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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중공업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지난 9~11일 자신들이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일본 나고야를 찾아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오마이뉴스>가 한국 언론 중 유일하게 할머니들의 일본 일정을 동행취재했다. [편집자말]
미쓰비시 중공업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10일 오전 자신들이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인근의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 기념비'를 찾았다. 양금덕 할머니가 추도비에 적힌 도난카이 지진 조선인 피해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 여기 적혀 있어요 미쓰비시 중공업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10일 오전 자신들이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인근의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 기념비'를 찾았다. 양금덕 할머니가 추도비에 적힌 도난카이 지진 조선인 피해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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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지껏 살아남아 오늘 너희들 보러 나고야까지 왔다. 미안허다. 인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랑가 모르겄다."

지난 10일 오전, 일본 나고야 남쪽에 위치한 메이난후레아이(名南ふれあい) 병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양금덕(86) 할머니가 병원 주차장 한 켠에 놓인 비석 앞에 흰 국화 한 송이를 내려놨다. 이동연(85) 할머니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비석에 적힌 이름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崔貞禮(최정례)' 세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이 이름이 내 친구여"라고 소리를 내질렀다. 이내 할머니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일제강점기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이 광복 70주년인 올해, 다시 피해 현장을 찾았다. 양금덕, 이동연, 김성주(85) 할머니와 김중곤(91, 피해자 오빠·남편) 할아버지는 10일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와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 기념비를 찾아 회한의 세월을 떠올렸다.

15세 소녀는 이제 아흔을 앞둔 할머니가 됐다. 할머니의 세월은 혹독한 강제 노역, 배고픔과 향수, 뜻밖에 만난 대지진, 친구를 잃은 아픔, 해방 후 겪은 설움 등으로 촘촘히 새겨져 있다.

나고야로 떠나기 위해 9일 인천국제공항에 모인 양금덕, 이동연, 김성주 할머니(왼쪽부터)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나란히 앉은 세 할머니 나고야로 떠나기 위해 9일 인천국제공항에 모인 양금덕, 이동연, 김성주 할머니(왼쪽부터)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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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사는 양금덕, 이동연 할머니와 안양에 사는 김성주 할머니(왼쪽부터)가 9일 나고야로 떠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오랜만에 만난 세 할머니 광주에 사는 양금덕, 이동연 할머니와 안양에 사는 김성주 할머니(왼쪽부터)가 9일 나고야로 떠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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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2시간 페인트칠... 이후로 냄새 못 맡아"

일제강점기인 1944년 5월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 주겠다"는 일본인 교장의 말에 속아 나고야행 배에 오른 조선인 소녀들은 '조선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로 끌려 온 13~16세 소녀들은 총 290여 명(전남 138명, 충남 150여 명). 군악대의 성대한 팡파르와 함께 배에 오른 이들은 일본땅에 도착하는 순간 혹독한 노역과 마주하게 된다.

소녀들은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오후 6시까지 손이 쩍쩍 갈라지는 고통을 참으며 군용기를 국방색으로 물들였다. 점심시간 30분을 제외하고 계속된 페인트칠은 소녀들의 몸을 한없이 괴롭혔다. 페인트 자체도 강한 독성을 지녔지만, 점성을 낮추기 위해 쓰는 시너까지 더해져 피부 뿐만 아니라 눈과 호흡기에 문제가 생겼다. 양금덕 할머니는 "밥이 타도 전혀 모를" 정도로 지금도 냄새를 맡지 못한다. 소녀들의 무일푼 강제 노역은 광복(1945년 8월)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70년이 지난 지금 광주에 살고 있는 양금덕, 이동연 할머니와 9일 오전 8시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만났다. 두 할머니 그리고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회원들과 함께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번 할머니들의 나고야행은 일본에서 근로정신대 문제를 다뤄온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의 초대로 이뤄졌다. 양금덕 할머니는 "고마운 일본인들이 초대해줘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슬프기도 하다"면서 탄식을 내뱉었다.

"아직 아베(일본 총리) 놈이나 미쓰비시 놈들 사과도 못 받았는디... 글고 이 나이 먹다보니 이제 마지막이란 생각이 든께 영 슬프고 그래요. 아마 인자 또 갈 일이 없겄제?"

나고야로 가기 위해 9일 오전 8시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버스에 오른 양금덕 할머니가 생각에 잠겨 있다.
▲ 나고야로 출발 나고야로 가기 위해 9일 오전 8시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버스에 오른 양금덕 할머니가 생각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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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4시간 쯤 달리니, 공항에 도착했다. 이동연 할머니는 "나이가 80이 넘은께, 버스 오래타믄 다리가 아파 죽겄어"라며 휠체어로 몸을 옮겼다. 공항에는 안양에 사는 김성주 할머니가 미리 도착해 있었다. 떨어져 산 탓에 오랜만에 만난 세 할머니는 서로 껴안고 얼굴을 만지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러던 이동연 할머니가 갑자기 "박해옥이는 어디있어?"라고 물었다. 광주에 사는 또 한 명의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박해옥(85) 할머니는 출발 전날 집에서 넘어져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광주에서 버스에 오를 때도 이동연 할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는데, 금세 잊어버렸는지 재차 박해옥 할머니를 찾았다. 함께하지 못한 박해옥 할머니는 서툰 맞춤법이지만 정성을 담아 꾹꾹 눌러쓴 편지를 보내왔다.

