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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혼자 '한 달 네팔여행'을 다녀왔다. 10박 11일 동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올랐고, 어떤 날은 할 일 없이 골목을 서성였다. 바쁘게 다니는 여행 대신 느리게 쉬는 여행을 택했다. 쉼을 얻고 돌아온 여행이었지만, 그 끝은 슬펐다. 한국에 돌아오고 2주 뒤 네팔은 지진의 슬픔에 잠겼다. 그래도 네팔이 살면서 한 번쯤 가봐야 할 곳임에는 변함이 없다. 30일간의 이야기를 전한다. - 기자 말

울레리 숙소의 아침. 땔감을 이용해 차를 준비하는 모습.
 울레리 숙소의 아침. 땔감을 이용해 차를 준비하는 모습.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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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인연이었다. 어제 로지에 도착해 짐을 풀고 있는데 익숙한 말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아이구 한국분들이세요? 하하하하하하."

코끝이 까맣게 그을리다 못해 껍질이 벗겨지고 있는 50대 후반의 아저씨가 서글서글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검게 탄 얼굴과 그 얼굴을 덮은 수염이 산에서 보낸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저녁들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같이 먹자고."

2천 미터 산 속에서 만난 한국인이 반가웠는지 아저씨는 자신의 가이드에게 한국에서 챙겨온 라면을 끓여오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 만났는데 같이 먹어야지."
"근데 여기서도 음식을 팔아서... 얘기는 해볼게요..."
"우리 라면 끓이는 대신, 맥주 팔아주면 되잖아. 밥 먹으나 술 먹으나 그 가격이 그 가격이잖아. 가게에서 맥주 가져와. 내 이름 밑에 달고. 여기 자네 단골이니까 그렇게 해도 되지?"

한국인 만큼이나 한국말을 잘하는 가이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말해보겠다며 일어서서 식당 밖으로 나갔다.

라면 얘기에 침은 꼴깍 넘어가는데 상황이 영 불편하다. 말 그대로 좌불안석. 포터와 가이드는 자신이 데려온 트레커들이 로지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대가로 숙식비를 할인 받는다. 숙박비가 매우 싼 로지는 사실상 식사 제공을 통해 이윤을 남긴다. 그런데 우리가 말 그대로 '밥값'을 못하게 된 것이다. 당장 한 끼 때문에 아저씨가 불이익을 받진 않았겠지만, 단골 로지에서 면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면 반 개 정도가 담긴 스테인리스 그릇들이 우리 앞으로 배달됐다. 맥주도 콸콸콸 거품을 내며 유리잔에 담겼다. 따뜻한 라면에 맥주까지... 산행 후 이보다 구미 당기는 메뉴도 없지만, 지금은 불편하고 미안한 마음 뿐이다.

"자자 어서들 먹자구." 못이기는 척 포크로 라면을 찍어 넘기는데, 면발인지 고무줄인지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한다. 식당 뒤쪽에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우리 포터 아저씨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저씨 밥 먹었어요?"

아직 식사 전이라는 아저씨에게 "배고프지 않냐"고 물었지만, "괜찮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호의가 불편함을 만든 이상한 상황. 우리 셋은 괜히 식당을 서성이다 피자를 주문했다. 배는 더이상 고프지 않았지만, 왠지 그가 늦은 시간까지 저녁을 먹지 못한 게 우리 탓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이윽고 피자 두 판이 테이블 위로 배달됐고, 포터 아저씨에게 함께 먹자고 권했지만,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가슴 저 아래가 얹힌 듯 답답했다(아저씨는 이후 다른 포터, 가이드와 함께 늦은 저녁을 먹었다).

