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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해변 한쪽에 오징어들이 꾸덕꾸덕 햇살과 바람에 샤워한다.
 강릉 해변 한쪽에 오징어들이 꾸덕꾸덕 햇살과 바람에 샤워한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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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의 바람은 톡 쏘는 시원한 사이다처럼 기분을 짜릿하고 좋게 한다. 어느 곳을 가도 즐겁다. 그러나 무려 8시간이나 걸려 가야 하는 길이라면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빛과 물빛이 나를 마중 나오며, 솔 향이 가득한 시월의 강릉 앞바다는 다르다. 자유인을 만나러 그곳으로 가는 길은 이 모든 짜증을 날려버린다.

지난 9일 강원도 강릉으로 직장 모꼬지(MT)를 1박 2일로 다녀왔다. 한글날부터 시작하는 황금연휴 기간이라 차가 엄청나게 밀릴 거라고 예상했다. 예상은 현실이 됐다. 오전 7시 경남 산청에서 출발한 차는 강원도 원주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오후 3시가 돼서야 강릉 앞바다에 도착했다.

8시간 걸려 힘겹게 도착한 동해는 톡 쏘는 사이다의 첫 모금처럼 온몸을 짜릿하게 흔들었다. 짙푸른 동해는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세종대왕 때 한글로 엮은 최초의 책 <용비어천가>의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라는 첫 구절이 절로 떠올랐다. 단체사진을 찍어야 하는 조별과제가 주어졌다. 우리 여섯 명은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모습을 담았다.

조별 수행과정이 끝나자 각자 또는 무리를 지어 강릉 경포해수욕장을 거닐었다.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벗 삼아 걸었다. 바다에 뛰어든 앳된 소년도 있었다. 춥지 않느냐는 말에 소년은 무심한 듯 웃었다. 해변 한 쪽에는 오징어들이 햇살과 바람으로 샤워 중이었다.

시월의 강릉, 가는 곳마다 발길을 붙잡혔다

 8시간 걸려 힘겹게 도착한 강릉 앞 동해는 톡 쏘는 사이다의 첫맛처럼 온몸을 짜릿하게 흔들었다.
 8시간 걸려 힘겹게 도착한 강릉 앞 동해는 톡 쏘는 사이다의 첫맛처럼 온몸을 짜릿하게 흔들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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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곳곳에 있는 조형물들은 우리가 걸음을 바삐 옮기지 못하도록 붙잡았다. 액자 모양의 사각 조형물에 들어 간 관광객들이 카메라를 향해 웃는다. 강문마을 송정 해변을 지나 경포 해변으로 가는 길에 생선 지느러미처럼 생긴 하얀색 '강문 솟대 다리'를 건넜다.

다리 아래에는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솟대 형상의 조형물이 있다. 동전이나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경건한 마음으로 던져 원형 안에 들어가면 각종 액운을 막아주고 소망이 이뤄진다고 한다. 이름은 '진또배기 소원성취 조형물'이다. 뭇사람들의 소원이 동전에 담겨 던져져 있다.

가을은 어디로 떠나도 즐겁다. 그렇지만 여름 바다도, 겨울 바다도 아닌 시월의 바다는 짙푸른 바람으로 가득해 시원하다. 해변을 따라 숙박업소와 횟집들이 나란히 자리잡았다. 그 골목을 지나자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바다는 잊었다. 하늘을 담은 경포대 호수가 나온다.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키는 '바우'라는 말을 본 딴 '바우길'을 한가롭게 자전거로 오가는 사람들은 햇살만큼 밝게 웃는다. 나도 호숫가를 걸었다. 호수는 잔잔한 물만 있지 않았다. 습지 공원과 숲도 나온다.

강릉 경포 해변을 따라 숙박업소와 횟집들이 옆으로 나란히 하는 틈 사이 작은 골목을 지나자 좀 전까지 함께했던 바다를 잊게하는 하늘을 담은 경포대 호수가 나온다.
 강릉 경포 해변을 따라 숙박업소와 횟집들이 옆으로 나란히 하는 틈 사이 작은 골목을 지나자 좀 전까지 함께했던 바다를 잊게하는 하늘을 담은 경포대 호수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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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하니 호숫가 숲을 거닐자 허난설헌 유적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작은 다리를 지났는데 다리 이름이 '교산교'다. '교산'은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이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한 모양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허균은 자신의 고향 야산 이름을 따 호로 삼았다. 교산이라는 이름처럼 허균은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교산교를 지나 개울 하나를 더 건넜다. 개울을 건너는 다리는 '난설헌교'다. 허균의 누이이자, 조선 시대 여성 문인으로 이름 높은 허초희의 호를 딴 다리다. 난설헌교에는 거북이 등에 올라탄 홍길동이 조각이 먼저 반긴다. 푸른 소나무 숲이 주는 평안함이 좋다. 500년 솔숲이다.

