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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방문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오후 서울공항에 도착, 전용기에 올라 환송객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방문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오후 서울공항에 도착, 전용기에 올라 환송객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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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탁월한 말솜씨를 지녔다고 믿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눈빛으로 제압하고, 침묵으로 지시하는 묘한 재주를 지녔다. '침묵 웅변술'만이 아니다. 그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는' 신비로운 재주도 갖고 있다.

모두가 알듯, 박 대통령은 해외순방을 자주 떠난다. 2013년 대선 여론조작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파문, 2014년 국정원 간첩 조작, 세월호 참사, 정윤회 문건 유출, 2015년 '성완종 리스트'와 국정원 해킹 등으로 지지율이 폭락할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유럽으로, 아시아로, 중동으로, 북미로, 중남미로 떠났다. 

대통령의 순방에는 거의 예외 없이 대규모 기자단이 따라붙는다. 기자들은 순방 당시는 물론, 돌아온 뒤에도 상당 기간을 대통령의 '성과'와 '치적' 보도로 방송, 신문, 인터넷을 요란하게 수놓는다. 이렇게 해서 지지율이 오르면, 대통령은 다시 외국으로 나간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순방의 양상이 좀 달라진다. 이제 '지지 여론'을 업고 큼직한 사건을 터뜨린 뒤 외국으로 피신하듯 떠나는 것이다.

2013년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 당시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었고,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때는 영국에 가 있었다. 일을 저질러 지지율이 떨어져도 떠나고, 지지율이 오르면 일을 저지른 후 떠나는 것이다.

또 '사고치고' 피신하는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과 오얀타 우말루 페루 대통령이 20일 오전(현지시간) 페루 대통령궁에서 단독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15.4.21
 박근혜 대통령과 오얀타 우말루 페루 대통령이 20일 오전(현지시간) 페루 대통령궁에서 단독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15.4.21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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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황교안 총리 후보를 내세운 후 '최악의 공안총리'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대통령은 임명 직후 미국으로 떠나려 했다. 하지만 메르스 전국 확산으로 반대여론이 들끓자 대통령은 울며 겨자먹기로 순방 계획을 미뤘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방미 취소 결정을 반겼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아껴놓은 여행'은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처럼 내 마음을 짓눌렀다. 떠나면서 또 '큰 놈' 하나를 터뜨릴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언론에서 대통령이 '나간다'는 사실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내 마음속에는 근심의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짙은 두려움을 뚫고 '국정교과서'라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박 대통령의 선임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국민이 반대해도 일단 저질러 놓으면 나중에 좋아한다'는 기이한 통치철학을 현 정부에 각인시켜 놓은 지도자였다. 반대 여론이 거셀 때 대처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소나기가 오면 피해야 한다."

잠시 눈치 보며 살피다가 빗줄기가 잦아들면 다시 '저지르기 모드'로 복귀하는 한편, 경찰과 검찰을 풀어 정부에 반대한 국민들을 야금야금, 그러나 끈질기게 손보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통치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그는 소나기를 피하는 법을 알 뿐 아니라, 소나기를 피하기 좋은 곳이 외국이라는 사실까지 아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완전히 도사급이 되어, 기우제까지 지내놓고 사뿐히 비행기에 오르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제 허수아비 여당과 관료들이 '행동대장'으로 나설 차례고, 그 뒷감당은 박복한 국민들 몫이다. 대통령은 고운 옷에 화사한 웃음으로 해외 정상을 만나고, 그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은 동반자가 되어 정상회담을 칭송할 언어를 찾기 바쁘다. 어느 모로 봐도 '정상'이 아니다. 
 
국정화 발표 당일 불거진 재앙들

황우여 교육부장관이 '국정화'를 선언한 12일 바로 그 날, 두 개의 뉴스가 언론에 슬그머니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나는 한국노동연구원 발로 보도된 청년 고용난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2015년 세계 노인복지 지표'(GAWI)가 드러낸 한국 노인들의 형편없는 복지 수준이었다.

이에 따르면, '청년 신규채용은 10년 새 10만 명 감소했고, 일자리 질 악화는 더욱 심각'하며, 한국의 노인복지 지표는 100점 만점에 44점을 기록해, 베트남이나 필리핀보다 낮았다. 더 한심한 것은, 50위에서 60위로 떨어져 일 년동안 무려 10계단이나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이런 위급한 시기에 대통령과 여당이 '한가하게' 교과서 타령이나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대통령이 임기 절반이 지나도록 (제 1공약이었던) '일자리와 복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며, 나머지 임기 동안도 지킬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먹고사는 문제'를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덮는 것, 이것이 '교과서 트집 잡기'의 핵심이다.

'다시 잘 살아보세'를 내세워 집권하고 나서 이제 와서 '이제까지 쭉- 잘 살아왔네'라고 말하는 셈이다. 교과서 국정화는 이명박 정부 이래로 끈질기게 추진되어 온 '여론 길들이기'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지난 정부는 '무더기 종편 허용'과 '공영방송 국영화'를 통한 언론 우경화 작업에 나섰고, 덕분에 참담한 실패 뒤에도 재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현 정부는 다시 권력 재창출을 위해 '포털 길들이기'와 '카카오 감청' 작업을 마무리하고, 뒤이어 '교과서 손보기'에 나섰다. 앞의 것이 '유권자 눈·귀·입 가리기' 시도라면, 뒤의 것은 '집권용 조기교육'에 해당할 것이다.

