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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만 관객들은 간난산고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들에게 영화 <국제시장>을 눈물로 바쳤다. 타국 막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파독 광부들의 처절한 장면에선 눈물바다가 됐다. 파독 광부 아버지의 삶은 조명됐지만 진폐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광부 아버지들의 삶은 외면당했다. 막장에서 캐낸 석탄으로 춥고 허기진 시대를 달래준 왕년의 산업 전사들의 삶을 3회 연재한다. - 기자 말

광부의 눈물 제단에 바친 손가락 세 개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의 손가락.
 성희직 정선진폐상담소장의 손가락.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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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직(59) 정선진폐상담소장의 손가락은 두 손 합쳐서 모두 일곱 개다. 그 또한 열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태어났다. 세 개의 손가락은 스스로 단지(斷指)했다. 안중근 의사도 한 개의 손가락을 잘랐는데 그는 왜 세 손가락이나 잘랐을까?

1989년 여의도 평민당사에서 단식 농성하던 해고노동자 성희직은 광산작업용 도끼로 왼손 검지와 중지를 단지하면서 광산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했다. 지난 2007년 11월 강원랜드호텔 로비에선 왼손 새끼손가락을 단지했다. 그의 강력한 투쟁으로 2010년 진폐법이 개정되면서 진폐재해자 9500여 명이 매달 81만 원의 진폐기초연금을 받게 됐다.

전태일은 분신으로 노동자의 인간선언을 하면서 노동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성희직은 단식투쟁, 갱목시위, 혈서, 단지 등의 온 몸을 바친 투쟁으로 광산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촉구했다.

광부,
어차피 지하막장에서 짐승으로 살 목숨
손가락 몇 개를 잘라
진정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남은 손가락은 아직 8개
하나 또 하나씩
잘라간들 어떠리 잃어간들 어떠리
나와 우리 5만 광부가
짐승이 아니라 진정 사람답게 살 수만 있다면!


(성희직 시인의 시 '손가락을 자르며' 중 일부)

착취의 땅이 만든 노동운동가 그리고 광부 시인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앞에서 성희직 소장.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앞에서 성희직 소장.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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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삽두삽 석탄생산 전국민이 따듯하다
산업전사 가는길에 막장애환 희망된다
너와내가 한몸되면 석탄생산 배가된다
만근하는 우리아빠 낭비없는 우리가정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 게시됐던 표어)

광산은 착취의 땅이었다. 당시 노동부와 경찰 등은 광산업자의 비호세력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을 국정목표로 삼은 독재정권의 관심사는 석탄증산이었다. 임금과 근로조건을 따지면 빨갱이로 몰았고 어용노조는 광산업자와 한통속이었다. 광산업자들에게 광산은 천국이었지만 가혹한 노동과 착취에 시달리던 광부들에게 광산은 지옥이었다.

광산은 고립의 땅이었다. 첩첩산중인 탓에 광부와 그 가족들의 신음은 세상에 닿지 않았다. 그러다 터진 게 사북항쟁이다. 1980년 4월, 멸시천대에 억눌렸던 5000여 명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와 가족들이 항쟁을 일으켰다.

항쟁의 대가는 혹독했다. 전두환 신군부는 80년 민주화의 봄과 광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북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주동자는 물론 단순 참가자까지 강제 연행해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 구속과 해고를 자행했다.

"나는 1986년 3월부터 1990년 봄까지 막장에서 석탄을 캐던 광부였다. 발파로 화약연기 가득한 시커먼 막장에서 탄을 캐낼 때면 등골이 오싹했다. 갱도 붕락과 갱내 화재 등의 사고로 광부 열 명 중 한 명은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곳이 막장이었다. 나는 거기 막장에서 지옥을 봤다."

성희직은 1986년 강원도 탄광촌으로 이주했다. 정선 삼척탄좌에서 5년째 광부로 일하며 막장 지옥을 경험한 성희직은 노동운동하다 해고된 동료를 돕는 모금운동에 나섰다가 해고됐다.

강고한 투쟁과 명분 없는 해고로 성희직은 한 달 보름 만에 복직했다. 하지만 잇따른 광산사고로 동료 광부들이 연이어 사망하자 안전대책을 촉구하며 동료들과 작업을 거부했다가 또 다시 해고됐다.

