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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대전시민아카데미'는 20~30년씩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해 온 이 땅의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연속 인터뷰한다. 땀 흘려 일해서 직장과 가정, 나아가 우리나라 경제를 지켜온 그들이 진정한 숨은 영웅들이다. [편집자말]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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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틀목공으로 살아온 30년, 대전 지역 웬만한 주요 건물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이 분야 최고의 베테랑 강석관(59)씨. 그는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한평생에 대해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강씨가 하는 일은 건물 내외벽 콘크리트 타설을 위한 형틀(거푸집)을 만드는 일이다. 건물 규모에 따라 짧게는 1~2일, 길게는 수개월 이상 건설현장에 투입되어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 지난 30년 동안 그의 손을 거쳐서 완공된 건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현재 그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거사리 일대에서 진행되는 국방대학교 이전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10여 명의 팀원들과 함께 철근과 합판 등을 이용해 콘크리트를 붓기 위한 형틀제작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6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현장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공사현장 한쪽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강씨는 한창 공사 중인 한 건물 내부로 안내했다. 동료들은 점심식사 후 잠시의 휴식을 위해 곳곳에 자리하고 누운 상황. 그도 안전모를 벗고 편안한 자세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하고 싶은 말 참 많아요, 제가 20년만 젊었어도..."

인사말을 건네고 채 질문도 던지지 못했는데, 그가 답답한 심정을 풀어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지금 우리 사회가 후퇴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후퇴하고 있어요. 옛날 박정희 대통령 시절처럼 먹고 살기만 하면, 배만 채우면 되는 시절이 아니잖아요. 경제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정말 서민들은 여전히 살기 힘들어요. 옛날 옛적 양반과 상놈이 존재하던 시대처럼, 서민들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계속 힘들잖아요.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는 우리사회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적 부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서민들은 늘 밑바닥에서 맴돌아야 하고, 가진 자들에게 종속되어 살 수밖에 없다며 이러한 사회적 '구조악'을 깨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지난 2006년부터 건설노조활동을 시작했고, 지금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20년만 젊었으면 목숨 걸고 하고 싶다는 일은 바로, 노동운동, 사회개혁운동이었다.

"그런데 사실 다 내 맘 같지가 않아요. 노동자들이 더 힘을 합치고, 뭉치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그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자식새끼들 교육도 시켜야 하고...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해요, 나라도 열심히 해야지."

그는 현재 건설노조를 만들고 확대하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노조를 통해 건설현장의 부조리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시행사에서 원청으로, 다시 원청에서 단종건설사로, 그리고 다시 각 분야별 팀장으로 내려오는 '다단계 하청'은 부실공사로 이어지는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노조를 통해 원청이 현장노동자를 직고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사짓다 농한기에 손 댄 건축일이 평생직업으로...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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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건축일을 시작한 것은 27살 때였다.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를 맞아 아는 분의 소개로 목포 건설현장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 때는 목수의 '목'자도 모르면서 망치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했죠. 그런데 갑자기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고 해서 나라가 난리가 났고, 세상이 하도 시끄러우니까 부모님이 올라오라고 해서 일하다 말고 집으로 올라갔죠. 그리고 6개월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강남터미널 앞 아파트 현장에서 일했는데, 전두환이가 총 쏘고 그래서 쫓기다시피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고향에 내려온 그는 소도 키워봤고, 양계장에서 일도 해 봤지만 모두가 신통치가 않아 다시 공사현장을 찾게 됐다. 대전 공사현장을 주로 돌아다닌 그는 변해 버린 지금의 대전에 그의 손때가 묻어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30년 전 대전은 거의가 다 논밭이었어요. 지금은 신도시가 됐지만, 노은지구나 도안신도시도 다 밭이었고, 그 전에는 둔산동이나 중리동, 판암동 등 그런 곳 모두가 허허벌판이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큰 도시들이 되었으니 세월이 참 빠르죠."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때마다, 신도시가 개발될 때마다 그는 그 현장에서 일을 했다. 대전 중심부의 주요 건물은 물론 외곽지역의 신도시 아파트 건설현장 등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현장을 다녔다.

때론 타 지역 현장에서도 일을 해야 했다. 서울, 부산, 울산, 포항, 춘천, 목포, 천안, 청주 등 수 많은 도시의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다.

"그런 현장에 나가면 보통 4~5개월 정도 일을 하죠. 그런데 나이 먹어서 객지 가 있으면 정말 외롭고 힘들어요. 그래서 마흔다섯 넘고서는 웬만하면 객지 일은 안 가려고 하죠."

'가족들과 떨어져 있어서 더 힘들었겠다'고 묻자 그는 "나도 힘들고 가족들도 힘들고, 정말 못할 짓"이라고 말했다.

"애들이 어떻게 크는지도 모르고 시간이 흘러 벌써 큰 애가 서른 둘, 둘째가 서른이에요. 딸만 둘인데 시집갈 생각을 안 하네요. 허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너무 가정을 등한시한 것 같아요. 딸들에게도 더 좋은 아빠, 더 자상한 아빠가 되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아이들이 어릴 때, 그리고 사춘기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는 그는 언젠가는 딸들이 너무 보고싶어 현장에는 거짓말을 하고 짐을 싸들고 올라오기도 했다고 한다.

