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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09년 7월 6일 전남 황전면에서 일어난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검찰은 청산가리를 탄 막걸리로 어머니를 죽인 범인으로 남편과 딸을 지목했다. 그 후 부녀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고, 각각 무기징역과 실형 2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부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검찰 수사 결과를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독자 대다수와 인연이 없는 이 부녀의 인생살이를 이 연재물에 담았다... -기자 말 

(10화 : 방송 덕에 받은 자백? 제작진 생각은 달랐다 편에서 이어집니다)

과거 청산가리는 철공업체에서 철을 단단하게 만들 때 쓰였다. 불에 달군 금속을 청산가리에 담그면 청산가리가 녹아 금속 표면에 달라붙어 막을 형성하고, 이때 물로 빠르게 냉각하면 강도가 높아진다. 이른바 철 담금질이다. 호미나 낫을 만들 때 청산가리를 넣으면 강도가 강해져서 옛날에는 대장간에서도 사용했다. 

하지만 강철이 나오면서 청산가리를 쓸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날 선박이나 비행기는 모두 강철로 만든다. 강한 철판을 가공할 때 쓰는 게 전기용접기다. 약한 쇠를 가공할 때는 산소 용접기를 사용했다. 

검찰은 백경환씨가 17년 전 동네 주민 이강춘(가명)씨에게 청산가리를 얻었다고 했다. 검찰은 이강춘씨와 백경환씨가 서로 잘 알던 사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이강춘씨는 당시 백경환씨네 맞은 편에 살았고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했다. 17년 전 당시 백경환씨 형제는 블록 공장 일을 하면서 트럭으로 배달도 했다. 백경환씨는 자전거 바퀴 '펑크'를 때우려고 자전거 수리점에 종종 들렀다. 

검찰은 이강춘씨가 자전거 수리점에서 산소 용접기를 사용했으므로 청산가리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백경환씨는 사건 17년 전인 1994년 백색 가루 형태 청산가리를 신문지로 싸서 비닐봉지에 밀봉해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백씨는 청산가리를 어디서 얻었을까
 
백경환씨가 17년 전 얻은 청산가리
 백경환씨가 17년 전 얻은 청산가리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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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환씨가 청산가리를 얻은 이유가 특이하다. 백씨는 "농사지을 때 해충을 죽이려고 얻었다"고 검찰에서 자백했다. 하지만 가족은 창고에 그런 위험한 물질이 17년 동안이나 보관됐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동안 손자들이 창고에 들어가 이것저것 만지면서 놀 때마다 할아버지인 백씨는 단 한 번도 주의를 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증거 찾기에 대한 검찰 입장
 증거 찾기에 대한 검찰 입장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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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백경환씨의 자백이 명백한 증거인 만큼 청산가리 유입경로까지 반드시 밝혀야 하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강춘씨의 자전거 수리점에 청산가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보기로 하자. 이강춘씨는 1999년에 사망했기에 당사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부인과 자식들이 아직 해당 지역에 살고 있다.

청산가리 공급처로 지목된 이강춘씨 가족에게 이 사건은 놀랄 일이었다. 사건 당일 옆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에 그들은 그저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백경환씨가 용의자로 지목되자 이강춘씨 가족은 백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다음 청산가리 구입처로 본인 집이 지목됐고 기자들이 몰려와 "청산가리를 썼느냐"고 물어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자전거 바퀴) 빵꾸는 고무로 때운다"고 받아쳤다.

