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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서울과 춘천을 오가던 길. 숲 속으로 희끗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석파령너미길.
 그 옛날 서울과 춘천을 오가던 길. 숲 속으로 희끗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석파령너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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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가 '강원도'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경계 지역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길 역시 예외는 아니다. 서울 춘천 간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려면 대부분 46번 국도를 이용했다. 이 국도를 타고 춘천을 향해 가다 보면, 경기도와 강원도를 가르는 지점에 걸쳐 있는 '경강교'를 지나면서부터 주변 풍경이 이전과 크게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경강교를 건넌 뒤로는 인가가 부쩍 드물어진다. 산은 높아지고 길은 점점 더 험해진다. 그때까지 대체로 낮은 평지를 달려온 자동차들은 경강교를 지나면서부터는 바위 절벽 아래를 위태롭게 지나가야 한다. 그 차들은 때로 강물 위를 지나가야 할 때도 있다. 절벽을 깎아내고 만든 도로 아래로 북한강이 흐른다. 절벽을 깎아낼 수 없었던 곳에서는 할 수 없이 강 위에 수십 미터 높이의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도로를 깔아야 했다.

이 도로 위를 지나갈 때면, 그 옛날에 이 도로를 건설하던 사람들이 치러야 했을 생고생이 떠오른다. 도로를 만드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도로의 생김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도로가 완공되기 전에는 춘천을 오가는 일 자체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자동차를 몰고 이 길을 지나갈 때면,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배곤 한다. 바위 절벽 아래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 꽤 위험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옛날 이런 도로마저 없던 시절에 부득이 서울과 춘천을 오가야 했던 사람들은 또 어떤 고생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들은 춘천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큰 불편과 모험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길을 가는 도중에 깊은 산 속에서 맹수와 산적을 만나는 일도 결코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을 누군가 소금기 가득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지나갔을 게 틀림없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석파령너미길.
 구불구불 이어지는 석파령너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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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춘천을 걸어서 오가던 길

추측은 단지 추측을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옛날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서, 그 흔적이 완전히 다 사라지고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춘천에 가면, 오래 전 서울과 춘천을 오가던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길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서 그때 그 길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애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춘천 사람들은 이 길을 '석파령너미길'이라고 부른다.

석파령너미길이 시작되는 당림초등학교 앞길.
 석파령너미길이 시작되는 당림초등학교 앞길.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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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령너미길은 춘천을 대표하는 도보여행 길인 봄내길 중 제3코스에 해당한다. 이 길은 북한강 위에 수백 미터 길이 아스팔트 도로를 건설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 수도 없었던 시절에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넘어야 했던 길이다. 그 길이 지금은 배낭 하나 달랑 짊어 맨 채 이곳저곳 걸어 다니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도보여행 길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동네 산책길 걷듯 건들건들 아무렇게나 걸을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이 길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길이 험하고 불편하다는 사실은 별로 바뀐 게 없기 때문이다. 길은 깊은 산 속을 지나간다. 산 속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들어가는 길이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고개 정상이 나타나기를 바라지만, 번번이 배신을 당한다.

결국 다음 길모퉁이에서 바로 정상이 나타날 거라는 희망을 버리고, 땀에 흠뻑 젖은 채 오로지 걷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할 때가 돼서야 비로소 정상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고개 정상을 넘어서기 전까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나무가 우거진 산과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뿐이다. 그렇게 무작정 걷다 보면, 때때로 내가 산 속에서 길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지금도 그런데, 그 옛날엔 얼마나 더 험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춘천부사들이 이임식을 가졌던 석파령 고갯마루.
 춘천부사들이 이임식을 가졌던 석파령 고갯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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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령 정상에 왜 이 길이 석파령너미길로 불리고 있는지 그 내력을 적어 놓은 안내판이 서 있다. 석파령은 춘천으로 새로 임지가 정해진 춘천부사가 이제 막 춘천을 떠나 서울로 되돌아가는 전직 부사를 만나 이임식을 진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자리에서 춘천으로 가는 현직 부사는 '이렇게 험한 곳에서 어떻게 살까'를 걱정하고, 같은 날 춘천을 떠나는 전직 부사는 '정들었던 임지를 떠나는 섭섭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석파'라는 뜻은 이임식을 치르는 장소가 너무 협소해, 두 사람의 부사가 한 자리를 둘로 나눠 앉았다는 데서 따온 말이다. 석파령을 넘었다고 해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석파령을 넘고 나면 곧 이어 '수레넘이'라는 이름이 붙은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이 고개 이름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석파령을 넘은 뒤라서 그런지, 수레넘이고개는 비교적 큰 힘 들이지 않고 넘을 수 있다.

수레넘이고개를 넘고 나면 그때부터는 평지나 다름이 없는 길을 걷게 된다. 사람 사는 흔적도 꽤 많이 눈에 띈다. 과수원이 보이고, 밭과 논도 보인다. 개 짖는 소리도 정겹다. 지금은 들깨를 수확하는 철인지 여기저기서 고소한 들깨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들깨 냄새가 이렇게 진한지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깻단이 길가에 널브러진 채 가을 햇살을 쬐고 있는 풍경이 무척 따뜻해 보인다.

