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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게 선택한 한 가지 쟁점을 자기들의 뜻대로 변화시킴으로써 다른 많은 영역의 쟁점에까지 자동적으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

'프레임'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조지 레이코프는 보수세력이 자신의 의도대로 여론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기술'들을 제시한 바 있다. 위의 설명은 그 중 그가 '전략적 주도(strategic initiatives)'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어떤 하나의 개별적 쟁점을 활용해 자신들의 의도에 맞게 더 큰 의제에 자동적인 영향을 끼치게 만든다는 의미다.

논란된 한홍구 교수의 강연, 실제는 어땠나?

10월 13일, 대다수 언론은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상영된 강연 영상을 문제 삼았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세월호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라는 제목의 강연 영상이다. 포문은 <TV조선>이 먼저 열었다. [TV조선 단독]이라는 머리말을 단 뉴스 제목은 '강남 고교서 "박정희 더 일찍 죽였어야" 수업 ··· 학생 반발'이라 붙였다. 뉴스의 서두를 보자.

10월 13일 TV조선은 [단독]이라는 머리말을 단 채 "강남 고교서 '박정희 더 일찍 죽였어야" 수업 ... 학생 반발"이라는 뉴스를 보도했다.
▲ TV조선 화면 캡쳐 10월 13일 TV조선은 [단독]이라는 머리말을 단 채 "강남 고교서 '박정희 더 일찍 죽였어야" 수업 ... 학생 반발"이라는 뉴스를 보도했다.
ⓒ TV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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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서 편향된 역사 수업이 이뤄져 학생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세월호 선장 이준석에 비유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태어나기 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했어야 한다는 동영상을 보여주고 감상문을 써내라고 한 겁니다."(<TV조선> 10월 13일자 보도)

현직 대통령의 탄생을 막기 위해 전직 대통령을 살해했어야 한다는 취지로 전달된 뉴스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박정희 대통령을 일찍 죽였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한홍구 교수의 동영상"(<동아닷컴> 10월 14일자 보도), "'박정희, 만주서 죽였어야…' 막장 수업 논란"(<채널A> 10월 14일자 보도), "강남 고교 교사 '박정희' 과격 동영상 논란"(<중앙일보> 10월 14일자 보도)이라는 제목의 뉴스를 내보냈다.

10월 15일에 송고된 <조선일보> 기사는 전날보다 강연 내용이 구체화되어 있지만, '주어'가 빠져있다.

"박정희 (남로당 사건 때) 죽여버렸으면 우리 역사가 쬐끔은 바뀝니다. (중략) 박정희 그때 죽여버렸으면 대통령 될 수 없죠. 우리 언니(박근혜 대통령 지칭)는?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거였는데, 살려줬습니다"(조선닷컴. 10월 15일자 보도)

뉴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홍구 교수가 박정희를 박근혜 대통령이 태어나기 전에 살해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사실일까? 논란이 된 부분을 살펴보자. 문제가 된 동영상은 현재 유튜브에 올라 있기 때문에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번에 논란이 된 강연 동영상은 '세월호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한홍구박사)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누구나 쉽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논란이 된 강연 동영상 이번에 논란이 된 강연 동영상은 '세월호를 통해 본 한국현대사(한홍구박사)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누구나 쉽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 화면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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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김창룡)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거든요. 그런데 그때 죽여도 될 사람을 하나 살려줬어요. 남로당이 한국군부에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였으니까 그때 기준으로 치면 뭐 죽여도 여러 번 죽였어야 할 자인데 그 자를 만주에서 같이 놀던 놈이라고. 그놈이 잡히니까 '김창룡을 만나게 해달라.' '김형 나 좀 살려주쇼.' 그랬더니 이제 살려줬어요.

아 그때 딱 죽여 버렸으면 우리 역사가 조금은 바뀝니다. 대통령이 두 자리는 확실하게 바뀌어요. 박정희니까. 박정희 그때 죽여 버렸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죠. 우리 언니(박근혜)는 태어나기도 전이에요. 태어나 보지도 못하는 거였는데 살려 줬습니다. 오늘의 박근혜를 있게 한, 오늘의 박근혜가 있기까지는 뭐 이런 분들의 다 은덕이 있는 거죠."(2014년 11월 한홍구 교수 강연 내용 녹취)

세월호와 이승만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좌편향?

강연의 해당 부분은 1950년 9월 8일 서울수복 이후, 한강 다리가 끊겨 피난가지 못한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엄청난 규모의 부역자 처벌을 자행한 김창룡에 대한 해설 부분이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1950년 6월 27일, <동아일보>는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라고 보도했고, 6월 28일 <조선일보>는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 장하다! 전면적으로 일대 공세'라고 보도했다. 알다시피 모두 오보, 혹은 왜곡보도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6월 27일,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연설 내용을 서울시민에게 방송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27일 새벽 1시 이미 서울을 떠난 후 대전에서 장거리 전화로 녹음한 것이다.

