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저자 이충렬과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의 한반도 삼국지 - 세 개의 혁명과 세 개의 유훈 통치' 표지.
 이충렬씨가 펴낸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의 한반도 삼국지>의 부제는 '세 개의 혁명과 세 개의 유훈 통치'다.
ⓒ 유성호 / 레디앙

관련사진보기


이충렬(58)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야당정치권 등에 몸담았다. 스스로 "남한테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조직부장, 민주개혁정치모임 사무차장, 노사정위원회 책임전문위원, 노무현 대선후보의 정책특보를 지냈으니 '내세울 경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는 당선자 특사로 백악관을 방문해 주목받았다.

이씨는 야당정치권에 몸담고 있었지만 공천권을 쥔 권력자들에게 접근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웃사이더'였다. 그리고 지난 2012년 대선이 야당의 패배로 끝나자 강화도로 귀촌했다. "당대에 내 역할은 없다"라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선택이었다.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으니 '진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지난해 야당의 약한 고리인 '정당 국고보조금 문제'를 과감하게 제기한 것이나 최근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의 한반도 삼국지>(이하 <한반도 삼국지>, 레디앙)를 펴낸 것은 그런 용기의 결과물이었다.

<한반도 삼국지>에는 '세 개의 혁명과 세 개의 유훈통치'라는 인상적인 부제가 달려 있다. 이씨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40여년간의 현대사를 통해 '한반도 정치'의 실체에 접근했다. 한반도를 움직이는 세 개의 힘은 박정희(근대화 혁명), 김대중(민주주의 혁명), 김일성(공산주의 혁명)이고, 이들은 '유훈통치'를 통해 여전히 한반도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 분단시대'가 아니라 '삼국시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 개의 혁명' 가운데 가장 성공한 혁명은 역시 근대화 혁명이다. 이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진 박정희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세력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배경이다. 여기에는 1980년과 1987년(대선), 1990년(3당 합당)에 일어난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분열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양김이 이끌었던 민주주의 혁명의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박정희 세력의 패권세력화, 민주세력의 분열과 탐욕으로 잊혀진 것은 '자유, 평등, 평화'라는 6월항쟁의 가치와 정신이다. 그는 '세 개의 유훈통치'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이 6월항쟁의 가치와 정신을 부흥시킬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주도권에 도전하고 있는 미국의 샌더스나 영국의 코빈, 캐나다의 트뤼도 같은 지도자가 야권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정신'이나 '노무현 정신'만을 외치는 야권에서 그런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씨는 지난 12일 여의도에서 만나 "3당 합당과 DJP 연합을 통해 박정희 세력이 청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정받게 됐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김영삼 정권을 '문민권력', 김대중 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권력들의 본질을 오해시킨다"라며 "김영삼 권력은 '3당 합당 권력'이고, 김대중 권력은 'DJP 연합 권력'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씨는 "이번 책을 통해 우리가 살던 시대를 객관화하고, 미움과 증오보다는 긍정적으로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민주세력이야말로 남북한의 군국주의 사상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씨와 2시간 동안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남북분단시대가 아니라 삼국지시대"

- 이 책은 40년간의 '한국현대사'라고 해야 하나, '한국정치사'라고 해야 하나?
"당대사라고 이름붙어야 한다고 본다. 상고사도 있고,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도 있다. 이 책은 해방 이후사를 서술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얘기한 '역사전쟁'이라는 것도 해방 이후사가 핵심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사는 아직 역사학의 공인된 역사로 끝난 게 아니고 현재의 일부다. 해방 이후사는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 다루지 역사학에서는 잘 안다룬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당대사로 봐야 한다. 한 시대가 마무리되지 않아 쓰기가 어렵다. 지금도 사회 제세력들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책을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내가 굉장히 마음 속으로는 진보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평생 보수 야당에서 생활했다. 보수야당의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김부겸, 행장부 장관을 지내고 총선에 출마하는 정종섭, 지금은 쉬고 있지만 차세대에서 중요한 사람인 김성식, 원내대표를 지낸 야당 중진의원 전병헌, 이명박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임태희 등이 다 내 친구들이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기억한다. 그런데 이충렬? 남한테 내세울 만한 경력이 하나도 없다.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 등 야권세력이 완패하고, 나이도 60세 가까이 되면서 당대에는 내 역할이 없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체념하게 됐다. 당대에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것들 운명으로 받아들이니 국회의원 등으로 출세할 생각도 없어졌다. 그렇게 맘을 비우니까 작년에 정당 국고보조금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관련기사 : "정당 국고보조금은 당권파의 쌈짓돈"). <오마이뉴스>에서 나를 인터뷰해서 내 뜻이 많이 알려졌고, 야당에서는 약간의 제도개선도 있었다.

