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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은 물길 따라 마을을 이뤘다. 한양 북촌과 서촌, 동촌도 마찬가지. 백운동천(白雲洞川), 대은암천(大隱岩川), 옥류동천(玉流洞川), 청풍계천(淸風溪川)을 끼고 선 마을이 서촌이요, 중학천, 가회동·계동·원서동 물길 따라 들어선 동네가 북촌이다. 응봉 동쪽비탈에서 시작하는 흥덕동천(興德洞川)과 낙산 서쪽 계곡부의 쌍계동천(雙溪洞天)을 중심으로 생긴 마을이 동촌이다.

성균관 앞을 흐르는 흥덕동천 길, 현재 복개되어 물길은 찾을 길 없다
▲ 흥덕동천(성균관제천수) 길 성균관 앞을 흐르는 흥덕동천 길, 현재 복개되어 물길은 찾을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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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학촌, 반촌(泮村)

흥덕동천 이름은 태조 때 한양동부 연희방(혜화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근처)에 세워진 흥덕사(興德寺)에서 온 것이다. 흥덕동천은 혜화동과 성균관 쪽, 둘로 나뉘어 흐르다 대학천(대학로)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해방 후 모두 복개되어 원형은 찾을 길 없고 혜화로와 성균관로를 보고 모양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흥덕사 표짓돌  태조가 지은 흥덕사는 현 혜화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근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 근처 마을을 흥덕동이라 부르고 여기서 시작하는 냇물을 흥덕동천이라 하였다
▲ 흥덕사 표짓돌 흥덕사 표짓돌 태조가 지은 흥덕사는 현 혜화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근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 근처 마을을 흥덕동이라 부르고 여기서 시작하는 냇물을 흥덕동천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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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쪽 물길(성균관제천수)은 다시 동반수(東泮水)와 서반수(西泮水)로 나뉜다. 반수는 성균관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균관을 달리 반궁(泮宮)이라 불렀는데 반궁을 두르고 있는 동쪽과 서쪽 물을 각각 동반수와 서반수라 한 것이다.

반궁(성균관)과 반수 앞마을을 반촌이라 불렀다. 현재 반촌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성균관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성균관 명륜당 앞마당 반궁(성균관)과 반수 앞마을을 반촌이라 불렀다. 현재 반촌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성균관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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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는 반수와 반궁 주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를 반촌(泮村)이라 불렀다. 반촌에 사는 노비들은 자연스레 반인(泮人)이라 불렸다. 반인들은 유생들을 돌보고 성균관 잡일을 맡았다.

반와(泮蛙)라는 재미난 말도 있다. '성균관 개구리'라는 뜻으로 책 읽는 소리가 개구리 소리 같다하여 붙여진 말이다. 자나 깨나 책만 읽는 사람을 놀림조로 말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사회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 대학생들이 현대판 반와가 아닌가 싶다.

반촌은 성균관유생이나 과거시험을 보러 몰려든 지방유생들의 하숙촌이요, 성균관 유생들이 들랑대는 식당골로 요즘 대학촌 풍경과 흡사하였다. 반촌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관군의 힘이 미치지 않아 범인이 반촌으로 숨어들면 추격을 포기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조선 대학촌, 반촌은 사라졌지만 반촌 자리에 성균관대학교 대학촌이 형성되었다. 하숙집 대신 고시텔이 많아지고 유생 대신 대학생들이 들락거리는 식당, 주점이 즐비하다
▲ 성균관 앞 대학촌 조선 대학촌, 반촌은 사라졌지만 반촌 자리에 성균관대학교 대학촌이 형성되었다. 하숙집 대신 고시텔이 많아지고 유생 대신 대학생들이 들락거리는 식당, 주점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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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영향인지 70, 80년대 학생운동 기운이 왕성한 대학촌마냥, 반촌이라는 곳은 성리학에 반하는 '불온사상'이 싹튼 온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승훈과 정약용이 반촌에 사는 반인, 김석태 집에 모여 천주교교리에 대해 연구, 토론하다 발각된 일이 있기도 했다. 

또한 반촌은 과거시험을 앞둔 유생들의 사설 교육장이었다. 반인출신으로 '스타강사' 반열에 오른 이도 있었다. 이름은 정학수. 성균관 문묘를 지키고 제사와 청소, 허드렛일을 도맡아보던 수복(守僕)출신이었다. 그는 반촌 꼭대기 송동(宋洞)에 사설학원을 열고 과외선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송동은 송시열 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 커다란 바위에 ‘증주벽립’이란 우암의 필적이 남아있다. 지형을 보고 앵두꽃 핀 예전 송동을 상상할 수 있다
▲ 송동의 자취 송동은 송시열 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 커다란 바위에 ‘증주벽립’이란 우암의 필적이 남아있다. 지형을 보고 앵두꽃 핀 예전 송동을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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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은 우암 송시열 집이 있어 송동이라 불렸던 곳이다. 단오절에 시인묵객들이 몰려들어 앵두놀이를 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조선말 '숭동(동숭동) 앵두장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으니 송동 앵두가 유명하긴 하였던 모양이다. 

