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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물질을 좌우하는 본인의 기량이라면, 물때와 바람은 외부의 조건이다. 아무리 숨이 길고 물질 실력이 뛰어난 대상군이라 할지라도 물때와 바람을 거역해서는 안된다. ⓒ 강길순
책을 받아든 순간, 멈칫했다. 제목이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이었다. 사연 많은 제주해녀 이야기를 '숨'이란 단어 하나에 압축해놓았다.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제주해녀들의 공통분모 정점에 왜 '숨'을 놓아두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여러가지 '숨'을 느꼈다. 그건 삶의 숨결이기도 하고, 목숨이기도 했다. 그 바탕에는 이 책의 저자인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의 숨소리도 깔려 있다.

# 해녀들, 물 속에선 가슴으로 숨을 쉰다

"숨을 쉬어야 사람은 산다. 그러나 숨을 쉬면 안 되는 직업군이 있다. 다름 아닌 해녀들이다. 스킨스쿠버들과는 달리 공기통이나 호흡기 등 기계의 도움없이 오로지 자기 호흡만으로 물질하는 해녀들에게 '숨'은 곧 목숨이다. 행여 깊은 바닷속에서 숨을 참지 못하고 '물숨'을 쉬면 자칫 죽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물숨'은 해녀들에게는 금기어나 다름없다." (p160)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펴낸 책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 북하우스
바닷속에서의 '숨'은 해녀들에겐 생명줄이다. 또한 숨 길이는 어획물의 차이로 이어지는 해녀들의 기량이다. 수심 10m가 넘는 깊은 바닷속은 숨 길이가 긴 상군과 대상군의 몫이다. 숨 길이가 짧은 하군과 중군은 상대적으로 얕은 바다를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 철저히 기량에 따른 영역 구분이다. 서로의 영역을 탐하지 않는 게 해녀들의 '불문율'이자 생존 방식이다.

깊은 바닷속까지 내려가려면 압력을 견뎌야 한다.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압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이 없다. 체험하진 못했지만, 그 압력의 세기를 눈으로나마 확인한 적이 있다. 2년 전, 제주 아쿠아플라넷에서 70대 해녀 할망들이 수심 10m가 넘는 대형 수조 안에서 잠수하는 모습을 봤다. 해녀들과 함께 내려진 농구공이 수조 바닥에 가까워지자 바람빠진 공처럼 완전히 찌그러졌다. 그런 압력을 오롯이 몸으로 견뎌내는 것이다.

(입으로 쉬는) 물숨은 죽음을 뜻하지만, 해녀들은 바닷속에서 다른 숨을 쉰단다. 가파도에 사는 70대 해녀 할망의 말이다. "물에 들어갈 때 쉬는 숨이 있고, 물건을 잡을 때 쉬는 숨이 있고, 나올 때 쉬는 숨이 있어요. 한 번 물에 들어가면 15~16번 정도는 숨을 쉽니다. 입으로 내쉬면 물을 먹게 되니까 가슴으로만 쉬지요. 물밖으로 나와서 진짜 입으로 내쉬는 거지." 물밖으로 나와 비로소 숨을 쉬며 내는 소리를 '숨비 소리'라고 한다. "호오이, 호오이~."
테왁은 제주 해녀들의 가장 소중한 벗이자 구명선이요,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이요, 먼바당까지 데려다주는 길동무다. ⓒ 강길순
# 해녀들의 갑옷과 무기 - 고무옷, 테왁, 빗창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제주해녀들은 무명옷인 '소중이'를 입고 물질을 했다. 이제 그 모습은 해녀박물관에 자료 사진으로 남아있다. 지금 제주해녀들의 전투복은 검정과 오렌지색의 고무옷이다. 스킨스쿠버처럼 고무옷을 입게 되자, 겨울철에도 물속에서의 작업 시간이 서너 배로 늘었다. 바람과 추위를 막아주고 작업 시간을 늘려주었지만, 고무옷을 입고난 뒤 해녀들은 말 못할 고충을 겪고 있다. '볼일'을 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물 속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무옷을 입었다 벗었다 할 수도 없으니까 하는 수 없이 그냥 볼일을 본다. 그것 때문에 웬만하면 많이 먹지를 않지만, 물질하려면 안 먹을 수도 없으니, 작업하는 동안 적어도 두세 번은 그런다. 어떤 날에는 집에 돌아오면 고무옷 안에서 풍기가 안 돼서 오줌독으로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을 때도 있다." (p182)

