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에 울려퍼지는 애국가 지난 10월 9일 오전(한국시간) 쿠웨이트시티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한국 대 쿠웨이트 경기. 울리 슈틸리케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 쿠웨이트에 울려퍼지는 애국가 지난 9일 오전(한국시간) 쿠웨이트시티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한국 대 쿠웨이트 경기. 울리 슈틸리케 감독과 코칭스태프가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 연합뉴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사령탑 취임 1주년을 맞이한다. 축구대표팀은 13일 오후 8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자메이카와 평가전을 치른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10월 10일 파라과이와 평가전(2-0승)에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이후 정확히 1년을 넘겼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해 9월 대표팀 취임 기자회견에서 변화와 실리를 신조로 한국축구의 개혁을 약속하며 처음 등장했다.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핌 베어벡 이후 7년 만에 부활하는 외국인 축구사령탑을 두고 내심 거물급 감독을 기대했던 팬들의 눈높이에는 미치지 못했다. 물론 선수 시절의 명성만 놓고 보면 역대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을 통틀어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만,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정반대였다. 국내 축구 전문가들조차 처음에 "슈틸리케가 누구냐"라며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실패한 전임 감독들처럼 '원 팀'이나 '만화 축구'따위 거창하고 그럴듯한 구호만으로 섣불리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 않았다. 오직 '이기는 축구'를 목표로 하겠다는 슈틸리케 감독의 언어는 소박했지만, 오히려 현실적이고 더 진정성이 있었다.

"축구에 정답은 없다. 어떤 날은 패스축구를 할 수도, 어떤 날은 롱 볼을 펼치는 축구도 할 수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우문현답을 통해 자신의 실용주의적 성향을 확실히 드러냈다.

공정한 경쟁, 승리하는 대표팀, 세대교체

훈련 준비하는 슈틸리케 감독 지난 11일 오후 파주 NFC(축구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자메이카와 평가전을 앞두고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 훈련 준비하는 슈틸리케 감독 지난 11일 오후 파주 NFC(축구대표팀 트레이닝센터)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자메이카와 평가전을 앞두고 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슈틸리케 감독은 부임 이후 1년 동안 자신이 내건 세 가지 약속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첫째는 공정한 경쟁의 부활, 둘째는 최대한 많은 경기에서 승리하는 대표팀, 마지막으로 러시아월드컵을 대비한 세대교체와 한국축구의 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름값에 연연하지 않고 소속팀에서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며 활약하는 선수들을 중용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했다. 전임 감독들도 항상 입으로는 이야기했지만 정작 지켜지는 일은 드물었던 원칙이다. 한국축구의 고질병으로 여겨지던 '이름값'에 대한 고정관념, 유럽파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극복하고 국내파와 해외파, 심지어 1부 리그와 2부 리그도 가리지 않는 무한 '공정'경쟁체제가 부활했다. 이정협, 김진현같이 이전 대표팀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선수들이 과감히 중용되고, 이름값에 비해 나태한 선수들은 배제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좋은 선수들을 찾기 위해서라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아마추어 리그까지 점검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바로 그 당연한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전임 감독들 때문에 무너진 대표팀의 기강과 시스템이, 슈틸리케 감독의 부임 이후 정상화되는 과정의 1년이었다.

이기는 축구 역시 슈틸리케 감독 부임 이후 확실히 달라진 부분이다. 한국축구는 슈틸리케 감독 부임 직후만 해도 브라질월드컵 참사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대표팀에 대한 싸늘한 시선과 부정적인 여론이 만연해있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태극호를 맡고 나서 총 21차례의 A매치를 치러서 15승 3무 3패를 기록했다. 승률은 무려 71%에 달하고 이 기간 한국축구는 36골을 넣고 8실점만 내줬다.

지난 1월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 8월 동아시안컵 우승에 이어 러시아월드컵 2차 예선에서는 4연승 무패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1월 아시안컵 결승 호주전 패배 이후로는 최근 A매치 10경기 연속 무패행진(7승 3무)이다. 슈틸리케 부임 이후 한층 폭넓어진 선수층과 유연한 전술운영을 통한 위기관리능력의 향상은 가장 달라진 대목이다.

더구나 슈틸리케 감독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세대교체에도 상당히 근접했다. 기존의 기성용, 손흥민, 구자철, 이청용 등 이미 대표팀의 주역으로 자리 잡은 유럽파를 기반으로, 권창훈, 정우영, 장현수, 석현준, 이재성 등이 새롭게 가세하며 한층 두꺼워진 선수층을 구축했다. 곽태휘 정도를 제외하면 주전들 대부분이 아직 20대이라 발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고 2018년 러시아월드컵에서는 정점에 설 수 있는 선수들이 많다.

한국축구가 지난 수년간 고민해왔던 난제들을 슈틸리케 감독은 불과 1년 사이에 성적과 리빌딩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가며 성공적으로 한국축구를 변화시켜나가고 있다.

