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제는 낮부터 집안을 신나게 치웠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집안을 새로 꾸미려고 합니다. 그제는 겨울옷을 꺼내어 마당에 말렸고, 오늘은 깔개 하나만 마당에 말리고는 뚝딱뚝딱 책꽂이하고 피아노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이동안 두 아이는 어딘가에서 흙을 퍼 와서 마당에 쏟아부으면서 놉니다. 어쩌다가 누구한테 잡혀서 죽고 만 범나비 애벌레 곁에서 무덤도 살짝 덮어 주면서 흙놀이를 합니다.

끝방에서 피아노를 빼내어 컴퓨터 있는 방으로 나를 즈음 큰아이가 묻습니다. "도와줄까?" 그렇지만 너는 이 피아노를 밀지도 못하는 걸. 큰아이는 몸을 피아노에 붙이고 영차영차 용을 씁니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옮겨?" 그러게 말야. 피아노는 두 사람이서 날라야 하는데 혼자서 하자니 아주 죽겠는걸.

겉그림
 겉그림
ⓒ 세계사

관련사진보기

온통 나무조각으로 이루어진 피아노이니 무거울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끝끝내 옮기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톡톡 쓰다듬으면서, 새롭게 기운을 내 봅니다. 얘 피아노야, 마루를 살살 굴러서 옆방으로 가 보자. 우리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곧바로 피아노를 보며 '아침에 즐겁게 노래 한 가락 치면서 열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렴, 하고 속삭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 큰아이한테 말합니다. "오늘은 이만큼만 하고 이튿날 마저 해야겠네." "그럼요. 오늘 아버지 피아노 나르느라 힘들었잖아요. 다 알아요."

'사진은 /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영정이고 / 權威를 획득하게 된다' (사진)

'미친 개나리인 줄 알았더니 / 개나리 비슷한 안 미친 식물이었다 / 그 식물께 미안했다 // 남녘 어딘가에 개나리가 피었다는데 // 내 나이가 47인지 48인지 몰라 / 물어보았다' (미친 개나리)

맑은 마음이 되어 살림을 꾸리는 밑힘이라면 언제나 '우리 아이들'이지 싶습니다. 예부터 집집마다 아이들이 참으로 많았어요. 예부터 집집마다 손수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지었어요. 그 많은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어떻게 옷이며 밥이며 집이며 손수 지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잘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문화와 삶터가 모두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스스로 건사하면서 살림을 꾸리는 동안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몸을 쓰는 힘'으로 살림을 거들지 않아도 언제나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쓰는 마음이야말로 어버이나 어른이 새롭게 기운을 내도록 북돋우는 밑바탕이 됩니다.

김영승 님 시집 <화창>(세계사, 2008)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하늘이 맑게 개고, 사람들 마음속이 맑게 갭니다. 하늘이 맑게 갠다는 말은, 구름이 가득 끼어 찌푸리던 하늘이 새롭게 열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이 맑게 갠다는 말은, 온갖 근심에 걱정에 시름에 짜증에 골부림이 가득하던 마음속이 새롭게 트인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없어질까 // 천국이니 지옥이니 / 무인도니 // 관념의 공간들은 이미 / 가득 차 // 갈 곳도 없구나' (병술 대보름)

'大地는 地雷를 大洋은 / 魚雷를 // 수용한 적도 / 생산한 적도 / 없다 地雷는' (지뢰밭의 괴뢰)

시를 쓰는 김영승 님은 시를 쓰면서 이녁 마음속에 깃들던 구름(근심이든 걱정이든 짜증이든 골부림이든)을 하나씩 걷어냅니다. 구름 하나를 걷어내도 다른 구름이 아직 남고, 이 구름을 걷어내니 저 구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름 걷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구름이 자꾸 찾아들면 그때그때 다시 구름을 걷어내면 되어요. 맑은 하늘을 바라면서 구름을 걷어냅니다. 맑은 마음이 되기를 꿈꾸면서 시름이며 아픔을 걷어냅니다.

언제나 스스로 거듭나려고 애씁니다. 언제나 스스로 노래하려고 목청을 틔웁니다. 남이 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할 일입니다. 남이 불러 줄 수 없는 삶노래입니다. 스스로 부르면서 살림을 짓고 삶을 가꾸는 노래입니다.

행주를 빨아 마당에 널 적에 아이들을 부릅니다.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은 서로 널겠다면서 애씁니다.
 행주를 빨아 마당에 널 적에 아이들을 부릅니다.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은 서로 널겠다면서 애씁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아들이 갖고 놀던 / 노란색 반투명 플라스틱 물총 // 기관단총 같은 물총도 있었고 / 물총은 수십 개였으나 // 다 버리고 하나 남은 물총 // 이제 이 물총은 / 나의 취미' (물총)

'할머니들은 / 여기가 어디예요? / 잘 묻는다 // 그 불안한 표정은 / 어머니다' (지게)

작은아이가 자다가 발로 아버지를 걷어찹니다. 끄응 하고 잠을 깨며 손을 뻗습니다. 틀림없이 이불도 걷어찼을 테지. 맞습니다. 작은아이는 잠꼬대를 하며 까르르 웃습니다. 뭔 놀이를 하는데 잠자리에서도 이렇게 날아다닐꼬. 제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아버지 이불을 빼앗으려 합니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너 말이야, 발로 차고 이불도 뺏으면 어떡하니.

부시시 일어나서 작은아이 이불을 찾아서 덮어 줍니다. 작은아이는 제 이불이 몸에 덮이자 이 이불을 꼭 끌어당깁니다. 네 이불 찾았지?

