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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가뭄 탓에 예년보다 덜 아름답다고 하지만, 여행자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가뭄 탓에 예년보다 덜 아름답다고 하지만, 여행자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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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늦가을로 접어들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단풍을 찾아간다. 가뭄 탓인지, 단풍의 속도가 예년보다 더디다. 아름다움도 조금 덜한 느낌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단풍을 보지 않고 가을을 보낸다면 너무 서운할 것 같다. 그래서 찾아갔다. 지리산 피아골이다. 지난 1일이었다.

피아골은 지리산의 가을을 대표하는 곳이다. 피아골의 가을은 단풍이 더디고 예년보다 덜 아름답더라도 여행자의 마음을 빼앗고도 남는다. 산도 붉게 타고, 물도 붉게 물들고, 사람도 붉게 물든다는 삼홍(三紅)의 단풍이다. 가을 지리산의 백미다.

피아골은 지리산 남동부의 계곡을 일컫는다.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속한다. 임걸령에서 시작, 직전마을을 거쳐 아래로 흘러 섬진강에 합류하는 15㎞의 계곡이다. 섬진강에서 연곡사를 거슬러 올라 울창한 골짜기를 만나고 반야봉과 임걸령으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지리산 피아골의 가을. 피아골은 임걸령에서 시작돼 직전마을을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긴 계곡이다.
 지리산 피아골의 가을. 피아골은 임걸령에서 시작돼 직전마을을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긴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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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가뭄 탓에 예년보다 덜 아름답다지만, 여행자의 마음을 빼앗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가뭄 탓에 예년보다 덜 아름답다지만, 여행자의 마음을 빼앗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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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은 지리산 계곡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꼽힌다. 가뭄으로 수량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계곡물은 맑고 깨끗하다. 사철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계곡이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인 가을은 더더욱 황홀하다.

조선 중종 때 시인 남명 조식도 이 풍광에 감탄하며 삼홍시(三紅詩)를 읊었다. '흰구름 푸른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바람에 물든 단풍 불꽃보다 고와라/ 천공이 나를 위해 뫼 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까지 붉더라.'

지리산 피아골의 가을. 사철 아름다운 피아골이지만, 온 산을 붉게 물들인 가을은 더욱 황홀하다.
 지리산 피아골의 가을. 사철 아름다운 피아골이지만, 온 산을 붉게 물들인 가을은 더욱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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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은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계곡이다. 깊은 산골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조선시대엔 일본군에 맞선 의병들의 항전이 펼쳐졌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선 빨치산들의 저항이 거셌다. 수많은 사람들이 숨져갔던 산골짜기이고 계곡이다. 그 소용돌이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피아골'이란 얘기가 전해진다.

조정래도 소설 '태백산맥'에서 "피아골 단풍이 유독 붉은 건 이 골짜기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양쪽 비탈에 일구어낸 다랑이논마저 바깥세상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원혼들이 그렇게 환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들까지도 붉게 보인다.
 지리산 피아골의 단풍. 그 속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들까지도 붉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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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은 지리산의 가을을 대표하는 계곡이다. 지난 1일 많은 여행객들이 피아골의 단풍을 즐기고 있다.
 피아골은 지리산의 가을을 대표하는 계곡이다. 지난 1일 많은 여행객들이 피아골의 단풍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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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명은 벼과 식물인 피가 많아서라는 게 정설로 전해진다. 옛날에 사람들이 오곡 중의 하나였던 피를 많이 가꿔서 '피밭골'이라 부르게 됐고, 이후 피아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피아골에 자리한 직전(稷田)마을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한 자로 피 직(稷)에 밭 전(田) 자를 쓴다.

직전마을에는 현재 30여 가구 60여 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식당이나 민박업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에 가끔 비치는 김미선(29) 이장도 이 마을에 산다. 아직 미혼의 김 이장은 지리산과 섬진강을 애인 삼아서 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주민들의 재신임을 얻어 올해 4년째 이장을 맡고 있다.

피아골 직전마을 김미선 이장.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절임식품과 발효식품을 만들며 살고 있다.
 피아골 직전마을 김미선 이장.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절임식품과 발효식품을 만들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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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연곡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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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에서 만나는 절집 연곡사의 역사도 깊다.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연기조사가 여기에 절을 지으려고 풍수지리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연못의 가운데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갔다.

연기조사는 그 연못을 메우고, 거기에 법당을 지었다. 절 이름에 제비 연(燕), 골 곡(谷) 자를 써서 연곡사(燕谷寺)라 이름 붙였다. 도선국사, 현각국사 등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연곡사의 스님들은 임진왜란 때 승병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일로 일본군의 보복을 받아 절집이 불에 탔다.

1900년대엔 항일의병의 근거지가 됐다. 같은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절집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한국전쟁 때도 불에 타는 수난을 겪었다. 이렇게 세 차례 전소되면서 전각이 모두 사라졌다. 석조물만 남았는데, 지금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다.

통일신라시대 사리탑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동승탑. 국보로 지정돼 있다.
 통일신라시대 사리탑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동승탑. 국보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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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연곡사를 대표하는 석조물 가운데 하나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연곡사 현각선사 탑비. 연곡사를 대표하는 석조물 가운데 하나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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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있는 동승탑과 북승탑이 국보다. 삼층석탑과 현각선사탑비, 동승탑비, 소요대사탑은 보물로 지정됐다. 지리산의 다른 절집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위상은 높은 절집이다. 조계종의 교구 본사다.

동승탑은 높이 3m의 동부도다. 통일신라시대 사리탑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장식과 조각도 정교하다.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가장 크다. 도선국사의 승탑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제53호로 지정됐다.

북승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세워진 팔각형의 승탑이다. 동승탑을 모방해서 고려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각선사의 승탑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삼층석탑도 있다.

의병 고광순 순절비. 고광순은 연곡사에 근거를 두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절했다. 연곡사 경내에 있다.
 의병 고광순 순절비. 고광순은 연곡사에 근거를 두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절했다. 연곡사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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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연곡사 전경. 복원 불사를 근래에 진행해 고찰의 분위기는 없다. 하지만 깔끔하고 호젓한 맛은 으뜸이다.
 지리산 연곡사 전경. 복원 불사를 근래에 진행해 고찰의 분위기는 없다. 하지만 깔끔하고 호젓한 맛은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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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게 의병 고광순 순절비다. 담양 창평 출신의 고광순은 연곡사에 근거를 두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절했다. 나중에 주민들이 뜻을 모아 순절비를 세웠는데, 그 비가 연곡사 경내에 있다.

지금의 연곡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어졌다. 옛 법당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강석과 자연석으로 축대를 쌓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법당을 지었다. 복원 불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요사채를 근래에 새로 지은 탓에 고찰의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그래도 깔끔하고 호젓한 맛은 으뜸이다.

섬진강변에 자리한 석주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섬진강변에 자리한 석주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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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곡사에서 가까운 섬진강변에 석주관성도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계를 이루던 성이다. 성벽의 둘레가 750m, 높이 1∼1.5m 규모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에서 구례, 남원을 향해 넘어오는 일본군을 방어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돼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출발점이기도 하다.

지금은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와 승·의병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당시 순절한 왕득인 등 의사 7명과 구례현감 이원춘의 무덤도 석주관 앞에 있다. 석주관과 칠의사묘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석주관 칠의사의 묘. 정유재란 당시 순절한 의사와 구례현감의 무덤이다. 석주관 맞은편에 있다.
 석주관 칠의사의 묘. 정유재란 당시 순절한 의사와 구례현감의 무덤이다. 석주관 맞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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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피아골, #지리산, #피아골단풍, #단풍, #연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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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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