언론의 보도와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연설을 믿은 서울 시민은 28일 새벽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고,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3개월 뒤인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진행된 부역자 처벌에 시달려야 했다. 인민군이 서울에 머물던 3개월 동안 부역혐의로 검거된 사람은 공식통계로만 15만3825명이다.

"가만히 있으라"며 먼저 도망가 버린 세월호 선장과, 자신은 이미 서울을 탈출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안심하고 서울에 가만히 있으라"라는 연설을 방송하고, 피난 못간 서울시민을 부역자라며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한 이승만 대통령을 비교한 것이 좌편향일까?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도 살펴보자. 박정희 대통령은 1948년 10월 일어났던 여순 14연대의 반란 사건 이후 진행된 군내 '좌익 세력 척결' 작업인 숙군 수사 중, 11월 11일 체포됐다. 당시 남로당 최고위급 프락치로 암약하던 박정희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모두 자백하는 동시에 같은 만주군 출신인 백선엽, 원용덕, 김창룡 등에게 적극적인 구명을 시도했다. 한 교수의 강연 요지는 당시 박정희의 지위라면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만주국 출신의 김창룡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 때 김창룡이 박정희를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당연히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너무도 당연하게 박근혜 대통령도 태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이 있기까지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TV조선> 발 기사들은 한 교수가 박정희를 "좀 더 일찍 죽여야 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그려놨다. 

<TV조선>에서 시작된 보도들의 심각성은 이것이 사실 확인이 불명확할 수밖에 없는 '증언'에 기댄 것이 아니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기록된 '영상'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뉴스는 한 고등학생의 제보로 알려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강연 영상을 확인하지 않고 뉴스를 내보냈다고는 믿기 어렵다. 의도성이 의심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1년 전 강연영상, 한달 전 제보를 지금 꺼낸 이유는?

우리나라 최고의 언론사라는 <조선>에서 왜 이런 억지 해설 기사를 쏟아내고 있을까? 가장 의구심을 자아내는 대목은 왜 1년 전의 강연 영상이 지금 문제가 되었느냐다. 해당 강연은 2014년 11월 28일 진행됐다.

또, 고등학생이 제보를 했다는 강연 영상 상영이 이루어진 날은 올해 9월 18일이다. 정말 문제가 있었다면 제보 직후에 문제를 삼았을 것이고, 근거를 확인하고자 했다면 강연 내용에 대해 이처럼 어거지식 해석이 나오기 어렵다.

주목되는 것은 국정교과서 방침의 발표 시점이다.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역사학자 90%가 좌파"발언, 이후 10월 12일 교과서 국정화 방침이 공식 발표된 상황에서 1년 전 영상, 한 달 전 수업 내용이 갑작스레 문제가 된 것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국정교과서 방침이 발표된 12일은 한홍구 교수가 주도해 내란, 학살, 고문, 간첩조작, 부정선거 등 국가권력을 활용해 헌법 가치를 훼손한 진짜 반헌법행위자를 기록하자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가 공식 출범한 날이기도 하다.

15일 들어 조선일보는 강연 논란과 국정교과서 문제를 연결시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 조선닷컴 화면 캡쳐 15일 들어 조선일보는 강연 논란과 국정교과서 문제를 연결시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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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선>이 전후 맥락은 물론 발언 자체도 왜곡한 기사를 내보낸 후, 다른 언론들이 이를 받아쓰면서 이슈가 확산됐다. 일부에서는 <TV조선>처럼 노골적으로 발언을 왜곡해 기사화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비난 영상"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웠다.

대부분 문제의 동영상 강연 장면을 확인했을 테지만, <TV조선>식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은 찾기 힘들다. 그리고 다음날인 15일, <조선닷컴>은 보란 듯이 국정교과서, 좌편향 교사 문제로 메인을 장식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뒤이어 정치권에서 바통을 받았다.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왜 새누리당과 정부가 제대로 된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통해 역사교육을 해야 한다고 하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고,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도 "여기가 대한민국 교실인지, 종북좌파 이념을 세뇌시키는 혁명전사 양성소인지 인민학습궁전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TV조선>에서 시작된 강연 동영상 논란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비롯해 일련의 정국 주도권을 발휘하기 위한 전략적 주도의 일환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가능케 한다. 언론이 주도하는 프레임 전략이 으레 그렇듯, 종국에는 팩트는 사라지고 프레임만 남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문자해독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사실관계조차 왜곡하는 이들이 밀어붙이는 국정교과서가 과연 지금 쏟아지는 보도들보다 더 높은 질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냐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논란이 보여주는 것은 "그래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필요하다"가 아니라 "이래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위험하다"가 될 것이다.

운전수의 급격한 우회전으로, 애꿎은 국민들만 '좌편향' 되고 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한홍구,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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