'하이, 헬로, 나마스테' 처음 본 사람들과 주고 받는 인사

울레리(2120) 숙소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남봉(7219)과 히운출리(6441)
 울레리(2120) 숙소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남봉(7219)과 히운출리(6441)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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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동안 벗어놓은 배낭들. 걷는 틈틈이 젖은 옷들을 가방에 널어 말렸다.
 쉬는 동안 벗어놓은 배낭들. 걷는 틈틈이 젖은 옷들을 가방에 널어 말렸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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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처럼 꼬인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해가 뜨기 전인 오전 6시, 안나푸르나 남봉(7219m)과 히운출리(6441m)는 막 세수를 마친 듯 말간 얼굴을 내밀었다. 설산 정상 부근에선 뿌연 눈보라가 휘날렸다. 우린 어제의 '부진'을 만회하고자 누구보다 열심히 아침을 먹고, 레몬차까지 한 잔 마신 뒤 꼴찌로 로지를 나섰다.

트레커들에겐 '678 법칙'이란 게 있다.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이라는 뜻이다. 하루 6시간 안팎을 걷기에 이 일정에 따라 이동한다면 오후 3~4시 정도면 그날 묵을 로지에 도착하게 된다. 날이 저물기 전에 로지에 도착해 방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포터 아저씨가 천천히 가도 4~5시간이면 충분하니 오전 9시 정도에 출발하자고 한 터였다. 어제 저녁 비가 내려 걱정했는데 지금은 다행히 구름만 조금이다. 로지를 나서자마자 또다시 보이는 계단길. 그래도 어제와 달리 계단과 평지가 번갈아 나와 걸을 만하다.

"나마스테."
"하이."
"헬로."
"굿모닝."

하루 종일 트레킹을 하며 '하이, 헬로, 나마스테'를 주고 받았다. 국적도 모르고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과 한 길을 오고 간다는 이유만으로 격려의 눈빛을 나누는 느낌은 새롭고 따뜻했다.

나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돌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가다가도 맞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면 마음 속으로 기다렸다가 반갑게 인사했다. 나마스테,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길 위에서 진심으로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

포터들이 지는 짐의 무게는 어마어마하다. 짐들을 묶은 끈을 머리에 걸친 채로 산을 오른다.
 포터들이 지는 짐의 무게는 어마어마하다. 짐들을 묶은 끈을 머리에 걸친 채로 산을 오른다.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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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커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포터들의 도움 덕분이다.
 트레커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포터들의 도움 덕분이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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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커들간의 약속은 이것말고도 두 개가 더 있다. 하나는 좁고 험한 계단길에서는 올라오는 사람을 먼저 배려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거운 짐을 진 포터들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면 한쪽에 서서 잠시 길을 비켜주는 것이다.

실로 포터들이 지는 짐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본인 몸의 2~3배는 될 커다란 카고백들을 등에 지고, 짐들을 동여맨 끈을 이마에 묶은 채 산에 올랐다. 제대로 된 등산화도 없이 운동화 혹은 슬리퍼 차림으로 그 험한 길을 오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떻게 저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왜 트레커들이 포터들을 더 고용하지 않고 저렇게 혹사시키는지 의문이었다.

우리 포터 아저씨가 진 짐은 15㎏ 이내. 산길에 이것도 적지 않은 무게였다. 네팔 정부는 포터가 질 수 있는 짐의 무게를 20㎏로 제한했다지만, 그 이상, 무게를 가늠하기도 어려워 보이는 짐들을 진 포터들이 많았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짐을 진 포터들은 앞서 가던 트레커들과 가까워지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면 트레커들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올라가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게 길을 내주었다.

네팔 히말라야 트레커들의 약속 세 가지

둘째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그리 힘들지 않은 코스이다. 포터 아저씨와 보경이가 걸어가는 길 양쪽으로 네팔 국화인 랄리구라스가 흐드러지게 펴있다. 울레리에서 고레파니 가는 길.
 둘째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그리 힘들지 않은 코스이다. 포터 아저씨와 보경이가 걸어가는 길 양쪽으로 네팔 국화인 랄리구라스가 흐드러지게 펴있다. 울레리에서 고레파니 가는 길.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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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랄리구라스 앞에서 포터 아저씨와 한 장.
 흐드러지게 핀 랄리구라스 앞에서 포터 아저씨와 한 장.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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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달라지면서 식물의 섭생에도 차이가 났다. 어제까지는 한라산 높이와 비슷해 나무들의 모양도 그곳과 비슷해 보였는데, 오늘은 그보다 습한 지대로, 이끼도 많고 나무들의 생김새도 다르다.