그는 노동운동가도 시인도 아니었다. 아내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광산촌을 찾은 건 생존 때문이었다. 해고된 광부들은 다른 광산을 찾아갔다. 부당 노동행위가 일상화된 광산에서 투쟁은 생존권 박탈의 대가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당해고에 승복하지 않았다. 생존을 걸고 싸움에 나선 그는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그는 철저한 노동운동가가 됐고, 그에게 시는 나부랭이가 아닌 온 몸으로 저항하는 무기였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고
진정한 남자는 명예로 산다.


밥그릇을 빼앗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명예를 짓밟힌 사람도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그럴 땐 이빨을 갈아야 한다

두 눈에선 불꽃이 튀고
발톱도 날카롭게 세워야한다
짐승의 심정으로 그렇게 싸워야 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으면 그래야 한다
짐승이 아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성희직 시인의 시 '해고자의 노래' 전문)

성희직 시인은 <광부의 하늘>(1991년)과 <그대 가슴에 장미꽃 한 송이를>(1994년) 등의 시집과 <성희직의 세상사는 이야기>(2002년)와 <세상을 움직이는 힘, 감동>(2007년) 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투쟁으로 법과 제도 바꾼 3선 강원도의원 성희직

성희직(맨 왼쪽) 소장이 지난 8월 태백에서 열린 진폐제도개선 촉구 집회에서 갱목시위를 하고 있다.
 성희직(맨 왼쪽) 소장이 지난 8월 태백에서 열린 진폐제도개선 촉구 집회에서 갱목시위를 하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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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 성희직은 당시 야당인 평민당사에서 단식 농성했다. 목숨을 걸고 복직투쟁을 전개했지만 도시는 냉정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해고 광부의 몸부림을 외면했다. 성희직은 광산작업용 도끼로 왼손 검지와 중지를 잘랐다. 병원에 실어 가려고 했지만 거부했다. 그제야 정치권이 움직였고 언론이 관심을 보였다.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는 건 불효다. 손가락을 절단하는 게 극단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광부들의 고통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억울한 사정을 겨우 들어줬다. 막장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가족을 먹여 살릴 수도 없는 게 광부다. 나의 투쟁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막장에서 시작됐다."

성희직은 1991년 광역의원선거에서 강원도의원에 당선됐다. 예정에 없는 출마였다. 출마예정자가 출마하지 못하면서 대타로 출마했는데 덜컥 당선됐다. 경북 영천 출신인 그에게 강원도는 타관 객지다. 자금, 혈연, 지연, 학연도 없는 데다 당명도 낯선 정당인 민중당 후보인 그를 광부와 가족들이 전폭 지지했다. 전국에 출마한 민중당 후보 중 유일한 당선자였다.

2012년 국회에서 열린 진폐재해자 토론회에서 진폐제도개선을 촉구하고 있는 성희직 소장
 2012년 국회에서 열린 진폐재해자 토론회에서 진폐제도개선을 촉구하고 있는 성희직 소장
ⓒ 성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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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든 학생운동가든 운동권 출신들은 대중을 종종 배신했다. 대한민국 운동사가 입증하듯 제도권에 진입한 운동권 출신 의원 중에 상당수는 권력 주위를 맴맴 돌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대의를 걸레처럼 던져버렸다. 권력 중독자로 전락한 변절자들은 제도권의 한계를 탓했다. 광부의 대변자가 된 강원도의원 성희직은 달랐다. 그는 제도권이 아닌 투쟁 현장에서 정치력을 발휘했다. 

1993년 7월, 정부가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추진하면서 태백과 정선 등은 폐광지역이 될 위기였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지역경기는 침체될 것이 뻔했다. 강원도의원 성희직은 국민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광부 작업복을 입고 서울 명동에서 사흘간 갱목시위를 전개했다. 7월의 땡볕에서 갱목을 지고 거리를 걷고 기는 최초의 갱목시위를 언론이 연일 보도하자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김종호 정책위 의장이 만나자고 했다.

강원도의회 3선 의원이 되면서 부의장까지 지낸 성희직은 체불임금과 산재문제 등 광부들의 각종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폐광지역의 대안 산업으로 강원랜드를 유치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카지노는 악의 꽃이지만 지역민의 생존권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성희직 의원이 단식투쟁, 삭발, 갱목시위, 혈서, 단지 등 강력한 투쟁 방법을 총동원했기에 강원도지사와 강원도 정치권 그리고 정부와 정치권이 강원도의 관련 민원을 해결했다.