연초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치권에서 자리를 못잡은 것이 내가 무능해서냐? 내 성격에 결함이 있어서냐, 처세술을 잘 못해서 그러냐? 내 잘못이냐, 시대를 잘못 타고난 거냐를 고민했다. 주변에서는 내가 성격적으로 심각하게 문제가 있거나 운이 없다고 생각한다. 2002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당선자 특사로 백악관에 방문했는데, 주간 <오마이뉴스> 창간호에서 이것을 터뜨렸다. 제목도 '미국은 한국 대선에서 손 떼라'였다. <조선일보> 등이 나를 노무현의 반미성향을 잘 나타내는 사람으로 찍으면서 나는 날아갔다. 그때 내가 45세였는데 정치적으로 도약할 시기에 정치적으로 몰락해 버렸다.

내가 출세하지 못한 것은 운이 나빠서거나 성격적으로 적응을 못해서라기보다 내 마음 속에 생각하는 가치가 있었는데 그것이 당대에 실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내가 마음 속에 생각하는 가치가 뭘까? 60세가 다 되니까 우리가 살았던 시대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보수정당에 몸담는다는 것은 국회의원을 목표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영삼, 김대중 등 공천권을 쥔 권력자들에게 필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

내가 80년대부터 정치권을 왔다갔다 했는데 단 한번도 공천권을 쥔 권력자들에게 찾아간 적이 없었다. 보수정당에 몸담고 있으면서 왜 권력자들 안찾아가?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뭔가 생각하는 게 있었을테니까. 그래서 1월 초부터 페북과 카톡, 밴드 등에 연재를 시작했다. 원래 제목은 '한반도 삼국지연의'였다. 정치평론가 등 전문가를 위한 서적이 아니고,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 전부가 당대사를 같이 한번 이해해보자는 시각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약간 자유롭게 쓰고 싶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는 세 개의 힘이 있다. 김일성, 박정희, 김대중으로 각각 이어지는 흐름이 그것이다. 이 세력들이 한반도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다. 후대 역사가들은 우리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살았던 시대를 어떤 역사시기라고 규정할까? 나는 백낙청의 말대로 '분단시대'라고 받아들였고 이제껏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되돌아보니 '삼국시대'였다. 남북분단시대가 아니라 삼국시대라고 느꼈다. 이 세 세력의 움직임 속에서 내가 살았던 시대를 설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상대를 악마화하면 한반도 정치 못봐"

- 어떤 점에서 '한반도 삼국지'인가?
"한반도는 하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남북한이 따로 놀고 있다. 민주화운동을 서술할 때도 남한만 서술한다. 그래서 독재세력과 민주세력의 대립구도로 설명했다. 남북관계는 외교와 통일의 영역일 뿐이다. 이렇게 남북관계는 외교, 통일의 영역이어서 그것이 남한의 정치발전이나 남북한의 상호쟁투과는 분리돼 따로 놀게 됐다. 그렇게 통합돼 있지 않고,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상대방을 악마화해서 한반도 전체 역학관계, 한반도 정치를 못본다.

박정희, 김대중·김영삼, 김일성 중에서 김일성 그룹은 그 이전 조선공산주의 운동사와는 별개의 세력이다. 김일성 그룹이 독립운동 했지만 '김일성의 독립운동'만 있다. '박헌영의 독립운동'은 없다. 그러니까 김일성은 고구려의 주몽처럼 북한체제의 시조다.

김영삼·김대중 등 민주화세력은 임시정부와 김구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는 정치적 유전관계가 없다. 김대중의 대부는 장면이었고, 김영삼의 대부는 장택상이었다. 이들은 김구하고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이들이 장구한 기간 동안 민주화운동하면서 김구와 연결돼 있다고 주장해왔을 뿐이다. 김구는 단정(단독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아서 대한민국에 '김구세력'은 없다.

박정희 세력은 족보상으로 보면 친일파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이승만, 박정희를 하나의 세력으로 생각할 수 있고, 같은 흐름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다르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양자도 아니고 정치적 후계자나 계승자도 아니다. 박정희는 독자적으로 권력을 쟁취했고, 현재 존재하는 보수세력의 아버지다.

