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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등 시민단체들은 13일 오전 대구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서상돈 선생의 행적에 대해 전면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등 시민단체들은 13일 오전 대구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서상돈 선생의 행적에 대해 전면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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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대구에서 처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의 행적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는 국채보상운동의 올바른 재평가를 위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및 관련 인물들에 대한 무분별한 선양사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국채보상운동의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몇몇 소수 인물을 중심에 두고 그들을 영웅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로 서상돈을 부각시키고 마치 지역에서 국권 회복운동의 주역인 것처럼 포장해 무분별하게 선양하고 기리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구시는 지난 2006년 서상돈을 대구의 대표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서상돈 고택을 복원해 대구 근재골목의 핵심 코스로 알리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상돈이 일제 통감부 주도로 설립된 농공은행에 대주주로 참여하고 감사를 맡아 일제의 지방경제 수탈에 도움을 줬다고 지적했다. 당시 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가명을 써 주주로 참여한 대구 농공은행은 진주 농공은행과 합병하고 이후 조선 식산은행으로 재편돼 일제 식민지배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발의한 서상돈 선생. 조선 고종때의 민족운동가로 묘사돼 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발의한 서상돈 선생. 조선 고종때의 민족운동가로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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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중구 서성로에 있는 서상돈 고택.
 대구시 중구 서성로에 있는 서상돈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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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서상돈이 일제가 조선 화폐 정리사업을 할 당시에도 특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던 1907년 통감부 산하 대구 이사청의 재무보좌관이던 가와카미 주도로 일본 신화 20만 원을 무이자로 대부받아 엄청난 규모의 이익을 챙겼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 식민정책을 이용하여 부를 챙기는 이중적 행보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또한 1906년 일본인 야기 마쓰타로와 함께 남산동에 신식 농장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문화재 약탈로 악명이 높은 오구라 다케노스케, 대구읍성을 파괴한 이세와 시즈카 등과 함께 기업을 설립하는 등 대구의 유력 일본인들과 활발한 경제활동을 벌였다고 꼬집었다.

한일 강제합병이 이루어진 이후인 1911년부터 2년 동안 금광과 사금 등 광업 채굴권을 6차례나 따내고 일왕이 주는 포상인 목배도 2차례나 받는 등 친일을 한 행적도 보인다고 주장했다. 특히 2번째 목배는 1910년 말 청주의 일본인 학교 건물을 증축하는데 곡식을 기부하고 받은 공적이라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상돈의 주요 경력으로 거론되는 독립협회 간부였다는 것도 실체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서상돈의 이름이 기재된 독립협회 연약력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부족한 불명의 문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독립협회 초대회장은 해외 망명 중이던 유길준으로, 총재는 흥선대원군으로 잘못 기록됐고, 유배자와 사망자까지 올라 있는 등 오류투성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상돈이 독립협회 간부였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에 있는 국채기념관.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에 있는 국채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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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서상돈의 아들 서병조 또한 박중양, 장직상 등과 함께 대구의 3대 친일파 중 한 명이라는 이유도 들었다. 서병조는 1904년 일어학교를 창립해 일본어 보급에 나섰고 1914년에는 대구부협의회 의원을 거쳐 1924년부터 20년 동안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를 역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3.1운동 직후 조선인 동향을 감시하는 자제단활동과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조선임전보국단과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 대구지부장을 맡아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기도 했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상돈이 공적도 있지만, 자신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일제와 협력한 행적이 곳곳에 드러나는 의혹이 있는 만큼 다른 견해가 있는 민·관·학계에 공동 연구조사를 제안한다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등 시민단체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상돈 선생의 행적을 재조사하고 반민족친일 인사들의 시설물을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등 시민단체들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상돈 선생의 행적을 재조사하고 반민족친일 인사들의 시설물을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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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대구참여연대, 대구경실련 등 18개 단체로 구성된 '서상돈 선생 행적 공동조사 연구와 대구 반민족친일잔재 청산을 바라는 시민단체'는 서상돈의 객관적인 연구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 일방적인 선양사업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또 대구시와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는 전시관에 국채보상운동의 주역으로 소개된 박승직 등 친일인사에 대한 선양을 중단하고 전시물을 철거할 것과 동부교육지원청의 김울산 형상 등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라고 요구했다.

한편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은 대구 광문사 부사장이던 서상돈이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일본으로부터 빌린 국채를 갚자고 제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고종황제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태그:#서상돈, #국채보상운동,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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