반촌은 소를 도살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부여받기도 하였다. 소 도살과 소나무 베는 일, 주조(酒造)를 엄격히 금지하였던 조선시대에 소 도살과 판매권을 갖는 것은 특권이었다. 김주영 장편소설 <객주>에서 한양의 유명한 장수를 얘기하면서 '동촌(명륜동)으로 가면 쇠고기장수'라 한 것도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성균관대학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반촌 간판을 단 소고기 가게는 물론 반수, 반촌의 흔적은 없었다. 모두 예전 말이 되었다. '반촌관(泮村館)'이란 고깃집 하나는 있을 법 한데…….

송동 앵두놀이, 이화동 그네놀이

동촌 응봉자락에는 흥덕동천이 흘렀고 낙산 서쪽 계곡부에 쌍계동천이 있었다. 쌍계동천은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있던 명승지였다. 암석이 기이하고 수림이 울창하며 두 줄기 맑은 시냇물이 흘러 예부터 삼청동천, 백운동천, 옥류동천, 청학동천과 함께 한양 5대 동천(洞天) 중 하나로 뽑혀 곳곳에 정자가 들어섰다. 그 중 하나가 이화정(梨花亭)이며 이화동 유래가 되었다. 

낙산 아래 이화동은 약수로 이름 꽤나 날린 동네다. 낙타를 닮아 낙산(駱山)이니 이 약수를 두고 낙타유방이라 불렀다. 그네로 유명하여 '단오절에 호탕한 사나이들이 그네놀이 하는 부녀자를 먼 발에서 곁눈질해 보던 곳'이었다는 재미난 기사도 있다(1936년 3.21, 동아일보).

흥덕동천과 마찬가지로 쌍계동천은 모두 복개되거나 집들이 들어서 사내 가슴을 들먹거린 그네놀이는 모두 옛말이 돼버렸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온 곳은 낙산 윗동네, 이화마을. 일본식가옥이 그대로 남아 있어 50, 60년대 마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외형이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과 유사하나 대한주택영단에 의해 지어진 일본식 연립주택이다
▲ 이화마을 일본식가옥 외형이 일제가 남긴 적산가옥과 유사하나 대한주택영단에 의해 지어진 일본식 연립주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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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이화마을 뼈대가 선 것은 1958년. 국민주택영단(LH공사 전신)이 주도했다. 주택영단은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무허가건물을 철거하고 비탈에 축대를 쌓아 주택단지를 조성하여 일본식연립주택 57동을 지었다. 적산가옥처럼 보이나 국민주택영단에서 지은 것이다. 일본식가옥, 장옥(長屋, 나가야)처럼 지은 신식 2층집이었다.

비탈에 계단을 내고 계단 양편에 대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일본식 연립주택을 지었다. 지금도 수십채 일본식연립주택 뼈대가 그대로 남아 독특한 마을이 되었다
▲ 이화마을 비탈에 계단을 내고 계단 양편에 대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일본식 연립주택을 지었다. 지금도 수십채 일본식연립주택 뼈대가 그대로 남아 독특한 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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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마을도 다른 마을처럼 뭉개질 위험에 처했으나 뜻있는 예술인들이 담에 벽화를 그렸고 창의적인 문학, 예술인들이 들어와 마을 재생사업을 벌였다. 일본식주택 원형은 그대로 두고 낙후된 마을을 바꾸어 나갔다. 재개발 유혹과 뉴타운 광풍을 이기고 마을이 되살아난 것이다.

담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이제 이화마을은 벽화마을로 세상에 더 알려지게 되었다
▲ 이화마을 벽화 담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이제 이화마을은 벽화마을로 세상에 더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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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일이나 한 마을이 살아서 배겨나기 위해서는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마을사람들이 버티고 있을 때 가능하다. 이화마을 꼭대기, 성곽길 옆에 일본식가옥과 완전히 다른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앞에는 수십 개의 화분이 놓여있고 벽에는 '꽃피는 서울 상' 인증패도 붙어 있다. 이 집 주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일본식가옥이 즐비한 이 마을에 한옥 한 채가 돋보인다. 집 앞 화분이 인상적인데 어쩌면 집 주인은 이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드러내는 것 같다
▲ 이화마을 한옥 일본식가옥이 즐비한 이 마을에 한옥 한 채가 돋보인다. 집 앞 화분이 인상적인데 어쩌면 집 주인은 이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드러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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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지켜보고 있는데 이웃 아주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화분을 보고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늘 하는 인사처럼 보였다. 공방과 작업실, 마을 박물관, 찻집, 액세서리가게로 채워지고 있는 이화마을에 희망처럼 보였다.

이화마을에도 마을 토박이나 겨우 정착해가는 예술인이 집값 상승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야하는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 벼랑 끝에 선 사람 이화마을에도 마을 토박이나 겨우 정착해가는 예술인이 집값 상승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야하는 상황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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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마을을 살리는 과정에서 집값이 상승하고 토박이나 어렵게 정착한 가난한 예술인들이 다시 쫓겨나가는 사례(gentrification, 젠트리피케이션)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화마을은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 마을 재생사업 혜택이 마을주민에게 되돌아가도록 하고 있다고 들었지만 '화분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하나씩 사라지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벼랑 끝에 선 이화마을 조형물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반촌, #성균관, #흥덕동천, #쌍계동천, #이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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