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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해 시끄러운 가운데, 의병연구 전문가인 이태룡(60) 박사는 의병 관련 용어나 설명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6일 이태룡 박사는 "역사 용어를 누구의 시각으로 사용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조선총독부가 1938년에 펴낸 <조선사>에 따라 지금까지 사용되어 왔다"며 "1995년 열린 '의병 100주년 학술회의' 등을 통해 '을사보호조약'이 '을사늑약'으로, '한일합방'이 '경술국치'로 바로 잡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바로잡아야 할 역사용어가 많다"고 말했다.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 표지.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 표지.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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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정신선양중앙회 부설 의병연구소 이태룡 소장(문학박사)은 바로 잡아야 할 용어로 '갑오개혁' '을미개혁' '명성황후 시해사건' '의병전쟁' 등을 지적했다. 이 용어들은 과거 국정교과서부터 사용해 왔고, 현재 거의 대부분 검인정 교과서에도 그대로 실려 있다.

이태룡 박사는 2002~2010년 쓰인 <고등학교 국사>(국정교과서)의 의병 부분을 분석한 자료를 6일 <오마이뉴스>에 보내왔다. 이 교과서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저작권자이고 국사편찬위원회·국정도서편찬위원회가 편찬자이며, 교학사가 발행인으로 되어 있다.

이 박사는 "과거 국정교과서를 보면 한말 일제의 만행을 왜곡하고 의병투쟁 내용은 축소했다"며 "그 해당 단원과 내용 중, 일제의 만행을 '개혁'으로 표현해 놓았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조차 한 구절로 짤막하게 서술해 놓았으며, 색인에 안중근 의사의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2006년 발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이 박사는 2006년 3월 1일자 발행본을 검토했다. 몇 단락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유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1894).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갑오개혁, 1894)"(110~111쪽 본문).

이 단락과 관련해, 이태룡 박사는 "1894년 7월 23일 일제가 군대 5000여 명을 동원하여 성벽을 폭파하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궁궐 수비대였던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고, 총칼로 조선의 국왕과 왕비를 위협하여 그들의 앞잡이 내각을 세우도록 강요하여 과거제도를 철폐하고 앞잡이들을 대거 관리로 임용하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른바 군국기무처로 하여금 일제 침략을 용이하게 법령을 바꾼 것을 '갑오개혁'이라 하고, 일본 군경과 자객을 동원하여 왕비를 참살하고 다시 그들 앞잡이 내각을 세우고, 그들 앞잡이들로 하여금 국왕과 세자의 머리를 강제로 깎게 하고, 단발령을 내린 것을 '을미개혁'이라고 표현하였다"고 밝혔다.

이태룡 박사는 '갑오개혁'이 아니라 '갑오왜변' 내지 '갑오왜란'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는 본문에 있는 '개혁'이란 단어도 다른 말로 수정하거나 기술 내용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2006년판)에서 명성황후 등에 대해 기술해 놓은 내용이다.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2006년판)에서 명성황후 등에 대해 기술해 놓은 내용이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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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명성황후 시해 사건, 1895).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단발령 등을 실시하였다(을미개혁)"(111쪽 본문).


이 문장에 대해, 이태룡 박사는 "명성황후 참살과 전기의병의 내용을 소단원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속에 넣어 설명하고, 그 내용도 명성황후 참살 내용을 애매하게 설명하고, 명성황후 참살 이후 마치 개혁이 이루어진 것처럼 표현하였다"고 밝혔다.

이어 "'시해(弑害)'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신하가 왕이나 왕비를 죽인 경우, 자식이 직계존속을 죽인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고, 일제가 당시 왕비(명성황후 추증)를 조선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음모가 함축된 용어임에도 이를 간과한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덧붙였다.

이태룡 박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아니라 '참살'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111쪽 본문).

이태룡 박사는 이 문장에 대해 "전기의병은 일본 군경과 자객들에 의해 왕비가 참살되고, 이어 국왕과 세자가 궁궐에서 강제로 삭발 당한 후 단발령이 내리자, '나라의 원수를 갚자',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일어선 의병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국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는데, 특히 유인석의 호좌의병은 충주부를 점령하였고, 경상우도 관찰부였던 진주부를 점령한 노응규 의병부대는 인근 고을 의병이 합세하여 1만여 명이었지만, 일부 일제 앞잡이들이 처단되거나 일본으로 도망가자 국왕은 의병해산령을 내려 의병이 해산되었는데, 그 내용은 전혀 없고, 두 문장으로 축소 기술하였다"고 덧붙였다.

'의병전쟁' '의병항쟁' ... '반일투쟁'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2006년판)에서 '항일의병 전쟁' 등에 대해 기술해 놓은 내용이다.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2006년판)에서 '항일의병 전쟁' 등에 대해 기술해 놓은 내용이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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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도 을사늑약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이때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군인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활동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 비해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츨과 평민 의병장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의병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908). 이를 계기로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의병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운동이었다.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과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일제하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114~115쪽 본문).


이 설명과 관련해, 이태룡 박사는 "후기의병은 일제가 러일전쟁 중에 일본공사와 그들 앞잡이 외부대신서리 이지용 사이에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를 체결하였다"며 "'제5조, 대한제국 정부는 상호간에 승인을 거치지 않고 장차 본 협약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사이에 체결할 수 없다'라고 하여 사실상 외교권을 빼앗고, 이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황제 아래 일본인 통감을 두고 이른바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자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1907년에는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 군대마저 해산되자 목숨을 건 국권회복(國權恢復) 의병이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데, 이 역시 축소 기술되었고, 용어마저 '의병전쟁', '의병항쟁'으로 표기하였고,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황제가 '이태왕'으로 격하되었고, 1919년 갑자기 의문의 죽음이 있고 나서 이른바 일제의 '조선귀족원회의'에서 '이태왕의 시호를 고종'으로 추천한 것인데, 거기에 황제를 붙여 이상한 형태의 용어가 된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며 "당연히 연호에 황제를 붙이는 방식처럼 '광무황제'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병투쟁(의병전쟁)을 하나의 캠페인처럼 '구국운동'이라고 표현하였다"고 덧붙였다.

이 단락에 보면 '의병전쟁'과 '의병항쟁'이 같이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태룡 박사는 "같은 국사 교과서에 2개의 단어가 사용되는 것도 문제지만, 당시는 국가간 싸움이 아니기에 '전쟁'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고, '항쟁'이란 단어는 '일본에 저항'이란 의미로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은 '반일투쟁'이란 단어를 쓴다. 북한이 쓰는 용어이기에 우리가 쓸 수 없다는 인식은 잘못이다"며 "'반일투쟁' 내지 '반일의병'으로 불러야 할 것"이라 말했다.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2006년판)의 색인에 보면 안중근 의사가 없다.
 2002~2010년 사용된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2006년판)의 색인에 보면 안중근 의사가 없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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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 교과서에 보면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라고만 표현해 놓았고, 교과서 418쪽에 있는 색인에도 안중근은 없다.

이에 대해 이태룡 박사는 "안중근 의병장(의사)의 '하얼빈의거'에 대해서도 매우 짧은 구절로 기술하였고, 책의 뒤쪽에 있는 '색인'에는 안중근 이름조차 없다"며 "집필진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도적인 실수인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이태룡 박사는 지난해 고조선부터 경술국치까지 의병의 역사를 정리한 <한국의병사>(상·하)를 펴냈고, 올해는 단군과 관련한 내용을 정리한 책 <이것이 진실이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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