백경환씨는 이강춘씨에게 1994년쯤에 청산가리를 얻었다. 아마도 청산가리를 한 움큼을 선뜻 줄 정도면 사이가 매우 각별했을 것 같다. 검찰도 둘이 서로 '잘 알던 사이'라고 강조했다. 이강춘씨 가족도 당시 백경환씨와 '잘 알던 사이'라는 것은 동의했다. 한동네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강춘씨가 백경환씨와 친한 사이라는 것은 부정했다. 일단 나이 차이가 너무 컸다. 호적상 이강춘씨와 백경환씨는 열 살 차이다. 게다가 가족들은 이강춘씨는 그렇게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이씨 가족이 두 사람의 친분을 부정하는 두 번째 이유는 뚜렷했다. 이강춘씨 집은 구례구역과 가까운 곳이었다. 1990년대 후반 구례구역 근처는 지리산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식당이 한창 들어서고 있었다. 당시 이강춘씨도 식당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그즈음 이웃 마을로 이사한 백경환씨는 오이 하우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전에 살던 동네 식당에 오이를 납품했다. 그 근처 식당 대부분 백경환씨와 안면 때문에 오이 거래를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강춘씨 부인은 단 한 번도 백경환씨와 오이 거래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농사에 청산가리를 썼다고?
 
친분을 증명할 오이 거래.
 친분을 증명할 오이 거래.
ⓒ 공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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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이씨의 자전거 수리점에 청산가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할 길은 없을까? 이강춘씨의 큰아들은 1982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 수리점에서 일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나중에는 가업까지 물려받고 지금도 같은 계통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에게 철 담금질 기술을 전수받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철 담금질 방법을 모른다.

물론 이강춘씨가 아들 모르게 청산가리를 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강춘씨에게 청산가리가 있었다면 분명히 또 다른 공급자가 있었을 것이다. 공급자를 추정할 수 있는 힌트는 동네 사람과 대화에서 나왔다. 한 할아버지가 1960년대 자기가 병원에 근무했다며 당시 사람들이 청산가리 구매를 부탁했고 이에 구해줬다고 했다. 당시는 청산가리 관련 규제도 없던 때였다. 동네 사람 진술을 확보하면 1990년 이강춘씨가 청산가리를 구한 정황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이처럼 명확한 입증 없이 부녀는 자백만으로 유죄를 받았다. 대법원 판결(2012.3.15.) 이유는 이렇다.

'과거 철 용접 등에 청산가리를 사용한 경우가 많았고 채소농사를 짓는 사람들 사이에 해충을 박멸하기 위한 수단으로 청산가리가 암암리에 유통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면'

즉, 검찰은 해충을 박멸하려는 농민 사이에 청산가리가 암암리에 유통된 증거들을 풍부하게 제시했다. 이는 백경환씨가 오이를 재배하면서 해충을 없애고자 청산가리를 사용했다는 진술을 뒷받침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검찰이 법정에 낸 보강 증거를 살펴보자.

검찰은 백경환씨 동네 사람 4명과 다른 동네 사람 2명에게 받은 진술을 법정에 냈다. 모두 오이 농사에 청산가리를 썼다는 내용이다. 이는 경찰에서 조사한 내용이었다. 검찰이 살인사건 기록을 검찰로 송치하도록 요구하자 경찰은 이에 따랐다. 검찰은 사건 기록 중 공소유지를 위해 유죄 입증에 유리한 내용을 뽑아 재판에 제시했다.

처음 경찰이 밝혀낸 내용부터 살펴보자. 당시 동네 사람 가운데 이금형씨가 가장 먼저 청산가리를 썼다고 말한다.
 
청산가리를 썼다고 주장한 마을 아주머니.
 청산가리를 썼다고 주장한 마을 아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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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청산가리가 어떻게 생겼던가요.
답 : 하얀 바탕에 약간 노란 색을 띠는데 가루입니다.

문 : 당시 청산가리를 어떻게 사용하였나요.
답 : 예, 오이하우스 길이가 100m 정도 되는데 모퉁이에 신문지를 놓고 위에 '청산가리'를 놓고 불을 놓아 태워서. - 이금형 경찰진술조서. 2009.7.23

이금형씨 남편 우철문씨도 가세했다. 8월 1일 순천경찰서 조사에서 다른 마을 사람 김광식씨와 신종묵씨 두 명이 청산가리를 쓰는 것을 "직접 봤다"고 주장한 것이다. 남편 진술을 살펴보자.