'우익 교과서 막겠다'는 공안총리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12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올바른 교과서'라고 명칭을 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행정예고 발표를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12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실에서 '올바른 교과서'라고 명칭을 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행정예고 발표를 마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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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국회대정부 질문에서 야당 의원은 '국정 역사교과서가 친일을 미화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을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 이에 대해 황교안 총리는 이렇게 대꾸했다.

"만약 그런 시도가 있다면 내가 막겠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사람들이 4대강 사업이 가져올 수질 오염을 우려하자, '로봇 물고기를 풀면 된다'던 확신에 찬 음성 말이다.

황교안 총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는 국민이 투표로 뽑아놓은 의원과 정당을 '종북'이라며 하루아침에 날려 버린 사람이다. 물론 대통령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여기에는 대선 토론 당시 이정희 의원 입에서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정당 해산'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군말 없이 행한 사람이, '아버지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에 입문했다는 대통령 뜻을 온몸으로 막겠다고? 황 총리는 2009년 자신의 책에 "4·19는 혼란"이고, "5·16쿠데타는 혁명"이라고 썼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총리의 '내가 막겠다'는 호언이 나온 그날, 야당 의원은 그에게 "5·16이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물었다. 그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며 답변을 피했다. 하지만 정말 흥미로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야당 측이 "5·16이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계속 추궁하자, 황 총리는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고 대꾸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거다. 역사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기에, 하나의 시각을 강요하는 국정교과서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검정 체제는 황 총리의 견해가 담긴 책이 오롯이 존재한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다. 이 책은 박정희 집권을 "5.16군사혁명"으로 표기하고 있다.

물론 <교학사> 교과서는 인기가 없다. 수없이 많은 오류와 왜곡으로 인해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국정체제는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지 못할 질 낮은 교과서를 강매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경쟁체제'를 외쳐온 정권이 왜 유독 역사 교과서에는 '독점체제'를 주장할까?

권력은 역사기록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

8일 오후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MBC대주주) 사무실에서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대위' 회원들이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야당대표, 전현직 정치인, 전직 대통령 및 그들의 지지자들까지 공산주의자나 이적행위자로 몰고 있다'며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 사퇴를 촉구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국민을 이적행위자로 매도한 고씨를 공영방송 이사장직에 임명한 책임을 느낀다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즉각 해임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입만 열면 좌경매도" 고영주 사퇴 촉구 8일 오후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MBC대주주) 사무실에서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대위' 회원들이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야당대표, 전현직 정치인, 전직 대통령 및 그들의 지지자들까지 공산주의자나 이적행위자로 몰고 있다'며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 사퇴를 촉구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국민을 이적행위자로 매도한 고씨를 공영방송 이사장직에 임명한 책임을 느낀다면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즉각 해임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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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는 이렇게 말한다. "올바른 역사관"을 위해서라고.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역사일까?

문창극 같은 사람을 총리 후보로 뽑고, 그의 친일 찬양 비디오에 '감동했다'는 이인호 같은 사람을 최대 공영방송 이사로 임명하며, 유권자 절반 가까운 표를 얻은 야당 정치인을 "공산주의자"로 부르는 고영주 같은 사람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로 세우는 권력에게 '올바른 역사'를 독점할 권리를 줘도 좋을까? 

비단 박근혜 정부만이 아니다. 어떤 권력도 스스로 역사를 쓰겠다고 나설 수 없다. 권력은 역사기록의 객체이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은 이해관계 당사자이기 때문에 역사 기록에서 멀리,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이는 왕정 시대조차 왕이 사관의 서술에 개입할 수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국가기록원의 '사관' 설명을 보면, "그대로의 사실을 거짓 없이 그대로 기록(이것을 직필(直筆)이라고 합니다)해야 하기에 권력 앞에 맞서는 용기도 필요했다"며 다음의 예시를 든다. 

"1404년(태종 4년)에 태종은 사냥을 나갔다가 실수로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태종은 급히 일어나서 좌우를 둘러보며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관은 태종이 한 말까지도 사초에 기록했습니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2월 8일(기묘) 4번째 기사."

그리고는 이렇게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이렇게 사관들은 직필의 원칙을 지켰으며, 이로 인해 조선시대의 국왕은 사관의 기록에 언제나 긴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과서 국정화는 왕이 사관 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화의 명분으로 '국민통합'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국정화 문제로 국론분열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국정화가 '통합' 대신 '분열'을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뭘 소심하게 이 정도 가지고 '분열'을 걱정하시는가? 기다려 보시라. 국정화가 시작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를 제 입맛대로 쓰려는 시도가 되풀이될 것이고, 나라는 나뉠 수 있는 대로 나뉘어 난투극을 벌일 것이다.

물론, 얻은 게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데올로기 싸움에 정신이 없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제가 어디로 향하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테니.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게는 더없이 좋은 호시절이 열리는 셈이다. 그래서 현 정부가 국정화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역사를 쓰고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꾀하는 이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우리 국민이 두 번에 이은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뤘을 때, 학교에서는 '군사독재 찬양 국정 교과서'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교과서를 입맛대로 바꿔서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 결여, 무능, 부패를 감추고 계속 집권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들이 '총선 때 보자'나 '역사가 심판할 것' 따위의 손쉬운 핑계로 교과서 국정화 시도를 묵인할 수는 없다. 국정교과서가 몇 년 치의 퇴행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루 다르게 침몰하는 국민의 생존권과 자유는 이런 역행을 감당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역사는 행동의 기록이고, 우리는 이 시간에도 역사를 만들고 있다. 우리의 21세기 역사는 두 번 잇따라 몰상식한 권력을 탄생시킨 과오를 기록할 것이다. 이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우리 국민이 몰상식한 권력의 몰상식한 행태에 침묵했는지의 여부다. 


태그:#국정화,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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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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