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저녁 늦게 우리는 빈의 호이리게(Heurige)에 도착한다. 호이리게는 자가 생산한 포도주를 파는 식당으로, 빈 외곽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음식과 술을 푸짐하게 대접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우리가 찾아간 식당도 손님들로 초만원이다. 음식 냄새가 정원까지 풍기고, 왁자지껄한 대화로 주변이 시끌벅적하다. 건물에서는 악사들이 연주하는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리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쪽의 홀로 들어간다. 감자와 소시지, 샐러드와 고기로 가득한 접시가 나오고, 개별적으로 시킨 포도주와 맥주가 나온다. 다들 배가 고파서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관광을 하고 다녔으니 배가 고프지 않을 수 없다. 잘츠부르크 동쪽 4개의 호수를 섭렵하고, 멜크 수도원을 속속들이 보고, 이곳 빈까지 왔으니 정말 강행군이다.

호이리게의 악사
 호이리게의 악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음식을 다 먹을 때쯤 두 명의 악사가 나타난다.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더니 '아리랑' '도라지' '만남' 같은 우리 노래를 연주한다. 감동한 사람들이 팁을 주니 더 신나게 연주를 한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연주를 하고 팁을 받아 생활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정착한 집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밤이 되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그러나 내일 일정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 마냥 머물 수는 없다.

9시가 다 되어 우리는 식당을 나와 빈 북쪽 도나우강변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에 있는 파크호텔로 간다. 디자인 호텔이어서 내부 인테리어도 잘 되어 있고 전망도 좋다. 이 주변에 노이부르크 수도원이 있어 도시 이름도 클로스터노이부르크가 된 것이다. 우리는 내일 빈에서부터 부다페스트까지 이동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들 도시에 있는 문화유산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호텔 출발시간이 아침 7시 30분이다. 

쇤브룬 궁전의 역사 찾기

쇤브룬 궁전
 쇤브룬 궁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궁전에서 바라 본 정원과 글로리에테
 궁전에서 바라 본 정원과 글로리에테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아침 일찍 도나우강 서안을 따라 빈 시내로 향한다. 시내로 접어들고 슈피텔라우(Spittelau)를 지날 때 훈더르트바써(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가 디자인한 쓰레기소각장의 굴뚝이 보인다. 그리고 빈 외곽으로 이어지는 221번 도로를 탄다. 우리는 빈 서부역을 지나 쇤브룬 궁전으로 간다. 궁전에 도착하니 오전 8시다. 정문으로 들어가니 현지 가이드가 나와 있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모든 수속이 빨리 끝난다.

우리는 먼저 궁전 앞 광장에서 궁전을 바라본다. 좌우 대칭에 노란색의 바로크·로코코 양식 건축이다. 이것은 1687년 오스트리아 황제인 레오폴트 1세의 주문으로 건축가 피셔(Johann Bernhard Fischer, 후에는 Fischer von Erlach)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베르사유 궁전을 능가하는 건물을 지어 황제 계승자인 요셉 1세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1705년 요셉 1세 때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

1711년 요셉 1세가 죽은 후 황위는 동생인 칼 6세에게 계승되었다. 그리고 1740년 칼 6세는 쇤브룬 궁전을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주면서,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쇤브룬 궁전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제가 되는 1745년부터 1752년까지 건물을 한층 높이고 궁전 내부를 리모델링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건물의 모습이 로코코 양식으로 변화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65년 헤첸도로프(Hetzendorf von Hohenberg)에게 명을 내려 궁전 뒤쪽 정원 언덕에 글로리에테(Gloriette)를 짓도록 했다. 이 건물은 초기 고전주의 양식으로 1772년 완공되었으며, 명예의 전당 겸 궁전과 정원 전망대로 사용되었다. 그 후 1805년부터 1809년까지 쇤브룬 궁전에는 나폴레옹이 머물렀고, 1809년 10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쇤브룬 평화조약이 체결되면서 그가 떠났다.

그러나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제(Marie-Louise)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나폴레옹 프란츠가 1832년까지 쇤브룬 궁전에서 살았다. 프란츠 요셉1세가 황제가 된 1848년부터 쇤브룬 궁전은 다시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고, 그 후 삶의 상당 부분을 이곳 쇤브룬 궁전에서 보냈다. 프란츠 요셉1세는 쇤브룬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칼 1세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18년 황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포기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쇤브룬 궁전도 국가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다.  

'첫 손님'으로 쇤브룬 궁전에 들어가다

쇤브룬 궁전
 쇤브룬 궁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쇤브룬 궁전 투어는 임페리얼과 그랜드 두 가지가 있다. 임페리얼 투어는 개방된 40개 방 중 22개를 보는 투어다. 시간은 30-40분이 걸린다. 요금은 12.9유로다. 그랜드 투어는 40개 방 모두를 보는 투어로 50~60분이 걸린다. 요금은 15.9유로다. 가이드가 해설을 하면 요금이 18.9유로다. 우리는 이 중 22개 방을 보는 임페리얼 투어를 선택한다.

그리고 정원까지 포함하는 투어는 클래식 패스와 골드 패스 두 가지가 있다. 클래식 패스는 그랜드 투어에 글로리에테, 황태자 정원, 오렌지 정원, 미로 정원을 포함한다. 시간은 3~4시간 걸린다. 요금은 21유로다. 골드 패스는 클래식 패스에 동물원, 마차박물관, 슐로스 호프(Schloss Hof) 등을 포함하는 투어다. 슐로스 호프에 가려면 셔틀버스나 기차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골드 패스는 하루 정도 여유 있게 시간을 잡아야 한다. 요금은 49유로다.