"저 커플은 독일인이에요, 그 뒤엔 아마 스위스 사람일 거예요."

산길을 오르던 포터 아저씨가 열 걸음 정도 앞에서 내려오고 있는 트레커들을 보고 속삭였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요?"
"포터를 오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요. 얼굴 생김새도 조금씩 다르고, 말투가 들리면 그걸로도 짐작하는 거죠. 거의 대부분 맞아요."

실제로 아저씨가 '독일 사람일 거'라고 한 트레커들은 다가왔을 때 얘기를 나눠보니 독일인이 맞았다. 우리가 짐작도 못할 말들을 쓰는 백인 트레커들에게 아저씨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인사를 건네자 대답이 돌아왔다. 이 정도면 네팔판 '생활의 달인'이다.

식재료를 잔뜩 이고 돌길을 걸어가는 미울(말과 당나귀 교배종)들.
 식재료를 잔뜩 이고 돌길을 걸어가는 미울(말과 당나귀 교배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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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울들은 로지에서 사용하는 가스통 등 무거운 짐을 사람 대신 운반해준다.
 미울들은 로지에서 사용하는 가스통 등 무거운 짐을 사람 대신 운반해준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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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울~ 미울~."

트레커 국적 맞히기를 하던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쳤다.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에서 목에 방울을 단 망아지처럼 보이는 녀석들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산길을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말과 당나귀 교배종을 네팔에서는 미울이라고 부르는데, 등에는 로지에서 쓸 각종 식재료와 가스통이 잔뜩 실려있다. 트레커들을 돕는 또다른 존재들이다.

'나마스테, 고레파니·푼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미울을 지나 걷고 또 걸어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문 앞에 섰다. 드디어 고레파니(2853m)에 도착했다. 이제 정말 시작인데, 우린 마치 트레킹을 끝낸 사람들처럼 환호하며 사진을 찍었다. 하늘은 어느덧 흐려져 약한 빗방울을 흩뿌리고 있었다. 바닥엔 땡땡이 무늬의 빗자국들이 늘어갔다.

히말라야 트레킹다운 풍경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안나푸르나 5대 뷰포인트(푼힐, 타다파니, 간드룩, 촘롱, 담푸스) 중 하나로 아름다운 설산을 감상할 수 있는 푼힐 전망대(3200m)가 고레파니 가까이 있다.

내일이면 며칠 동안 기대했던 입이 떡 벌어질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를 맞으며 마침내 도착한 고레파니. 우리는 꼭 트레킹을 마친 사람들처럼 환호했다. 흩뿌리듯 내리던 비는 곧 우박으로 바뀌었다.
 비를 맞으며 마침내 도착한 고레파니. 우리는 꼭 트레킹을 마친 사람들처럼 환호했다. 흩뿌리듯 내리던 비는 곧 우박으로 바뀌었다.
ⓒ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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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 정보>

- 물통은 필수 : 일정 고도 이상 올라가면 로지나 식당에서 환경 보호를 위해 플라스틱병에 든 생수를 팔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신 필터에 정화시킨 물을 판매하니 개인 물통은 필수. '날진(nalgene) 물통'처럼 뜨거운 물도 담을 수 있는 걸로 준비해가면 잠잘 때 핫팩 대용으로 쓸 수도 있다.

- 포터의 역할은 어디까지? : 포터는 말 그대로 짐을 대신 져주는 사람이다. 트레커와 속도를 맞출 의무도, 식당에서 주문을 대신 해줄 의무도 그들에겐 없다. 만약 그런 도움을 받고 있다면 호의에 대해 감사함을 표시하자. 간혹 포터를 하인처럼 부리는 트레커들도 있는데, 예의 없는 행동이다.

- 미울을 만났을 땐 : 좁은 길에서 미울을 만났을 땐 길 안쪽으로 대피한다. 바깥쪽에 서 있다가 미울 발에 채이기라도 하면 길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네팔 여행, #네팔 트레킹, #트레킹, #한 번쯤은, 네팔, #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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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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