고무옷이 해녀들의 갑옷이라면, 테왁과 빗창은 무기다. '물에 뜬 바가지'라는 뜻의 제주어인 '테왁'은 물 위의 부표다. 테왁은 해녀들의 구명선이자, 표지판이요, 길동무다. 테왁에는 채취한 해산물을 담아두는 그물 주머니 '망사리'가 매달려 있다. 물 위로 떠오른 해녀들은 바닷속에서 건진 해산물을 망사리에 넣고, 테왁에 의지해 숨비 소리를 낸다. 슬픈 이야기지만, 바닷속에서 떠오르지 못한 해녀들의 테왁은 주인의 실종 위치를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해녀들의 또다른 무기 '빗창'은 쇠를 벼려서 만든 꼬챙이다. 바닷속에서 가장 값나가는 전복의 앙다문 입을 벌리는데 유용하게 사용된다. 해녀들의 든든한 지원군인 빗창이 때로는 비창으로 돌아올 때가 있다. 제대로 된 순간에 찌르지 못하면, 전복이 빗창을 꽉 물고 놔주지를 않는다. 그런데 전복과 빗창이 아까워 애를 쓰다가 물숨이 다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단다. 전복 바위 옆에서 숨을 거둔 해녀들이 대부분 그런 경우라고. 보목리 중군 해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해녀학교를 다니면서 누구는 해녀의 꿈을 더 단단하게 다졌노라고 했고, 누구는 생각보다 물질이 너무 힘들어서 낭만적인 꿈을 접기로 했다고 말했다. ⓒ 강길순
# 해녀들의 공동체 - 할망바다, 불턱

"만나면 만날수록 해녀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해독 불능이었다. 기자 생활 25년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났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공무원에서부터 사기꾼과 조폭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해녀들은 내가 접했던 직업군 중에 가장 난해했고,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존재였다." (프롤로그)

8년 동안 제주올레길을 내면서 가장 많이 만났던 이들이 '해녀 삼촌들'(제주에서는 나이 많은 어르신을 '삼촌'이라고 부른다)이라지만, 서명숙에게 그들은 모순적 존재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가부장제와 남아 선호사상이 여전하고, 지나가는 올레꾼에게 밀감을 그냥 줄 정도로 인심이 좋지만, 해안가 소라 하나라도 가져가면 목청을 돋우는 게 해녀 삼촌들이다. 그러나 이는 해녀들의 겉모습일 뿐이다.

해녀들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실천하는 생태주의자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날마다 물질하지 않는다. 물에 드는 건 한 달에 12~15일 가량. 물때와 바람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리고 '은행이자 창고'인 바당밭을 일구는데 정성을 쏟는다. 6~8월 산란기에는 소라의 채취를 스스로 금한다. 전복 종패를 키워 바당밭에 뿌려 풍요로운 미래에 투자하기도 한다. 바다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산소통에 의지해 남획하지 않고, 오로지 몸으로 자기 몫만을 채취한다.

해녀 공동체의 더불어 사는 모습도 인상 깊다. 빈 망사리를 메고 기가 죽어 바다를 나오는 초보 해녀에게 고참 해녀들이 자기가 잡은 문어, 전복, 소라를 넣어 망사리를 채워주는 '정'이 살아있다. 난다 긴다 하는 상군 해녀들도 나이를 먹으면 물질이 버거워진다. 그런 해녀 할망들을 위해 공동체가 만든 노후보장책이 '할망바다'다. 수심이 얕고 해산물이 풍성한 바당밭을 지정해 해녀 할망들만 작업하게끔 한 것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가파도에는 아직도 '할망 바당'이 건재하단다.

