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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최대한 짧게 아프다가 죽음은 되도록 자연스럽게 맞이하고 싶어요. 저 스스로도 아프면 되게 비참할 것 같아요."

어떤 노인이 되고 싶나요? 라는 질문에 영숙(가명, 40대 후반, 기혼)씨는 이렇게 답했다. 이러한 답은 영숙씨만이 아니었다. 인터뷰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건강'과 '짐'이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복지팀은 노년/노후 불안의 실체를 구체화하고, 여성의 경험에 기반해 재해석하여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자, 지난 4~6월에 걸쳐 다양한 삶의 조건(결혼여부, 자녀유무, 직업, 국민연금 가입여부 등)에 놓인 13명의 40, 50대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100세 시대,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대표되는 한국사회에서 '노후'는 핫이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돈을 모아 노후를 대비하는 것만이 답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노년은 당장 취업조차 힘든 세대에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고, 경제적 대비를 하지 못한 대다수의 중년들에게는 아플까 봐, 초라할까 봐 불안한 시간이다.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건 철저히 상업화된 담론이다. 인터넷 검색창에 노후라는 단어를 치면 자동 검색어로 따라붙는 자금, 생활비, 실손보험이 보여주듯 상업화된 담론이 강조하는 것은 금융상품을 통한 경제적 대비다. 그리고 그 담론은 더 많은 금융상품을 팔기 위해 필연적으로 노후 불안을 증폭시키고 조장한다.

'돌봄'의 책임, 가족에게만 맡기는 게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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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서 여성이 느끼는 불안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전체 노동시간 대비 소득이 낮고 성별 간 임금 격차가 크고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사회에서, 여성 개인의 노동 소득으로는 노후 자금을 준비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복지제도 역시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현행 국민연금제도가 정규직 남성 노동자와 그 가족을 기본 단위로 설계되어 있으므로 맞벌이 비정규직 여성, 전업주부, 한 부모 여성가장, 1인 가구 비혼 여성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한편으로 겉으로 드러난 현실이 여성이 겪고 있는 노후에 대한 고민을 모두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 불안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여성들의 삶의 결을 담은 이야기들은 부재한 상황이다. 여성들에게 노후는 곧바로 돈으로 직결될까? 만약 경제력이 있다면 문제는 모두 해결될까? 실제로 여성들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불안해하는지, 그 구체성의 부재가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긴 병에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했어요. 처음엔 남편이 걱정하고 돌봐줬지만 지치는 게 보이더라고요. 아, 다시 아프면 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가족 중엔 없겠구나 싶었죠. 국가가 해주면 좋은데 국가가 전혀 안 해주고 있잖아요. 그럼 결국에 가족에게 그 짐이 넘어가는데 그런 짐을 주고 싶지 않아요."  

여전히 가족의 책임으로 남겨지는 노인 돌봄, 그리고 가족 안에서 돌봄은 주로 여성의 몫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투병 경험이 있는 은경(가명, 40대 초반, 기혼)씨처럼 여성들은 아팠을 때 몸의 고통이나 치료비 걱정보다는 돌봐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친구들이 하나둘 나이 든 부모님을 돌보며 사는 것을 지켜보는 정희(가명, 50대 중반, 기혼)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살까지 살고 싶은가요?"라는 질문에 정희씨는 건강하지 않다면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주변에 보니까 오래 산다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더라고. 내가 건강하고 활동할 수 있어야지 목숨만 붙어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지. 100세 시대, 100세 시대 하지만 그게 정말 행복일까? 건강하지 못하고 누워있고 그러면 자식들한테 부담 주고 짐이 되잖아."

현재 아픈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미정(가명, 60대 초반, 비혼)씨의 경험은 더 직접적이다. 특히 비혼인 미정씨의 경우, 흔히 부모 부양은 아들의 역할이라는 기존의 통념과 달리 본인의 몫이 되었다. 그리고 부양하는데 드는 비용을 둘러싼 가족 안의 심리적 갈등과 압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동생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요. 그럼 앞으로 어머니를 부양하는 몫은 제가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요양병원에 모신다고 가정했을 때 그 비용을 제가 전부 감당할 수 있느냐는 거죠. 그래서 이건 어머니 문제기도 하지만 결국 내 문제고 가족의 문제죠. 내가 여력이 되어서 모신다고 해도 동생들에게는 결국 짐으로 남아있을 거고. 편하게 어머니 얼굴 보러 올 수도 없겠죠. 그러면 결국 가족관계는 다 망가지는 거잖아요."

누구나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된다. 몸의 노화로 인해 돌보고 돌봄을 받는 상황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여전히 가족에게만 맡겨져 있다. 하지만 가족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특히 40, 50대 여성들은 그 변화를 가장 현실적으로 체감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부모 부양은 윗세대에게는 의무지만 아랫세대인 자녀들에게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노년을 준비하고 고민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행복한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까? 보험회사의 광고처럼 개인연금을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행복은 가까워지는 것일까? 인터뷰에 앞서 자문을 구한 모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A씨는 우리에게 "보험회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뭘까요? 그건 바로 사람들이 노후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예요"라는 이야기를 건넸다.

다시 말해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두려움 대신 다가올 시간을 새롭게 꿈꾸고 기다릴 때, 노년은 더 이상 없거나 불안한 시간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과 돌봄을 개인이나 가족이 아닌 사회가 함께 부담하는 것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앞으로 한 달에 걸쳐, 총 네 번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기사는 그 첫 번째로 인터뷰를 통해 확인한 건강 불안의 이면과 공적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짚어보았다. 앞으로 이어질 기사에서는 가족을 넘어선 새로운 커뮤니티와 독립, 현재 삶의 연속성 안에서 노년의 시간을 계획하고 꿈꾸는 여성들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노인이 '탑골 공원 할아버지' '폐지 줍는 할머니'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사회 속에서 '나이듦'이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볼 계획이다. 



태그:#한국여성민우회, #노년, #노후, #100세 시대,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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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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