신장 기증으로 생명을 살린 뜨거운 사랑

광산진폐권익연대 정선지회 회원인 윤병천(69)씨와 상담 중인 성희직 소장.
 광산진폐권익연대 정선지회 회원인 윤병천(69)씨와 상담 중인 성희직 소장.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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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직 소장은 지난 9월 3일 (사)광산진폐권익연대 정선지회 회원인 윤병천(69)씨를 찾았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부로 사북항쟁 참가자였던 윤씨는 당시 경찰과 보안대의 합동조사에서 통닭구이와 물고문 등을 당했다고 밝혔다. 사북항쟁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면서 피해보상이 이루어졌지만 윤씨는 제외됐다.

성희직 소장이 윤씨를 찾은 건 두 가지의 민원 때문이다. 하나는 사북항쟁 피해 및 보상이고 또 하나는 진폐증 인정 문제이다. 윤씨는 15년 전에 진폐의증 진단을 받았지만 진폐증은 아직 인정받지 못했다.

윤씨의 아내는 13년간 신부전증을 앓다 87년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가산을 탕진했지만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윤씨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던 성 소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1993년 5월, 한 여인이 도의원 성희직의 집을 찾아왔다. 그 여인은 광산 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에 광산 선탄부에서 일하는 동네 이웃이었다. 여인이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진환이가 신부전증으로 몇 년째 고생하고 있잖아요. 탄광 다니던 진환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이 고생 저 고생하면서 대학까지 졸업시켰는데 그런 몹쓸 병원에 걸렸으니….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건강이 더 나빠진다고 하니 어쩌면 좋아요. 병원에서 검사했더니 진환이와 내가 조직이 잘 맞는대요. 내 신장을 떼어줄 작정인데 수술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에요.

의원님께 부탁하려고 찾아왔어요. 내가 나이는 많지만 시력은 아직 좋거든요. 내 눈을 하나 팔아서라도 수술비를 마련해야지 어쩌겠어요. 나야 한쪽 눈이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을 테니 성 의원님, 어떻게 하든 내 아들 좀 살려주세요. 우리 아들 살리게 내 눈을 팔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은공을 잊지 않을 테니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성희직 의원은 수술비 마련을 위해 진환이네 사정을 지역 주민과 언론에 알렸다. 보름 만에 1천만 원이 넘는 성금이 모였다. 성금을 진환이 엄마에게 전달했고 모자의 신장이식 수술은 잘 됐다. 진환이 엄마를 통해 신부전 환자의 고통을 알게 된 성희직 의원은 1994년 6월 9일 한 신부전 환자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월급 110만원 상담소장 자리가 더 행복하다

2016년이면 환갑인 성희직 소장은 농부의 아들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2016년이면 환갑인 성희직 소장은 농부의 아들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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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부터 진폐상담소장을 맡고 있는 그의 월급은 110만 원이다. 지역 정치권에서 차세대 주자로 촉망받던 성희직은 정치권을 떠나 광부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저임금 활동가인 그는 지난 8월 태백 집회에서 진폐 제도 개선을 촉구하며 또 다시 갱목시위를 하고 혈서를 썼다. 정치적 야망 대신에 험난한 길을 선택한 성희직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강원랜드복지재단 상임이사로 근무하면서 판공비 포함해 억대 연봉을 받기도 했고, 도의원이란 감투를 세 번이나 써봤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 광부아버지와 진폐환자들이 '성희직이 때문에 보상도 받고, 문제도 해결됐다'고 고마워하면서 밥도 사주려고 한다.

다만, 가정 경제의 무거운 짐을 아내(교육공무원)에게 지운 것이 미안하다. 내년이면 환갑이다. 갱목시위와 혈서를 그만 하고 싶다. 체력이 딸려 힘들기도 하고 가족들에게도 미안하다."

정치를 그만둔 건 가족 때문이다.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가장의 책임을 절감한 그는 이제라도 작은 행복을 누리고 싶어 정치권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자연의 향기를 맡으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했다. 농부의 아들로 돌아가 텃밭농사를 짓고 싶다는 그의 작은 소망은 이루어질 것 같진 않다. 광부아버지와 진폐환자들의 신음을 외면하기엔 그의 피는 여전히 뜨겁기 때문이다.


태그:#성희직, #광부시인, #갱목시위, #진폐증, #강원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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