"울산에 있을 때인데, 한 번은 너무 애들이 보고 싶은 거예요. 애들하고 살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데 이게 뭐하는 건가 그런 마음이 들고 해서 울컥한 마음에 그냥 짐 싸들고 올라와 버렸어요. 현장에는 나 몸이 안 좋으니 몸 좀 만들어서 와야겠다고 하고서..."

그래도 부모에게 걱정 끼치지 않고 커 준 딸들이 너무 대견하고 고맙다고 했다. 지금은 딸들과 단체카톡방을 만들어 수시로 수다를 떠는 친한 부녀 사이로 지내고 있다. 딸들과 가끔 술 한 잔을 하기도 하고, 옛날 얘기도 나눈다.

그런 딸들이 지금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강씨가 처음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아내는 반대했다. 그러나 딸들은 달랐다. 딸들이 '왜 가입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이러한 건설현장의 문제를 바꿔보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딸들은 '아빠가 하시고 싶은 일이라면 하시라'고 힘을 보탰다. 그 덕분에 아내도 결국 마음을 돌렸다.

"요즘 젊은이들 너무 불쌍해요"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가 동료들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가 동료들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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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우던 강씨의 얼굴이 이내 굳어졌다. 요즘 청년들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그의 둘째딸의 직업은 '임상병리사'다. 개인병원 직원으로 일하는 둘째는 박봉에 장시간 근로를 하고 있다. 그런 딸을 지켜보는 아빠로서 늘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우리나라 현실이 그렇잖아요? 요즘 젊은이들 갈 데가 없어요. 취직하기도 너무 힘들고, 겨우겨우 취직해 봐야 '비정규직'이고... 너무 불쌍한 것 같아요. 요즘 정부는 정규직 아버지 월급 줄여서 자식들 취직시킨다고 헛소리를 떠들고 있는데... 그게 말이 돼요? 일자리 만든다고 해 봐야 맨 비정규직이고..."

그는 지금의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을 교체해야 하는데, 국민들이 찍어줬던 사람 또 찍어주고, 또 찍어주니까 바뀌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그는 언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해 줘야 국민들이 변할 수 있다며 제발 소명을 다해달라고 부탁했다.

형틀목공에게 다치는 일은 일상이다. 그도 수도 없이 많이 다쳤다. 못에 발이 찔렸는데 염증이 나 고생을 해야 했고, 합판에 손이 찢어지며 한 달을 쉬기도 했다. 항상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하는 고된 직업이지만, 진짜 힘든 것은 따로 있다고 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사실 괜찮아요. 가장 힘든 것은 일하고 돈 못 받아서 집에 못 갖다 줄 때가 가장 힘들죠. 저는 도급팀장을 했었으니까 어떤 때는 제 돈으로 일꾼들 일당 주고, 전 빈주머니로 돌아가는 일도 많았죠. 그런 일도 집사람과 싸우기도 했었고요."

"또 일이 없으면 힘들어요. 동절기나 장마 때 그런 때는 일이 없는데,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면 그렇게 힘들어요. 눈치도 보이고... 그래서 나 일 있다고 하고 나와서 밖에서 돌아다니기도 많이 했죠. 드라마에서 명퇴(명예퇴직)당한 가장이 공원에 앉아있는 장면처럼요."

그래도 그는 목공으로 살아온 지난 30년을 후회하지 않는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살려온 이 땅의 노동자로서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특히, 자신의 손을 거쳐 간 건물을 바라 볼 때면 '저 건물도 내 손으로 지었는데...'하는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대전 시내 돌아다니다 보면 제가 하루 이틀이라도 거쳐간 건물들이 엄청 많아요. 그런 건물들 보면 뿌듯하기도 하고 자부심이 생기기도 해요, 어쩌면 그런 자부심이 지금까지 살아온 힘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래서 이 직업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목수일 배우려는 젊은이 없어... "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가 동료들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형틀목공 노동자로 살아 온 강석관(59)씨가 동료들과 함께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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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만 그는 '건설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불만'이라고 했다. 건설현장에서 법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천한 직업으로 인식되는 것은 문제라는 것. 특히,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더욱 그를 안타깝게 한다고 했다.

"참 가슴 아픈 일이죠. 지금 건설현장에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이 없어요. 목수일 배우려는 젊은이가 어디 있어요. 현장에 가 보면 이제는 다 외국인 근로자들이에요. 앞으로 몇 십 년만 지나면 아마도 우리나라는 건물 하나 제대로 지을 줄 모르는 나라가 될지 몰라요. 집 한 채를 짓는데도 기술력이 없어서 외국인들 힘을 빌려야 할지 몰라요.

그러니 더 늦기 전에 건설노동자들에 대해 법적인 보호도 제대로 해 주고, 하도급으로 인한 부조리도 근절하고, 처우도 개선하고 그렇게 해서 젊은이들이 건설현장에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죠. 그 터전을 만드는 일을 저와 제 (노조)동료들이 지금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년이년 예순이 되는 그는 아직도 청춘이다. 건설현장을 바꾸고, 사회구조를 바꾸어 젊은이들에게 꿈을 주고 싶은 열정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젊은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바꾸고 싶다'이다.

"이제 좀 바꿨으면 좋겠어요. 서민들도 좀 잘 살 수 있게..."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노동자, #형틀목공, #건설노조, #건설노동자, #건설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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