숲 속 아담한 고택은 허난설헌과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사각사각. 발걸음 옮길 때마다 흙이 토하는 싱그러운 소리가 귀를 맑게 해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소나무는 한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본다. 한없이 싱그러운 솔향이 가득하다.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기 그만이다.

솔숲 가운데 햇살 드는 자리에는 허난설헌·균 남매의 생가가 있다.

"옛집은 대낮에도 인적 그치고/ 부엉이 혼자 뽕나무에서 울어라
섬돌 위엔 이끼만 끼어 푸르고/ 참새만 빈다락으로 깃들고 있네
그 옛날 말과 수레 어디로 가고/ 지금은 여우 토끼굴처럼 폐허되었네
이제야 선각자 말씀 알겠구려/ 부귀는 내가 구할 바 아니라는 것"
-허난설헌의 시 <감우> 중에서

당대에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은 허성과 허봉을 오빠로 두고 허균을 남동생으로 둔 허난설헌은 그 역시 뛰어난 문인이었다. 여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의 흐름 속에도 아버지 허엽이 딸에게 남자와 똑같이 교육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8살 때 신동이라 불리며 중국에서 천재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난설헌도 결혼 생활은 평온하지 못했다.

시 쓰는 며느리를 달가워하지 않은 시어머니는 허난설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 김성립 역시 자신보다 글재주가 뛰어난 아내를 부담스러워 했는지 모른다. 난설헌은 스물 일곱에 용으로 승천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는 시〈곡자>에서 자기 죽음을 예언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에서 차갑기만 해라."

난설헌은 돌림병으로 두 아이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으로 잃었다. 거기에 점점 몰락하는 친정을 바라보며 죽음을 앞둔 그의 마음은 이미 까맣게 태워져 있었으리라.

솔숲에서 만난 '혁명을 꿈꾼 선비'

허난설헌과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500년 솔숲이다.
 허난설헌과 허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500년 솔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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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고 까칠한 소나무 줄기는 하늘로 올라가는 기차인 양 한껏 치솟았다. 시대를 거역했던 '자유인' 허균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이 이 꿈틀거리는 소나무에 서려 있는 듯했다. 자유분방한 기질은 고지식한 성리학만 강요하는 시대에서 용서받지 못했다. 벼슬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좌찬성도 지냈지만 결국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참수되었다.

생가 옆에는 아버지 허엽과 두 남매의 형제들인 허성, 허봉까지 다섯 사람의 시비가 있다. 기념관은 최초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은 물론, 허균의 문학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감수성이 풍부한 시인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혁명을 꿈꾼 선비라는 두 얼굴의 사나이 허균의 일생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허균은 때를 잘못 만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였다.

솔 향 가득한 솔숲에서 자유로운 남매를 만나고, 실개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커피 향 가득한 커피 축제장으로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일곱 해를 맞는 커피 축제에서 시음한 커피만으로도 입이 즐겁고 코가 기쁜 휴식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숙소에서, 노래방에서, 까만 밤바다에서 마시고 또 마셨다. 다음날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택시를 잡아 타고 솔 향 가득한 이곳을 다시 거닐었다. 대관령 양떼 목장으로 가기 전 주어진 자투리 시간이었다. 허균은 "봄이 오면 꿈이 매양 강릉으로 돌아가네"라고 했지만 나는 봄을 기다릴 수 없었다.

한 시간 여를 걸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고 마음은 따뜻해졌다. 내년 봄에는 초당동 순두부를 안주 삼아 용이 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사내에게 술 한잔을 올리고 싶다.

아침이 밝아오자 다시 솔 향 가득한 강릉 허난설헌, 허균 유적지를 거닐었다. ‘봄이 오면 꿈이 매양 강릉으로 돌아가네’ 라던 허균처럼 봄을 기다릴 수 없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다시 솔 향 가득한 강릉 허난설헌, 허균 유적지를 거닐었다. ‘봄이 오면 꿈이 매양 강릉으로 돌아가네’ 라던 허균처럼 봄을 기다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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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해찬솔일기



태그:#강릉여행, #허난설헌,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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