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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 듯하다. 나는 1988년에 주인공들과 같은 고2였고 내가 다닌 여고는 종로경찰서와 인접해 있었다. 어느 날 하교길. 나는 버스 한 대를 점거한 채 창문에 노동권 보장을 써 붙였던 여성노동자들이, 그 버스 그대로 종로경찰서로 들어가 굴비 엮듯 손목에 밧줄이 묶여 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펴지 못하게 기역자로 숙인 채로 비슷비슷한 단발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1996년. 나는 연세대 안에 있었다. 종합관에 있던 학생들이 끌려나오면서 경찰은 연행된 학생들 몸에 빨간 도장을 찍었다. 고기에 등급을 매겨 찍듯이. 이들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포획물이었을 뿐이었다.

2015년. 우리 사회 장애인들은 등급이 매겨진다. 그/녀들의 환경이나 욕구, 사회적 관계는 무시되고 은폐된 채 장애인을 '손상된 몸을 가진 사람의 등급'으로 매겨버린다.

2015년. 1인가구 최저생계비는 62만 원이다. 그런데 부양의무자가 있으면 그나마 수급자도 될 수 없다. 자식이나 부모가 실제 부양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얼굴 따위 필요 없이 얼굴 없는 부양의무자가 잡히면, 최최최소한의 복지조차 가난한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2015년. 노점상은 사람이 아니라 거리의 쓰레기일 뿐이다. 더위와 추위, 매연과 소음 속에서 생계를 위해 피땀 흘려 노동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며, 일자리도 아니고 쓰레기일 뿐이다. 노점은 불법이라는 주홍글씨는 언제든 걷어차도 좋다는 인증이고 노점에 대한 폭력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2015년. 철거민에게는 주택의 더 나은 상품화를 위해 빨간 딱지를 붙인다. 그들의 공동체 따위는 인근 집값의 상승을 위해 산산이 부서지고 거리로 내쫒기는 철거민에게도 얼굴은 없다.

모두가 가난한 사회, 더욱 멸시받는 이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장의 4번째 추석날. 농성을 시작한 후 13명의 활동가가 세상을 떠났다.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광화문 농성장의 4번째 추석날. 농성을 시작한 후 13명의 활동가가 세상을 떠났다.
ⓒ 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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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빈곤문제를 중심으로 빈민사회단체가 모여 서울역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담을 하며 우리 사회 '빈곤'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외면했다.
'나는 빈곤층이 아니야' '나에게 빈곤하다는 낙인을 찍지마'

2015년. 빈곤층이 720만 명이라고 한다. 국민 7명중 1명은 빈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내가 빈곤하다고 생각한다. '너만 가난하니, 나도 가난해' 2015년. 99%가 가난하고 가난해지고 있는 사회이다.

모두가 가난한 사회. 그러나 그 중에서도 여전히 낙인찍혀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바로 장애인이고, 노점상이며 철거민이다.

그저 버티고 참아내는 것으로는 생존조차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몸에 찍힌 등급을 없애려고, 재활용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받는 폭력적 단속을 중단시키려, 삶의 공간을 송두리째 빼앗는 빨간 딱지를 반납하려고 거리로 나섰다.

2012년. 광화문에서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이 시작됐다. 11월 14일이면 1181일이 된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광화문 농성장을 지키며, 장애인들은 '그린라이트'를 켜고 있다. 복지의 기본을 바로 세우는 최우선 과제, 장애의 낙인과 빈곤의 굴레를 없애는 최우선 과제인 그린라이트는 바로 장애등급제, 부양의무제 폐지인 것이다.

2009년.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개발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일상화되었고, 철거는 대규모 지역에서 집집마다로 분산되었을 뿐이다. 이제 망루는 얼굴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주거이거나 상가이거나 세입자들은 순식간에 빨간 딱지에 싸여 버려지고 있다. 개발이 되어도 사람이 남을 수 있도록 순환식 개발을 하자는 철거민의 요구는 2015년에도 한결같이 외쳐지고 있다.

2015년. 강남구청은 '노점없는 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강남특별자치구'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즈음이다. 이미 2013년부터 강남역 노점을 때려잡듯이 철거하고, 공무원들은 자해공갈단이 되고, 이에 저항하는 노점상들을 무차별적으로 고소고발하고, 수천만 원이 넘는 과태료를 부과한 후였다. 이유도 대책도 없이 강남에 노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점은 사람 사는 곳에 존재한다. 노점이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요구는 '아~네. 면담하지요'라고 말하고 면담하는 날 노점을 철거하고 구청의 셔터를 내려놓는 상황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노점단속중단 요구는 노점상이 생존을 위해 단결한 이래 지금까지 가장 일차적인 요구이다.

가난한 이들이 유일한 무기는 단결

강남구청은 '노점없는 강남구'를 만들겠다며 노점상을 무차별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단속받는 노점상들은 이미 강남구와 협의하여 테헤란로에서 이전한 노점상들이다. 10월 16일 노점상들이 강남구청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강남구청은 '노점없는 강남구'를 만들겠다며 노점상을 무차별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단속받는 노점상들은 이미 강남구와 협의하여 테헤란로에서 이전한 노점상들이다. 10월 16일 노점상들이 강남구청에 항의하는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 유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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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장애인, 노점상, 철거민, 노숙인, 수급자, 영세상인, 비정규직, 농민, 노동자.
이런 이름들 자체가 낙인일지 모른다. 혹은 자신에게 찍혀진 낙인을 없애기 위해 뭉치고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붙인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민중총궐기는 가난한 이들의 총궐기이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이들의 분노가 모이는 민중총궐기에 그동안 질기게도 싸워온 선수들이 먼저 뭉쳤다. 거리에서 가장 자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거리에 주저앉아 신발짝을 두들기는 데 노점상 할머니들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이동권을 보장을 위해 싸워온 장애인들처럼 거리를 종횡무진 누빌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 일당백으로 최선두에서 물러서지 않는 데에 철거민만한 사람들이 없다. 거리가 곧 집인 노숙인도, 최저생계조차도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하는 수급자도 모두 거리의 사람들이다.

노점상들이 먼저 포문을 연다. 매년 노점상의 기념일인 613대회 대신 11월 14일에 노점상대회가 서울역에서 열린다. 노점상 조직에서만 가능한 200% 동원이다. 노점을 부부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회원은 부부 중 한 명만 가입하지만 이번 11월 14일에는 모든 노점을 전폐하고 부부가 다 모이기 때문에 200%가 모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어서 빈민,장애인대회가 열린다. 노점상, 철거민, 장애인, 노숙인 등 속한 단체의 이름은 다르지만 1만여 명의 가난한 이들이 모여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동을 건다.

가난한 이들의 유일한 무기는 단결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노동자 민중의 단결의 물결에 마중물이 될 것이다.

우리의 얼굴을 보여주마

우리에게는 얼굴이 있다. 이름도 있다. 가족도 있다.
낙인찍히고, 쓰레기 취급당하며, 굴종의 대상으로 살라고 강요당했던 그/녀들이 모인다.
빈곤은 국가의 책임이다. 노동자를, 농민을, 상인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낙인찍으려는 정부와 재벌의 폭력을 우리가 나서서 막을 것이다.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라고 강요하는 정부와 재벌에게 가난한 이들의 삶의 힘을 보여줄 것이다.

2015년 11월 14일, 우리의 얼굴을 보여주마.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유의선 시민기자는 전국빈민연합 집행위원장입니다



태그:#민중총궐기, #노점상대회, #장애등급제폐지, #빈민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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