너머로 떠오른 아침 햇살이 역광을 이루며 은은하게 수로를 비추고 있습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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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맞은 베네치아의 아침은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연인과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 되어버린 우리의 크리스마스. 하지만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날이란 말이 맞나 봅니다.

언뜻 베네치아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무척 낭만적일 거라 상상됩니다. 나 역시 이탈리아에 오기 전 한국에서 여행 일정을 짜면서 그런 '낭만적 크리스마스'를 꿈꾼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이 '미술 기행'을 떠나온 나에게는 그다지 썩 좋지만은 않습니다.

어차피 홀로 떠나온 여행이고, 낭만을 누릴 여유가 많지 않은 촘촘한 일정입니다. 더구나 크리스마스날엔 대부분의 성당과 박물관이 쉬는 탓에 일정을 짜기가 오히려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를 타고 베네치아 곳곳을 누빌 예정입니다. 그 첫 일정은 베네치아의 부속 섬들인 '무라노섬'과 '부라노섬'입니다.

호텔에서 '무라노섬'으로 가는 바포레토를 타기 위해서는 30분 가량 걸어서 바포레토 승강장까지 가야 합니다. 물론 가까운 승강장에서 바포레토를 타고 환승을 해도 되지만 베네치아의 아침 거리를 걷는 즐거움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미로 같은 베네치아의 거리. 오늘은 어제만큼 허둥대지 않고 구글맵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길을 찾습니다.

도중에 수시로 나타나는 작은 다리들, 그 위에 설 때마다 버릇처럼 좌우를 둘러 봅니다. 구비구비 크고 작은 수로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미술 작품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어젯밤 정신없이 건넜던, 다리 중의 다리,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의 두 개의 본섬을 가로지르는 ‘카날 그란데’를 건너는 첫 번째 다리입니다.
▲ 리알토 다리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의 두 개의 본섬을 가로지르는 ‘카날 그란데’를 건너는 첫 번째 다리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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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운하인 '카날 그란데(Canal Grande)'.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의 두 개의 본섬을 가로지르는 '카날 그란데'를 건너는 첫 번째 다리입니다. 16세기 말에 완공된 이 우아한 석조 다리는 그 자체가 문화유산이자 베네치아를 찾는 여행자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다리 양쪽에 늘어선 귀금속, 가죽 점포들도 명물이지만 다리 위에 서서 바라보는 '카날 그란데'의 풍경이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입니다. 실력없는 초보라 하더라도 카메라만 갖다대면 작품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더구나 다리 아래로 바포레토나 곤돌라가 지나갈 때면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날의 이른 아침. '리알토 다리'도, '카날 그란데'도 아직은 한적합니다. 나는 눈부신 아침 햇살과 함께 밝아오는 하늘, 특유의 색채로 반짝이는 건물들, 일렁이는 푸른 물결, 그 위를 지나가는 바포레토와 곤돌라를 마음껏 눈과 카메라에 담습니다.

리알토 다리에서 바라본 카날 그란데(대운하)의 아침. 바포레토와 곤돌라가 아침을 시작합니다.
▲ 카날 그란데 리알토 다리에서 바라본 카날 그란데(대운하)의 아침. 바포레토와 곤돌라가 아침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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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과 역사가 흘렀을지 생각해 봅니다. 1500여 년 전, 이민족의 침입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던 최후의 정착지. 사람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던 삼각주의 모래톱과 갯벌에 터를 닦고, 길을 만들고, 건물을 올리고, 이토록 찬란한 문화를 이루기 위해 치렀을 고통과 희생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곳은 피라미드나 왕궁 같은 거대 권력을 위한 착취와 억압의 공간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삶의 공간이기에 더 특별합니다. 그런 점에서 베네치아는 잉카 문명 최후의 도시 '마추픽추'와 닮아 있습니다. 물론 '마추픽추'의 역사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곳 베네치아는 여전히 역사와 문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에 또다른 '마추픽추'들의 비극적 희생도 녹아 있겠지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는 무언가에 대한 간절함과 누군가의 희생이 스며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숙연한 기분도 듭니다.

이제 바포레토를 타고 '무라노섬(Murano)'과 '부라노섬(Burano)'으로 향합니다. 베네치아 본섬에서 바포레토를 타고 10분 정도 잔잔한 바다를 건너면 도착할 수 있는 무라노섬은 흔히 '베네치안 글라스'로 불리는 유리 제품 공장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수공예로 만들어진 우아한 유리 세공품들은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 중의 하나죠. 특히, 직접 입으로 불어서 유리 제품을 성형하는 공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리 공장과 유리 공예의 역사와 다양한 제품들을 전시해 놓은 '유리박물관(Museo dell'Arte Vetrario)'은 베네치아 여행의 필수 코스입니다.

베네치안 글라스로 불리는 유리 공예의 섬, 무라노.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은 무라노섬은 유리 조형물만 작은 광장을 장식할 뿐 고요하기 그지 없습니다.
▲ 무라노섬 베네치안 글라스로 불리는 유리 공예의 섬, 무라노.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맞은 무라노섬은 유리 조형물만 작은 광장을 장식할 뿐 고요하기 그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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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망스럽게도 크리스마스를 맞은 무라노섬은 모든 공장과 박물관들은 물론이고 가게와 식당들까지도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나처럼 일정을 잘못 짠 몇몇 여행객들만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뿐 쥐죽은 듯 오가는 사람없는 거리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합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쯤이면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미사가 진행될 시간. 아직은 가톨릭의 영향이 큰 이탈리아의 크리스마스날 오전이 조용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섬에 온 지 20분 만에 다시 바포레토에 몸을 싣고 '부라노섬'으로 향합니다. '부라노섬'도 상황이 비슷할 것 같지만, 그래도 그곳엔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해줄 만한 것이 있습니다.