석파령너미길 길가 풍경. 추수 직전 누렇게 익은 벼.
 석파령너미길 길가 풍경. 추수 직전 누렇게 익은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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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머리'와 함께 잠든 신숭겸 장군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는 산 밑에 꽤 번듯한 마을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인다. 박사 학위를 가진 인재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박사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지금까지 70여 명에 가까운 박사가 배출됐다. 박사가 아무리 흔한 세상이 됐다고 해도 한 마을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박사가 나올 수 있는 확률은 그렇게 크지 않다. 이 마을 어딘가에 분명 박사를 낳게 하는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석파령너미길 길 안내 표지판.
 석파령너미길 길 안내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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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파령너미길은 박사마을을 지나 곧 이어 '장절공 신숭겸 장군묘'가 자리한 곳에서 끝난다. 신숭겸 장군은 고려 개국 1등 공신이다. 고려 태조 10년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과 싸울 당시의 일이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군은 그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건이 입고 있던 옷으로 갈아입는다. 적으로부터 왕건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신숭겸 장군은 결국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사이 왕건은 전장에서 무사히 탈출한다.

이후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왕건은 그에게 '장절공'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장절은 '절의가 굳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왕건은 장군에게 시호만 내려준 게 아니다. 장군이 잠든 묘를 밑에서 올려다보면, 그 위에 봉분이 무려 3개나 솟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곳에 혹시 부인이나 다른 가족이 함께 묻힌 게 아닌가 싶지만 그게 아니다. 장군의 묘는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묘다.

봉분이 3개나 된 데는 도벌꾼으로부터 장군의 묘를 지키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군이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장군을 왕건으로 오해하고 왕건이 사망했다는 증거로 장군의 머리를 베어간다. 그 바람에 장군은 머리가 없는 시신으로 남게 된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왕건이 장군의 시신을 거둔 뒤, 장군의 머리를 황금으로 만들어 시신과 함께 안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밑에서 올려다본 신숭겸 장군묘. 봉분이 3개다.
 밑에서 올려다본 신숭겸 장군묘. 봉분이 3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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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크기만 한 금덩어리가 함께 묻혔으니, 자연히 도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장군의 묘가 도벌을 당하는 일을 막기 위해 봉분을 여러 개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전설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한 무덤에 봉분이 3개나 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숭겸 장군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대부분 전설에 해당된다. 모두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전설이다.

장군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꽤 아름답다. 이곳에서 보게 되는 풍경이 또 예사롭지 않다. 묘지 양 옆으로 아름다리 소나무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는 광경이 숭고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소나무들 모두 최소 100년은 넘은 아름드리나무들이다. 그 한가운데로 멀리 춘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데, 그 풍경이 마치 춘천의 과거와 현대를 한눈에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도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신숭겸 장군묘에서 내려다본 풍경. 멀리 춘천 시내가 바라다보인다.
 신숭겸 장군묘에서 내려다본 풍경. 멀리 춘천 시내가 바라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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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 장군이 죽은 뒤로 천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을까? 촌락이 도시로 바뀌고, 강물은 호수로 변하고, 나무는 죽고 다시 자라기를 거듭해 지금과 같은 풍경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앞으로 '천년'이라는 세월이 빛처럼 빠르게 지나쳐 사라진다. 여기 와서 보니, 춘천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다.

석파령너미길은 옛날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길을 되살려 배낭을 짊어 멘 도보여행객들이 걷기 좋게 만들어 놓은 길이다. 이 길이 오래 전 봇짐을 짊어 멘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옛날과 같을 리 없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변화가 심하다 해도 흔적은 남는다. 어느 정도는 옛날 풍경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석파령너미길을 따라서, 옛날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길을 함께 걸었다. 그때 그 길을 걸었던 옛 사람들의 거친 호흡과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신숭겸 장군묘 올라가는 길, 멋드러진 소나무들.
 신숭겸 장군묘 올라가는 길, 멋드러진 소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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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들

'석파령너미길'은 정식 코스가 당림초등학교 앞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림초등학교 앞에는 차를 주차할 만한 공간이 전혀 없다. 굳이 차를 대려면, 도로 위에 세워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를 가져가는 게 오히려 더 큰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석파령너미길은 코스 길이가 약 19km에 달한다. 걸어서 6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차를 가져가도 차를 세워둔 장소로 되돌아오는 일이 쉽지 않다.

춘천 시내에서 당림초등학교 인근을 오가는 버스가 몇 대 있다. 하지만 버스가 자주 다니는 편이 아니라서,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수월찮다. 석파령너미길은 이래저래 교통편이 매우 안 좋은 도보여행 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자주 찾는 여행 장소는 아니다. 여행객도 많지 않은 데다 산이 깊고 외진 탓에 혼자서 여행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 여럿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길 중간 중간에 길 안내판을 세워둬서 길을 잃을 염려는 크지 않다. 한 군데 춘천당림농공단지 근처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길안내 표지판이 엉뚱한 곳에 서 있다. 농공단지 못 미처 샛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춘천예현병원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그 외에 표지판이 불분명한 곳에서는 대개 '직진'을 하면 된다. 가뭄 탓인지 계곡이 바짝 말라 있다. 목이 마를 것에 대비해 물은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좋다.

수레넘이 고갯길.
 수레넘이 고갯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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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석파령너머길, #봄내길, #신숭겸,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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