우리는 궁전 성당 앞쪽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푸른색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올라간다. 관광객이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 2층이기 때문이다. 궁전은 'ㄷ자' 형태의 건물로, 동쪽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주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가운데는 접견실과 회의실,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서쪽은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와 그의 부인 엘리자베트의 거주공간이었다.

쇤브룬 궁전 평면도
 쇤브룬 궁전 평면도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현지 가이드를 따라 궁전 중간에 있는 갤러리와 접견실을 먼저 보고, 나중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주공간으로 이동한다. 궁전 평면도에서 21번 대 갤러리에서 출발, 31번까지 남쪽 방을 먼저 살펴보았다. 그리고 32번부터 36번까지 동쪽 방을, 37번부터 39번 까지 북쪽 방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도 더 자세히 살펴본 방이 큰 갤러리, 접견실 겸 회의실, 중국실, 프란츠 칼의 서재와 접견실이다.

이들 공간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프란츠 1세(슈테판) 황제 그리고 그들의 16명 자식들 삶의 자취가 남아있어 더욱 흥미롭다. 큰 갤러리(Grosse Galerie: 21번)에 들어가니 흰색 벽에 금칠 장식을 한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거울, 장식, 천정의 그림 등에서 로코코 양식의 정수를 볼 수 있다. 천정에는 구그리엘미(Gregorio Guglielmi: 1714-1773)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고, 벽의 한쪽에는 궁중 조각가 메써슈미트(Franz Xaver Messerschmidt: 1736-1783)가 만든 마리아 테레지아의 청동 조각상이 서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큰 갤러리
 큰 갤러리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이 갤러리는 폭이 10m, 길이가 40m나 되어서 큰 갤러리라 불린다. 축제, 무도회, 접견, 회의 등 궁중의 큰 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궁전이 국가에 귀속된 1918년 이후에는 연주회가 주로 열렸다. 그리고 1961년 미국 대통령 케네디와 소련의 국가 원수 흐루시초프가 이곳에서 회담을 했다. 이때는 미국과 소련의 헤게모니 분쟁으로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다. 당시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동서 양 진영의 대표가 만나는 회담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큰 갤러리를 나온 우리는 작은 갤러리(22번)를 지나 중국방(24번)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중국식 캐비닛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18세기 유럽에는 중국과 동양 예술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그 결과 중국식 자기와 가구를 방에 배치하곤 했다. 이 방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회의실 겸 휴게실로 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여성의 승마경기 그림이 있는 카루셀방(Karussellzimmer: 25번)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3년 궁중 승마학교를 세웠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다. 이 방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알현하기 위한 대기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을 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다음으로 간 곳은 세리머니홀(26번)이다. 이곳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가정의 사적인 행사들이 열렸다. 세례, 생일잔치, 미사 등 일상적인 일부터 축제, 연주회에 이르기까지 좀 더 큰 행사도 열렸다. 이곳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문한 5개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요셉(2세)과 부르봉 왕가 출신의 이사벨라(Isabella von Parma)의 결혼 장면이다. 이 그림에는 벨베데레궁에서 호프부르크궁으로 이동하는 신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는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이 걸려 있다.

28번 푸른색의 중국방부터는 좀 더 사적인 공간이다. 이곳 벽에는 중국풍 벽지가 발라졌고, 중국제 도자기와 가구가 전시되어 있고, 의자 천에도 중국식 수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1918년 11월 11일 오스트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황제의 권한을 공화국에 넘기는 조인식이 열리기도 했다. 그 비운의 마지막 황제가 칼 1세다. 그 옆에는 비유-라크방(Vieux-Laque-Zimmer: 29번)과 나폴레옹방(30번)이 있다.

궁전에서 바라 본 황태자 정원
 궁전에서 바라 본 황태자 정원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비유-라크방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1765년 죽은 남편 프란츠 1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방이다. 갈색 호두나무에 검은색 칠을 한 벽에 그림을 그리고 금칠을 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숭고하고 엄숙하다. 이곳에는 사후에 그린 프란츠 1세 초상화가 있다. 나폴레옹방은 이름 그대로 나폴레옹이 1805년부터 1809년까지 머물렀던 방으로, 주로 침실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을 지나 우리는 궁전의 동쪽 방을 천천히 지나간다. 이곳에도 역시 생활용품, 대리석 조각상, 그림 등이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궁전 내부보다 외부의 황태자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쇤브룬 궁전의 동쪽에 바로 붙어있는 황태자 정원은, 황제가의 개인 정원으로 사용되던 것이다. 이곳에는 정원, 분수, 정자가 있다. 특히 녹색 바탕에 흰 줄이 그어져 있는 다섯 개의 정자가 눈에 띈다.

우리는 이제 궁전의 북쪽 방향으로 돌아 마지막 방인 프란츠 칼의 서재와 접견실(38/39번)에 이른다. 이곳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1세, 그리고 그들이 낳은 11명 자녀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마리아는 모두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림을 그릴 당시 14명을 낳았는데, 그 중 세 명이 죽어 11명이었다. 그리고 이 그름을 그린 후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그 중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루이16세의 부인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다. 그녀의 오스트리아식 이름이 마리아 안토니에(Maria Antonie: 1755-1793)다. 이들 그림은 궁중 초상화가 마이텐스(Martin van Meytens: 1695-1770)가 그렸다고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왼쪽)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왼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태그:#쇤브룬 궁전, #임페리얼 투어, #마리아 테레지아, #큰 갤러리, #마리 앙투아네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