얼마쯤 지나니 큰아이가 두 발을 내 몸에 올립니다. 너는 또 무슨 잠꼬대를 하느냐. 너는 네 꿈나라에서 어떤 신나는 놀이를 하느냐. 아이들이 발로 차든, 아니면 저희 발을 내 몸에 올리든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손을 뻗어서 이 아이들이 이불을 잘 덮는지 살핍니다. 누운 채 팔만 뻗어서 이불깃을 여밀 수 있으면 이렇게 하고, 누운 채 할 수 없으면 부시시 일어나서 깜깜한 방을 밤눈을 밝혀서 이불을 찾아냅니다.

'옛날 술 한창 마실 때 / 하도 잘 부러뜨리고 깨뜨리어 / 제일 싼 걸로 고른 것인데 // 아들은 그 안경을 멋있어 한다 자기도 / 똑같은 것을 썼다' (안경)

'총이 있으면 쏘고 싶어진다 / 자지가 있으면 // 그러니까 없애야 한다. // 자지를 가지고 장난한 세월이 / 벌써 몇 년이냐 / 질리지도 않냐' ('동전'으로 가지 말자)

김영승 님이 노래하는 이야기에는 김영승 님이 나고 자란 삶이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젊은 날 모습이 드러나고,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삶이 드러나며, 곁님하고 어깨동무하는 나날이 드러납니다.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어요. 은유나 비유를 쓰지 않아도 돼요. 한자말을 쓰든 영어를 쓰든 대단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더라도 모두 '노래하는 사람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마디입니다.

아마, 말만 번드레레하게 시를 쓰려고 한다면, 이러한 시는 시조차 못 되리라 느낍니다. 겉보기로 번드레레하게 꾸미려고 한다면, 이러한 글은 글조차 못 되리라 느껴요.

꾸며서 부르는 노래는 귀가 따갑습니다. 억지로 꾸며서 추는 춤은 눈이 아픕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라면 가락이 틀리거나 셈여림이 어긋나더라도 마음을 찡하게 울릴 만합니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눈물이나 웃음을 부르는 노래라면 엇박자가 되더라도 가슴을 쩌렁쩌렁 울릴 만해요.

자는 옷 바지에 뚫린 구멍을 기우는 큰아이. 밑판만 제가 살짝 잡아 주고 나머지는 아이가 스스로 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짓는 살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자는 옷 바지에 뚫린 구멍을 기우는 큰아이. 밑판만 제가 살짝 잡아 주고 나머지는 아이가 스스로 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짓는 살림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 최종규

관련사진보기


'여고생들은 참 너무 예쁘다 / 가장 예쁜 나이이다 / 내가 예수라면 / 저 전철에 앉아 있는 / 여고생들을 보라 / 그렇게 말하겠다' (三美神)

문득 생각해 보니, 1982년에 인천에서 첫발을 뗀 야구단 이름인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삼미'는 한자로 '三美'로 적었습니다. 이 야구단이 경기를 벌인 곳은 도원야구장(또는 숭의야구장)이었고, 이 야구장 옆에는 중앙여상이라는 여고가 있고, 이 여고 옆에는 광성고라는 남고가 있습니다. 나는 이 학교들하고 야구장하고 퍽 가까운 신광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날마다 야구장에 걸어가서 놀았습니다.

어릴 적을 떠올리니, 남고생이 무리지어 지나갈 때면 무서워서 다른 골목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무렵 국민학생한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은 거의 다 깡패처럼 보였고, 국민학생 주머니를 터는 중·고등학생이 몹시 많았어요. 어떤 동무는 야구장으로 놀러가다가 야구장갑이나 야구공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국민학생인 동무들은 남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하고는 눈조차 안 마주치려고 했습니다. 이와 달리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지나가면 마음을 놓고 그 골목을 걸어갔습니다. 여중생이나 여고생 가운데에도 국민학생 주머니를 털던 깡패가 있었을 테지만, 나는 여중생이나 여고생 깡패를 마주친 적이 없고, 내 동무들도 이런 깡패는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된 남학생도 국민학생이던 무렵 똑같이 주머니가 털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어 예전에 받은 아픔을 똑같이 되풀이할는지 모르지요. 예쁜 나이를 살면서 스스로 예쁜 줄 모르는 셈이라 할 테고, 아름다운 나이를 누리면서 스스로 아름다운 줄 모르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밤 버스는 // 내려줄 데를 내려주고 // 별로 진다.' (밤 버스)

날마다 별이 돋고 집니다. 날마다 해가 뜨고 집니다. 어제도 오늘도 밤별이 잘 보입니다. 구름이 거의 없습니다. 낮에는 시골자락 가을들이 가을볕에 잘 익고 잘 마릅니다.

맑으면서 밝게 갠 가을 하늘처럼 내 마음도 맑으면서 밝은 숨결로 흐르도록 건사하자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몸짓으로 밥을 짓고, 기쁘게 춤추는 손짓으로 우리 아이들하고 신나게 어우러져서 놀자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집을 살며시 덮습니다. 시집을 덮고 두 손에 그림책을 쥡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길 예쁜 그림책을 펼칩니다. 고운 그림에 고운 이야기가 어우러져서 새롭게 흐르는 사랑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덧붙이는 글 | <화창>(김영승 글 / 세계사 펴냄 / 2008.6.30. / 6000원)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화창

김영승 지음, 세계사(2008)


태그:#화창, #김영승, #시읽기, #문학읽기, #삶노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