'무라노섬'에서 바포레토로 35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부라노섬'은 인근의 '토르첼로섬'과 함께 베네치아인들의 초창기 정착지 중 하나입니다. 원래는 어업 중심의 조그만 섬이었는데 베네치아 공화국의 성장과 함께 부라노 여성들이 수공예로 제작한 '부라노 레이스(Burano lace)'가 전 유럽에 수출되어 큰 인기를 얻게 된 곳이죠. 지금도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레이스 박물관과 학교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래의 여행객들은 '부라노 레이스'보다 다른 볼거리 때문에 '부라노섬'을 찾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라노섬' 그 자체, 부라노섬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입니다. 바포레토에서 내리는 순간 눈을 사로잡는 원색의 향연들. 갖가지 원색으로 칠해진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집들이 섬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어떤 장난꾸러기 신이 '부라노섬'을 팔레트로 착각한 것일까요? 형형색색으로 칠해진 집들은 방금 짜낸 물감처럼 선명하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그 크기들도 모두 고만고만해서 애니메이션 속 인형의 집들처럼 예쁘기 그지 없습니다. 골목골목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정말 사람들이 사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바포레토에서 내리는 순간 눈을 사로잡는 원색의 향연들. 갖가지 원색으로 칠해진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집들이 섬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라노섬입니다.
▲ 부라노섬 1 바포레토에서 내리는 순간 눈을 사로잡는 원색의 향연들. 갖가지 원색으로 칠해진 장난감처럼 자그마한 집들이 섬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부라노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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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라노섬’의 집들이 이렇게까지 아기자기하게 된 이유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잘 보이도록 고기잡이 배들을 알록달록하게 꾸민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 부라노섬 2 ‘부라노섬’의 집들이 이렇게까지 아기자기하게 된 이유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잘 보이도록 고기잡이 배들을 알록달록하게 꾸민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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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라노섬'의 집들이 이렇게까지 아기자기하게 된 이유는 짙은 안개 속에서도 잘 보이도록 고기잡이 배들을 알록달록하게 꾸민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관청의 계획에 따라 정해진 몇 가지 색깔 중에 골라서 자신의 집을 꾸밀 수 있지만, 이탈리아, 그 중에서 베네치아인들의 색채 감각이 어디 가겠습니까? 눈앞에 펼쳐진 이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러고 보니, 색채와 빛을 중시한 베네치아 화파의 전통도 우연히 성립된 게 아닌가 봅니다. 이토록 눈부신 하늘과 바다, 이토록 알록달록한 집들과 마을, 그리고 은은하게 수로와 운하를 비춰오는 아침 햇살과 도시 전체를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황혼녘의 노을빛. 자신들을 둘러싼 온갖 것들이 만들어 내는 색채와 빛의 마법을 화가들이 놓칠 리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런 베네치아의 색과 빛은 현대의 산업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독특한 색감의 디자인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광고로 유명한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베네통(Benetton)'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베네치아가 주도로 있는 '베네토' 지역이 본거지입니다.

색채 중심의 베네치아 화파와 원색의 디자인이 인상적인 세계적인 패션 브렌드 '베네통'이 베네치아를 주도로 하고 있는 베네토 지역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부라노섬 3 색채 중심의 베네치아 화파와 원색의 디자인이 인상적인 세계적인 패션 브렌드 '베네통'이 베네치아를 주도로 하고 있는 베네토 지역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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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지만 척박한 자연 환경과 어쩔 수 없이 그곳을 개척하고 살아야 했던 베네치아 인들. 비록 유명한 작가의 위대한 예술 작품은 아니지만, 오늘 이 '부라노섬'이 보여주는 눈부신 색채의 향연은 그들의 삶 속에 뿌리박힌 문화, 예술의 전통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소소하면서도 아름다운 즐거움입니다.

'부라노섬' 구석구석을 정신없이 헤매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보니 어느새 배가 고파 옵니다. 다행히 바포레토 승강장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식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새우와 오징어, 감자 튀김이 함께 나온 요리를 맛있게 먹고 다시 바포레토를 타고 베네치아의 본섬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베네치아의 대운하(누구 때문에 이 단어가 이렇게 쓰기 싫은 단어가 될지 몰랐습니다), '카날 그란데'를 통과합니다.

그림 같은 운하를 지나가는 수상 버스인 바포레토. 그 이름도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베로네세입니다. 저 하늘과 저 운하와 저 건물이 베네치아 화파의 색채의 근원입니다.
▲ 바포레토 - 베로네세 그림 같은 운하를 지나가는 수상 버스인 바포레토. 그 이름도 베네치아 화파의 거장, 베로네세입니다. 저 하늘과 저 운하와 저 건물이 베네치아 화파의 색채의 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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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베네치아 2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리알토다리, #무라노섬, #부라노섬, #베네치아,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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