히딩크와 같은 듯 다른 그의 행보

'히딩크 드림필드'에 선 히딩크 감독 지난 5월 8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설봉공원에 마련된 시각장애인 축구장 '히딩크 드림필드'에서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로 개장을 축하하고 있다.

▲ '히딩크 드림필드'에 선 히딩크 감독 지난 5월 8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설봉공원에 마련된 시각장애인 축구장 '히딩크 드림필드'에서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특유의 어퍼컷 세리머니로 개장을 축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슈틸리케 감독의 지지도도 부임 초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역대 토종-외국인 감독을 통틀어 단기간에 이 정도로 두터운 지지와 신뢰를 구축한 사령탑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슈틸리케 감독은 팬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의 최근 업적이 그만큼 두드러지기도 하지만, 1주년 기념식은 천하의 히딩크 감독조차 누리지 못했던 배려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솔직하고 진중한 언행, 독일인 특유의 세심하고 꼼꼼한 지도방식,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키고 마는 합리적인 원칙주의자의 이미지가 자리 잡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대표팀을 넘어 최근 대한민국이 바라고 있는 리더십을 투영하는 존재가 됐다.

슈틸리케 감독은 최근 히딩크 감독과 종종 비교 대상에 오른다. 히딩크 감독은 설명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다. 히딩크 감독 역시 무한 경쟁을 통한 대표팀의 경쟁력 강화, 대표팀 운영시스템의 확충을 통하여 한국축구의 시대적 과제를 완수한 명장이었다. 확고한 축구철학과 뛰어난 추진력은 슈틸리케 감독과 공통점이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의 통솔력이나 당시의 상황은 지금의 슈틸리케 감독과는 전혀 다른 부분도 많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 월드컵 개최국이던 특수한 상황에서 대표팀을 맡았다. 한국은 당시 월드컵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약체팀이었다. 지역 예선을 거치지 않고 오직 본선만을 대비할 수 있었고, 한국축구 역사상 다시 재현되지 못할 파격적인 지원과 권한을 누렸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 대표팀 감독 생활 동안 크고 작은 시행착오도 많았다. 평가전에서 강팀과의 정면대결을 고집하다가 연이어 대패를 당하며 '오대영' 감독이라는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사생활을 둘러싼 구설수와 문화적 차이로 한국축구 및 언론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모든 것을 월드컵에서 증명하겠다"는 초심과 소신을 끝까지 잃지 않았고, 결국 2002 월드컵에서 4강 신화로 증명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에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은 "세계축구로 나아갈 길"을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데 있다.

반면 슈틸리케 감독은 느리지만 더 우직한 길을 선택했다. 히딩크가 핵심을 짚어주는 유능한 과외 선생님이었다면 슈틸리케는 원칙과 정석을 추구하는 담임교사에 가깝다. 히딩크 시절만큼의 파격적인 지원이나 특혜는 없지만, 대신 슈틸리케 감독은 10여 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한국축구를 물려받았다.

히딩크가 단기간에 대표팀의 전력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했다면 슈틸리케는 지역 예선을 거치며 3년 뒤 2018년 러시아월드컵을 목표로 한국축구의 뿌리와 체질을 더 튼튼하게 만드는 더 근본적인 임무를 부여받았다. 카리스마와 쇼맨십이 빼어나고 종종 거침없는 언행으로 구설에도 올랐던 히딩크와 달리,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문화와 정서에 대해서도 존중하고 대표팀 감독으로서 누가 될 만한 언행은 극히 삼가고 있다.

굳이 지도력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보다,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당시 한국대표팀에 필요한 시대적 과제에 부합하는 리더십을 구현하고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단 한 명의 훌륭한 리더가 전체 조직을 얼마나 크게 바꿔놓을 수 있을지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기다.

물론 이미 한국축구에 전설을 남기고 떠난 히딩크와는 달리 슈틸리케 감독의 미래는 아직 진행형이다. 러시아월드컵을 향한 과정은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고 지금 당장 잘 나간다고 해도 고비는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은 1년 6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쳤지만, 슈틸리케 감독으로서는 큰 위기 없이 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팬들 역시 순간의 성과에만 일희일비하지 말고 긴 안목과 여유를 가지고 슈틸리케호를 지켜보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약 3년 뒤 슈틸리케호는 과연 최종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아직 월드컵 본선까지 가는 길조차 무수한 고비가 남아있고, 본선에 오른다고 해도 히딩크 감독만큼의 성과를 재현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4강이냐 8강이냐 하는 결과를 넘어, 지금 슈틸리케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3년 뒤, 4년 뒤의 한국축구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히딩크 이후 이렇다 할 성공사례가 없었던 대표팀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히딩크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성공한 외국인 감독'으로 한국 축구사에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축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