"이번 기회에 너무나 만나고 싶어 꼭 갈(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너머(넘어)져서 못가게 되여(어) 미안합니다. 맛(만)나는 기회가 다음에 있게 되면 꼭 함(한) 번 보고싶품(싶습)니다. 못보고 하나님 나라에 가면 하늘나라에서 가서 다시 만납시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박해옥 할머니가 나고야 미츠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측에 쓴 편지. 박 할머니는 당초 9~11일 강제징용 현장인 일본 나고야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출발 전날 갑자기 집에서 넘어져 움직일 수 없게 됐다.
▲ 꾹꾹 눌러쓴 할머니의 편지 근로정신대 피해자인 박해옥 할머니가 나고야 미츠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측에 쓴 편지. 박 할머니는 당초 9~11일 강제징용 현장인 일본 나고야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출발 전날 갑자기 집에서 넘어져 움직일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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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나고야국제공항에 도착한 이동연 할머니가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회원들과 공항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있다.
▲ 도와줘서 고마워요 9일 나고야국제공항에 도착한 이동연 할머니가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 회원들과 공항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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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되풀이 안 하도록, 여기 진실을 새긴다"

일본 나고야에 도착한 다음날인 10일, 할머니들은 일찌감치 호텔을 나서 차에 올랐다.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를 찾기 위해서다. 이동하는 동안, 양금덕 할머니는 70년 전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나, 어찌나 배가 고픈지. (밥을) 주걱으로 딱 (한 번) 퍼 주면 서로 더 큰 놈 먹을라고 난리를 치제. 밥도 알랭이쌀이라고 힘아리 없는 쌀 있어. 고놈만 줬제. 한국에서 도둑질해 온 좋은 쌀은 일본놈들이 다 묵고, 우리는 안 좋은 즈그 나라 쌀 먹이고. 긍께 돌아서믄 금방 배고파블제.

그래서 일요일에 일 안 할 때, 김혜옥(2009년 사망)이랑 같이 몰래 빠져나와서 외(오이) 따묵고, 가지 따묵고…. 어느 날은 떨어진 홍시를 주워 먹고 있는디 그 집 일본 아줌마가 오라고 하더라고. '우리가 하도 배가 고파서 그럽니다'라고 하소연했더니 아줌마가 밥을 챙겨줌서 담부턴 남의 것 따먹지 말고 자기네 집으로 오라대. 그래서 한 세 번 갔지? 근데 내 생각에 금방 걸릴 것 같더라고. 걸리믄 얻어 터지고 난리제. 그래서 더는 안 가브렀어. 고마운 아줌마인디 이름도, 성도 못 물어보고 해방돼 브렀제."

추도비가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광기제작소 터 인근에 이르자 양금덕 할머니가 강제징용에 시달리던 70년 전을 떠올리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70년 전 이곳은... 추도비가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광기제작소 터 인근에 이르자 양금덕 할머니가 강제징용에 시달리던 70년 전을 떠올리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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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덕 할머니가 여전히 남아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우주시스템제작소 공장을 차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 차창에 비친 전범기업의 흔적 양금덕 할머니가 여전히 남아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우주시스템제작소 공장을 차창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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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30분 쯤 달리니 너른 공사장이 눈에 띄었다. 양금덕 할머니가 "여그여, 여가 기여! 여그가 전부 공장 지대였고, 여긴 도로였고, 어, 어 저짝이 들어가는 입구"라며 손가락으로 차창 밖을 가리켰다. 할머니는 70년 전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본래 니시보노세키(日淸紡績, 방적회사) 공장이었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는 2차 대전 당시 군용기를 만드는 공장으로 사용됐다. 전쟁 후, 공장 부지는 다시 니시보노세키에 반환됐는데, 이후 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2012년 매각되면서 지금은 다른 건물과 골프연습장, 공사 현장 등으로 채워져 있다. 인근에는 지금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우주시스템제작소가 남아 공장이 돌아가고 있다.

제작소 터 옆의 메이난후레아이 병원 주차장엔 아주 의미있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여기에 진실을 새긴다"라는 일본어 글귀가 새겨진 이 비석은 '도난카이 지진 피해자 추도 기념비'이다. 일본인들이 직접 나서 조선인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해 만든 이 비석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지금껏 소중히 보존되고 있다.

*[나고야의 눈물 하]로 이어집니다.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여기에 진실을 새긴다"라는 일본어 글귀가 새겨진 추도비를 김희용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고문이 카메라에 담고 있다.
▲ "슬픔 되풀이 않도록, 여기 진실을 새긴다"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여기에 진실을 새긴다"라는 일본어 글귀가 새겨진 추도비를 김희용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고문이 카메라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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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70년 전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지금은 다른 건물과 골프연습장, 공사 현장 등으로 채워져 있다.
▲ 세월이 흘러... 공사 중인 강제징용 현장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70년 전 강제징용에 시달렸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터. 지금은 다른 건물과 골프연습장, 공사 현장 등으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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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로 떠나기 위해 9일 인천국제공항에 모인 이동연, 김성주 할머니(왼쪽부터).
▲ 생각에 잠긴 근로정신대 할머니 나고야로 떠나기 위해 9일 인천국제공항에 모인 이동연, 김성주 할머니(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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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근로정신대, #일본, #나고야, #강제징용, #미쓰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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