그런데 여기서 김영삼이라는 사람이 묘한 사람이다. 김영삼의 역할은 삼국지의 주유와 같다. 주유는 적벽대전에서 최대의 승리를 가져온 주역이다. 하지만 주유가 삼국시대의 주인공은 아니다. 김영삼이 그렇다. 민주화세력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김영삼이 패배해 박정희 세력에 투항하지만('1990년 3당합당'), 김영삼을 빼고는 민주화운동을 설명할 수 없다.

한국 당대사 세 개 세력의 시조가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이다. 박정희가 천왕봉이라면 이승만은 조그만한 봉우리에 불과하다. 김대중의 경우에도 신익희 등이 있었지만 그도 조그마한 봉우리다. 김일성은 이후 김정일, 김정은으로 가고 있다. 박정희도 이후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로 가고 있고, 김대중도 이후 노무현으로 갔다. 이것이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유전되는 흐름이다. 당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력들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 그런데 이런 삼국지는 결국 영웅 중심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책은 지도자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그 밑바닥에서 일어난 민중들의 움직임이나 역할은 그 의미를 굉장히 중요하게 부여했다. 그래서 '지도자의 통찰력과 민중의 열망이 결합되면 거대한 혁명의 소요돌이가 일어난다'고 표현했다. 박정희, 김대중, 김일성 이 세 사람은 이승만, 김구, 박헌영과는 좀 다르게 민중과 결합해 거대한 혁명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사람들이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어젠다를 북한 민중과 함께 이루어냈고, 그 결과 수령으로 군림했다. 박정희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중의 열망을 채워주었다. 김대중은 유학도 가지 않고 선진문물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가혹한 탄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신념화해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민중들과 함께 민주주의혁명을 성공시켰다. 이 세 사람을 영웅적으로 본 것은 아니고, 세 개 혁명의 소용돌이의 중심이자 표상이라는 것이다."

"박정희=친일파는 사소한 일"

 가을 일본육사 본과 시절 가나가와현 소재 상무대(일본육사의 이름)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한 박정희(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범학교를 하위권으로 졸업했던 박정희는 44년 4월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했다. 박정희의 일본육사 동기생인 다니지와 지오 제공.
 가을 일본육사 본과 시절 가나가와현 소재 상무대(일본육사의 이름)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한 박정희(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범학교를 하위권으로 졸업했던 박정희는 44년 4월 일본육사를 3등으로 졸업했다. 박정희의 일본육사 동기생인 다니지와 지오 제공.
ⓒ 박정희대통령인터넷기념관

관련사진보기



- '세 개의 혁명과 세 개의 유훈통치'라는 책의 부제가 의미심장하고 흥미롭다. 먼저 세 개의 혁명은 무엇인가?

"시간 순으로 보자. 김일성이 주도한 혁명은 두 단계를 거쳤다. 사회주의 혁명 초기에는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고, 1960년대 후반에는 주체사상으로 이행했다. 더 이상 맑스-레닌주의가 아니라 주체사상 왕조로 이행한 것이다. 이것이 김일성의 공산주의혁명의 실체다.

박정희의 근대화 혁명은 굉장히 중요한 논점을 가지고 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보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박정희를 '다가키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창씨개명)으로 많이 부른다. 그런데 김일성은 원래 일본의 영향력 밖에 있어서 일본 이름이 없고, 김대중·김영삼은 창씨개명해서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대 초반 만주군관학교에 간 것을 두고 친일파라고 볼 수도 없다. 박정희는 어릴 적부터 굉장히 군인이 되고 싶었다. 당시 그가 되고 싶은 군인은 독립군인이 아니라 일본군인이었다. 그래서 만주군관학교에 갔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만주군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는 바람에 일본 육사에 편입한 것이다. 일본 육사 편입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 육사도 3등으로 졸업했다. 그래서 박정희가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 친일파냐 하는 것은 다 엉터리다. 박정희는 제대로 교육받은 최고의 사무라이였다. 이것이 박정희의 정체성이다. 조선 후기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은 주자학자이지 그를 두고 조선사람이냐, 중국사람이냐 분류하는 것은 의미없다.

세계관의 뿌리가 어디냐가 중요하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사무라이가 박정희 세계관의 뿌리다.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일본 군인정신이 박정희의 정체성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다니면서 인생 최대의 재산을 얻게 됐다. 첫번째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라는 인맥 확보다. 이 인맥은 대한민국 최상층부를 형성했다. 박정희가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이 인맥 덕분에 살아났다. 두 번째는 일본의 문물을 제대로 배운 것이다. 최강대국과 전쟁(태평양전쟁)을 벌였던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그 한복판에서 배웠다. 한마디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사무라이 정신을 배운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사무라이는 군국주의다.