농사에 썼다는 물질, 알고 보면 황산칼륨일 수도
 
청산가리 사용을 목격한 동네 아저씨 진술
 청산가리 사용을 목격한 동네 아저씨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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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식과 신종묵 둘이서 하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 오래전에 두 사람은 확실히 오이 재배를 마치고 이맘때쯤 비닐하우스 땅바닥을 경운기로 갈아엎고 그 위에 청산가리 가루를 골고루 뿌린 다음 비닐로 그 위를 덮어 놓은 것을 봤습니다. (...) 바케스 같은 곳에 담아서 다닌 것을 봤는데 그 양은 모르고, 보통 6백 평 정도 재배를 했는데, 전체적으로 바닥에 하얗게 뿌렸습니다. - 우철문 경찰 진술조서. 2009.8.1.

청산가리 가격이 얼마 정도였을까? 한 법정 증언에 따르면 콩알 크기 2개 정도에 3만 원을 줬다고 한다. 이 사건기록을 검토한 전직 형사과장은 '(농사에) 돈이 참 많이 들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검찰은 경찰 진술조서를 법정 자료로 제출할 뿐만 아니라 항소 이유서에도 백경환씨 동네 사람 4명이 한 진술을 소개하며 백경환씨 자백에 신빙성을 보탰다.

우철문(가명)은 "오이농사를 하는데 청산가리를 태워 선충을 죽인다"라고 진술하고

김광식, 신종묵(가명)은 "오이 재배를 하면서 흙에 청산가리를 뿌린 사실을 알고 있다"(수사기록 제6권 116~122쪽)라고 진술하고,

이금형은 "오이농사를 하는데 청산가리를 태워 선충을 죽였다(수사기록 제6권 154쪽)"고 진술... - 검찰 항소이유서 54쪽. 2010.4.5.

하지만 현장에서 '보강증거' 사실 확인이 시작되자 필자는 당황했다. 거론된 동네 사람들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실제로 청산가리를 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사연은 이렇다. 순천경찰서는 처음에 사건 현장을 중심에 두고 시작해 그 동네 사람 가운데 청산가리를 쓴 사람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청산가리를 썼다고 증언하는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바로 이금형씨다. 남편 우철문(가명)씨도 오이농사를 짓는 다른 사람들을 지목했다.

순천경찰서는 지목된 농가를 뒤졌고 사람들도 불러서 조사했다. 순천경찰서 조사결과, 처음 아주머니가 쓴 것은 청산가리가 아니었다. 농약 방에서 쉽게 구매 가능한 유황, 즉 '황산가리(황산칼륨)'였다. 황산가리는 하우스에 있는 자재 소독을 할 때 사용된다. 가루를 땅바닥에 그냥 놓으면 흙과 섞이므로, 종이 위에다가 놓고 태운다고 했다.

얼마 안 가 당시 마을에는 황산가리인지 청산가리인지 구분을 못 하는 사람들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6백 평 되는 땅바닥에 전체적으로 하얗게 뿌린 것은 무엇일까? 그건 토양의 산성화를 막는 소석회 아니면 생석회라고 했다. 조개껍데기로 만드는데 색깔이 하얗다.
 
마을 해프닝
 마을 해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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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순천경찰서는 그 후로 더는 조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 아무런 조사가 없었던 걸 보면 경찰도 그저 해프닝으로 봤고, 이 동네에는 청산가리 사용자가 없다는 수사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이런 수사보고를 비롯한 수사기록은 검찰에 송치돼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단지 당시 순천경찰서 소속 한 형사는 "백경환씨 동네에서는 오이농사를 짓는데 청산가리 사용자가 없어서 다른 이웃 동네로 수사를 확대했다"고 말했다.

'보강증거'란 진술이 허위가 아니란 것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들이다. 검찰은 백경환씨 자백이 허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허위증거를 제출한 셈이다. 검찰이 이런 허위증거들을 제시한 것은 고의일까? 아니면 실수일까?

한 전직 형사과장은 고의라면 허위공문서 작성에 해당하고, 실수라면 "살인사건을 다루는데 기록 전체를 읽어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계속해서 경찰 입장을 살펴보자.

(제12화 - '경찰 측 입장' 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구겨진 제복 , #나흘간의 기억 , #서형 작가 , #순천 청산가리 막걸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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