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과 함께 스스로 깊어갑니다. 이제 거추장스러운 거 모두 훌훌 털고 홀로 다음 생(내년)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대지도 내년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추수가 끝나자 들녘이 텅 비었습니다. 이를 보니 하늘과 땅 사이 공간이 넓어져 여유를 되찾은 듯합니다. 가을의 끝자락,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도 의미 있을 터.
지난 9일, 경남 창원 성불사 청강스님 및 신도들과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로의 단풍 구경 겸 선문답 여행에 나섰습니다. 내소사로 가던 중, 차 안에서 갑자기 중년 여인들의 행복한 감탄 소리가 터졌습니다.
"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
"저 단풍 좀 봐. 와~, 진짜 곱네."눈이 잽싸게 말을 뒤쫓았습니다. 쌩쌩 달리는 차장 밖으로 한 무리의 단풍이 런웨이 위를 걷는 패션모델처럼, 어느 새 나타나 가벼운 걸음걸이로 혼을 빼더니, 이내 무대 뒤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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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따~, 아지매요. 어디서 전화왔능 겨?",,,"몰라도 돼." 단풍은 숨어 있던 중년 여인들의 본성을 밖으로 끄집어 냈습니다. |
ⓒ 임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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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은 중년 여인들이 충분히 감탄할 만 했습니다. 내소사에 단풍 보러 가는데, 그 단풍 보기 전 예고편에 마음 다 빼앗기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단풍의 감탄 속에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찰라,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녀 얼굴엔 천상의 어린아이 같은 환한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웃음, 어찌나 맑던지. 마치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의 세상에서 처음 짓는 순백의 웃음과 표정 같았습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 온, 그래서 굴곡의 삶을 아는 중년 여인에게서 어떻게 저리 순진무구한 표정이 나올 수 있을까. 옆자리 여인에게 속삭였습니다.
"저 해맑은 표정과 웃음 좀 보세요. 중년에게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죠?"그녀는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중년 여인이 어때서?',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는 표정으로, 별 거 아라는 듯 툭 말을 던졌습니다.
"단풍을 보려는 중년 여인의 순수한 마음이죠. 단풍이 주는 선물 아니겠어요?"아!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무릎을 탁 쳤습니다. 중년 여인들은 고된 현실에 적응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그렇게 자신의 본성을 가슴 속 깊이 그대로 간직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들은 아름다운 단풍을 접한 순간 숨겨두었던 본심을 단숨에 꺼낸 거였습니다. 그걸 몰랐습니다. 중년 여인들이 깨달음과 해탈의 경지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내소사 단풍은 경계 없는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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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 여인들은 능가산 내소사의 부처님 염화미소 같은 단풍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
ⓒ 임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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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소생한다는 '내소사(來蘇寺)'.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일주문(一柱門)'. 그 주변의 노랗고 빨간 단풍이 마치 속세와 선계를 구분하는 듯합니다. 아뿔싸. 이 경계마저 없애라 했거늘. 얕고 옅었던 단풍은 절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진해집니다. 내소사가 곧 진정 모든 것이 소행하는 별천지(別天地)입니다.
내소사로 들어가는 공중에 전나무 향 가득합니다. 스님, 전나무 향 사이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중입니다. 스님, 내리는 비를 피하려 했을까? 전나무 숲 속에 받쳐 든 우산 숲 사이로, 스님의 민머리에 가만히 올린 천이 빙그레 웃음 짓게 합니다.
스님이 곧 '불이문(不二門)'인 게지요. 어찌 너와 내가 다르고, 부처와 중생이 다르며, 생(生)과 사(死)가 다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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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 민머리 위에 천을 올렸습니다. 스님이 곧 불이문이었습니다. |
ⓒ 임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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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오매, 단풍 들것네장광에 골 붉은 감닙 날러오아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오매, 단풍 들것네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니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오매, 단풍 들것네능가산 내소사 단풍은 중년 여인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잊었던 본심을 기어이 꺼내고야 말겠다는 듯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이끕니다. 단풍에 곱게 취한 맑디맑은 중년 여인들 얼굴에 동자승이 한명 씩 내려앉은 듯합니다. 그래,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란 시가 절로 떠올랐습니다. 아무래도, 능가산 내소사 단풍은 부처님 '염화미소 단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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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에 달린 감과 잎들이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
ⓒ 임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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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무작정 빈다고 주겠습니까?"아~! 내소사 단풍에 취한 채 차에 올랐습니다. 이 단풍에 취하지 않는다면 내소사 단풍에 대한 어마어마한 무례지요. 밀양에서 온 옆자리 중년 여인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 부처님께 무엇을 빌었습니까?"빌다니요. 부처님께 무얼 한 게 있어야 빌지요. 무작정 빌면 염치없지요."
- 거 무슨 말입니까?"다들 부처님께 건강 주시고, 돈 주시고, 행복 주시라고 빌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제가 부처님께 무작정 빈다고 주겠습니까? 받을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부처님께 받을 만한 사람이 빌고 받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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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가산 내소사 부처님 전에 무엇을 빌었을까? 부부, 절집 순례하며 힘을 얻습니다. |
ⓒ 임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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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절집 순례 다니는 거 보면 부처님께 받을 만 하신 거 같은데?"사람들은 너무 욕심이 많습니다. 저는 부처님 전에 절 올린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저까지 뭘 주라고 바라다면 부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속으로 '별 소리 다 듣네'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무릎을 탁 쳤습니다. 삶이 중년 여인을 부처로 승화시킨 겁니다. 마치 큰스님으로부터 죽비로 호되게 맞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중년 여인, 그들의 이름은 단풍 속에 빛난 우리들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들은 이렇게 망상과 잡념 다 버리고 집으로 곱게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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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창원 여항산 성불사 신도들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절집순례에서 단풍 아래 섰습니다. |
ⓒ 임현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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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 SNS에도 올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