박정희는 해방 이후 잠깐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의 일념은 오직 '한국판 메이지유신'을 하겠다는 것뿐이었다. 이것을 무서운 일념으로 밀어부쳤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그 당시에만 해도 서구사회 밖에서 근대화를 성공시킨 유일한 모델은 메이지 유신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적인 것인데, 그 메이지유신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훈련받은 사람이 박정희였다. 그래서 1961년에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군부의 힘으로 한국판 메이지 유신을 추진한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이름도 비슷한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재벌 탄생 과정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재벌이 탄생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1970년대에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도덕성없는 베트남 전쟁 참여 등이 최고의 쟁점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만 해도 경제적으로는 북한의 3분의 1 정도로 밀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경공업 수입대체가 아니라 석유화학, 제철, 조선, 고속도로 등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모두 미국와 일본의 방해를 뚫고 한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미국은 한국이 석유화학공업을 하려고 할 때 '경공업 수입대체만 해라'고 굉장히 방해했다. 그것을 뚫고 개척한 것이다. 조선, 제철 등은 예산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공식을 올린 것은 유명한 얘기다.

결국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적인 방법, 즉 군국주의적 개발독재로 한국을 공업화시켰다. 그 과정은 일본과 똑같다. 그런데 북한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했는데 15년 만에 북한의 김일성을 이기게 됐다. 이것이 박정희 근대화 혁명, 박정희 신화의 근거다. 진보진영은 1960-70년대에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박정희보다 더 좋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무책임한 얘기다.

김대중·김영삼 얘기로 넘어가자.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반대하는 세력은 있었지만, 민주주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묘하게도 1954년과 1955년에 각각 김대중과 김영삼이 정치권에 진출한다. 두 사람은 김일성이나 박정희와 다른 부류다. 김일성은 어릴 때부터 만주벌판을 누비고 맑스-레닌주의를 배웠다. 당시 세계화의 최첨단(맑스-레닌주의)을 접한 것이다. 박정희는 1940년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치면서 당시 최고의 사조를 흡수했다. 하지만 김대중·김영삼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확실한 신념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첫 번째 정체성이다.

두 번째 정체성은 그들이 반드시 최고 권력자가 되겠다는 강력한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야권은 지금보다 더 지리멸렬해졌다. 그런 야권에서 1969년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으로 반독재투쟁의 선봉에 섰고, 이에 김대중·이철승이 동참했다. '40대가 한번 뒤집자.' 40대 기수론으로 (합법적인) 쿠데타를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민주주의세력의 기원이다.

삼국지에서는 유비팀에 제갈공명이 합류하고 적벽대전을 치르고, 관우가 죽는 것까지가 하이라이트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이런 클라이막스는 1969년 40대 기수론부터 2002년 김대중 퇴임 때까지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은 6월항쟁이다. 6월항쟁까지 가는 과정에서 양김동주(兩金同舟)가 거듭된다. 4번에 걸쳐 합작과 분열이 거듭되면서 6월항쟁까지 오게 된다. 1987년 6월항쟁 이후부터 2002년까지 15년 동안은 양김의 대결사다."

"한반도 패권세력은 박정희 세력"

- 근대화 혁명, 민주주의 혁명, 공산주의 혁명 가운데 가장 성공한 혁명은 무엇인가?
"현재 한반도에서 패권을 발휘하고 있는 세력은 박정희 세력이다. 한마디로 한반도의 패권세력이 박정희 세력이라는 얘기다. 박정희 세력이 한반도의 패권세력이 된 근본 이유는 양김 등 민주세력의 취약점이다. 민주세력은 두 번에 걸쳐 박정희 세력을 이길 수 있었다. 1980년 10·26 이후와 1987년 대선이다. 1980년을 서울의 봄이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역사의 왜곡이다. 1980년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두환의 난이었다. '서울의 봄'은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는 박정희 세력을 반석 위에 올려놨다.

1980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세력이 해방 직후와 같은 혼란기에 빠졌다. 그때 양김이 분열했다. 양김의 분열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1980년 10.26부터 다음해(1981년) 8월 30일 전두환이 취임하기 전까지 과도기에 움직인 전두환과 그의 그룹도 중요하다. 양김의 분열은 스스로 분열한 것이기도 하지만 전두환의 계획에 놀아난 꼴이기도 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책에서 강원룡 목사의 회고록을 길게 인용했다.