육지 사람에겐 낯설지만, 제주 해녀들에게는 정겨운 단어가 '불턱'이다. 해녀 문화를 잘 보여주는 불턱은 말 그대로 '불을 쬐는 곳'이다. 해녀들은 이곳에서 해녀복을 갈아입고, 중간에 휴식도 취한다. 뿐만 아니다. 물질이 끝나면 도란도란 둘러앉아 몸을 녹이며 수다를 떠는 사랑방 역할도 한다. 작업 일정에 대한 논의부터 소소한 집안 이야기와 동네 소문들까지 오가는 불턱 사랑방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 '불턱에서 나눈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것. 자유롭게 이야기하되, 갈등의 불씨는 없애는 해녀 공동체의 지혜다.
해녀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바다라는 놀라운 신세계를 접하게 되었고, 바다에서 노는 즐거움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강길순
# 70대 현역 대장 할망부터 30대 명함 찍는 해녀까지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는 제주 해녀들의 속담은 그들의 고단한 삶을 웅변한다.

"이승에서 태어나 저승을 일터로 삼아야 하는, 외로운 소나무 같은 존재, 해도 달도 없는 날에 태어난, 사방이 물로 뱅뱅 둘러싸인 고립된 섬에 사는, 세 끼를 굶고 일해서 번 돈을 서방님 술값에 쓰는, 소로도 못 태어나서 한탄스러운 존재. 그러나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해녀들은 자신들의 노동으로 가정을 꾸리고 마을을 위기에서 건져내고 제주도를 먹여살렸다." (에필로그)
그녀를 만나자마자 명함을 내밀었다. '해녀 채지애'. 신선한 충격이었다. 해녀의 명함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전직 헤어 스타일리스트였다. ⓒ 강길순
이 책에는 30대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닌 해녀들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물질 인생 70년인데도 여전히 현역인 고인오 대장 할망, '할망민박'의 원조인 강태여 할망, 해녀 명함을 건네는 전직 헤어 스타일리스트 채지애씨, <인간극장>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30대 마라도 해녀 김재연씨, 한때 서귀포를 주름잡던 조폭 대장이자 이 책의 저자 서명숙의 친동생인 서동철의 아내 '가파도 해녀' 강수자씨... 이들의 삶은 하나같이 대하 드라마다.

1930년대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 역사와 4·3항쟁의 쓰라린 상처로 무남촌이 돼버린 북촌 마을 해녀들, 일본·중국·러시아 등지로 진출했던 '출가 해녀들'의 이야기에 이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런 이야기들이 "남의 이야기, 내가 겪지 않은 이야기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저자 서명숙의 마음을 돌려놓은 게 아닌가 싶다.

"살암시민 다 살아진다(살다보면 다 살게 된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서명숙을 버티게 해주었다는 해녀 삼촌들의 한마디는 책을 읽는 이에게까지 울림으로 다가온다. 책 도입부에 펼쳐진 허영선 시인의 시는,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다시한번 곱씹었다. 책을 읽기 전엔 서시(序詩)였는데, 책을 읽고 나니 헌시(獻詩)였다.

"해녀들은 생의 마지막에 / 둥근 파도소리를 듣는다 / 묵은 생의 지붕을 달래주던 소리 / 새로운 생을 함께하던 그 소리 / 파도와 함께 해녀들은 바다새처럼 / 파도소리를 내며 생을 다한다 / ......" (허영선 시인의 시 '해녀의 생' 중에서)
2014년 마지막날, 신산리를 지날 무렵, 길순 언니가 소리쳤다. "아이고, 저기 테왁 좀 보라게. 새해 첫날부터 해녀들 물에 들어갔저." 눈보라 휘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주황색 테왁들은 선명하게 보였다. ⓒ 강길순
※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책에서 나오는 인세는 모두 담돌간세 사업에 쓰입니다. ㈔제주올레는 올 초부터 제주올레 여행자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 '담돌간세'를 벌이고 있습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 숨으로 인생을 헤쳐온 제주해녀가 전하는 나를 뛰어넘는 용기

서명숙 지음, 강길순 사진, 북하우스(2015)


태그:#숨, #제주해녀, #제주올레, #서명숙,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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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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