그때 양김이 손잡았더라도 전두환을 못이길 가능성이 높았긴 하지만, 전두환 그룹의 계획에 전혀 위기의식이 없이 '상대방만 이기면 된다며 양김이 분열했다. 양김은 그것에 책임이 있다. 군부는 '양김을 이간질하는 것, 이들을 경쟁관계로 이용하면 안되는 게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다만 1985년 2.12 총선에서는 양김이 연합해 전두환의 영구집권구도를 깼다. 군부가 양김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남한에 '양김'보다 폭이 넓어진 민주주의 동맹이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동교동이라는 파벌의 대표가 아니라 호남 민중의 대표자로, 김영삼은 가야지역, 즉 부산·경남의 정치적 맹주로 떠올랐다.

1987년 6월 항쟁을 '독재 타도, 호헌 철폐'라는 단순한 이벤트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에 수천년 내려온 왕정체제를 무너뜨린 대사건이다. 6월항쟁은 프랑스 대혁명이나 영국 대혁명 등과 똑같다. 민중에게 독재타도는 정치적 자유의 보장이다. 수십년간 억압되다가 자유를 얻으니까 평등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것이 노동자 대투쟁이었다. 거기에다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해 평화를 바랐다. 그래서 6월항쟁의 정신(가치)는 자유, 평등, 평화다.

그런데 이 정신이 6.29 선언 이후 사라졌다. 정치적 상층부였던 양김은 당장 차기 대권구도로 넘어갔다. 자유, 평등, 평화에는 관심없고, 연말 대선에서 이기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양김이 분열했고, 대선에서 패배했다. 1987년 대선 패배는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패한 것과 같다. 역사의 변곡점이 된 것이다. 이쪽이 이기느냐, 저쪽이 이기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민주세력이 이겼으면 올림픽도 직접 치렀을 것이고, 힘의 우위를 통해 남북한 평화통일도 진전시켰을 것이다. 친일세력, 박정희 세력, 기득권 세력을 해체하거나 역관계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함으로써 박정희 세력은 민주공화정 아래에서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에 반해 민주진영의 독자적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양김은 박정희 세력과 손잡거나('3당 합당'), 박정희 세력에서 떨어져 나온 비주류와 연합해('DJP연합') 한번씩 정권을 잡게 됐다. 박정희 세력과 전면적으로 합작하면서 (정치적) 유전자 변형이 일어났다. 김무성도 민추협(민주화운동추진협의회)에서 민주화운동하면서 DNA가 얽기고 설켰다.

3당 합당과 DJP연합을 통해 박정희 세력이 청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정받게 됐다. 김영삼 정권을 '문민권력', 김대중 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권력들의 본질을 오해시킨다. 김영삼 권력은 '3당 합당 권력'이고, 김대중 권력은 'DJP연합 권력'이었다. 이렇게 불러야 역관계가 다 드러난다. 앞으로 시간이 남아 있어 반전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는 박정희 세력이 한반도에서 패권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6월항쟁은 조선 역사 1천년 동안 제1대사건"

- 박정희 세력이 한반도에서 패권적 지위를 점하게 된 역사적 계기는 양김 분열이라고 보나?
"양김 분열과 민주세력의 지역적 고립 때문이다. 민주세력이 호남이지 않나. 김영삼은 이미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세력에서 떨어져 나갔고. 박정희 세력을 청산할 기회가 왔지만 양김이 분열함으로써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 수십년간 정치적, 물적 토대를 쌓아오면서 박정희 세력이 강해진 측면도 있지 않나?
"전두환의 집권을 저지하고, 노태우의 당선을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민주세력이 무능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역사의 변곡점이 되는 중요한 싸움에서 모두 졌지 않나? 결국 박정희 세력이 이겼다. 역사적 변곡점에서 박정희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자기 체제를 온전히 지키고 패권세력이 될 수 있었다. 

다만 1987년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민주당 출신(김영삼)이 3당 합당을 통해 권력을 잡고 군부를 해체시키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 그 다음에 김대중이 민주세력과 군벌세력 일부의 연합을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 변화는 6월항쟁의 민중적 에너지가 가능했다고 본다. 동학혁명의 전봉준이 참수당하고, 안중근이 사형당하고, 김구가 암살당한 나라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차례로 대통령이 된 것은 6월항쟁이 성공한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5000년 역사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희한하긴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대통령까지 된 것은 대사변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재 신채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6월항쟁은 '조선 역사상 1천년 내 제1대 사건'이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