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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유쾌한 정치 실험 공동체 '정치발전소'에서 청소년 정치 책 읽기 모임 '청사과' 진행을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몇 년 전 동네에 있는 청소년 공부방에서 고등학생들에게 논술 첨삭을 해주는 봉사활동을 얼마간 하다가 학업과 아르바이트에 치여서 그만둔 일이 생각났다. 그때의 미안함이 떠올라 바로 함께하겠다고 했다.

청사과 팀 첫 회의에서부터 당황했다. 청소년들과 어떤 책을 읽으며 진행할지 논의를 하는데, 고전과 정치학 개론서들이 후보로 올라왔다. 정치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도 읽기 벅찰 것 같은 책들을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우리는 '일단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선정했다. 최종적으로 박상훈 박사의 <정치의 발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세 권이 최종 선정됐다.

청사과 첫 모임을 두어 달 남겨두고 우리는 홍보와 모임 진행방식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와 함께, 선정한 책으로 진행 팀끼리 먼저 세미나를 정기적으로 했다. 회의와 세미나를 진행할 때마다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때 한 사회 선생님은 "신문은 꼭 읽되 정치면은 빼고 읽으라"고 말씀하셨다. "논술에든 뭐든, 너희가 살아가는데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또 고3 때 담임선생님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좋으니 정치만은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때가 벌써 십 년이 다 된 일이니 요즘 학교 분위기는 달라졌을까 하는 기대가 들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인근 학교에 (정치 책 읽기 모임) 홍보 전화를 돌리며 싹 사라졌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그런 정치 책을 읽히기엔 아직 어려요", "고등학생이 그런 걸 왜하나요?"하는 말부터 "여고라서 위험한 분야에는 학생들을 보낼 수가 없겠네요" 하는 말까지 거절 이유는 다양했다. 이전에 내가 봉사활동을 했던, 수능과 논술에 도움이 되는 청소년 공부방 프로그램을 지역 학교에 홍보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이었다.

왜 한국 청소년에게 정치는 '금기'인가

사실 조금만 둘러봐도 아직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것을 알 수 있다. 2008년, 안전성 논란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 정부에 반발해서 역대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가 일어났다. 알고 보면 그 촛불집회는 '0교시 수업 허용'과 '우열반 편성 허용' 등 당시 정부가 추진했던 '학교 자율화 정책'에 반발한 청소년들의 집회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 다수 언론에서는, '전교조 교사에게 선동당한 청소년들이 촛불집회에 나왔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또한 얼마 전 '세월호 집회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얼마의 일당을 받았다'라고 했던 보수인사의 발언 역시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준다.

정치발전소에서 청소년 정치 책 읽기 모임을 기획한 것도 이런 사회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바꿔보자는 이유에서였다. 정치는 청소년들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정치로서 결정한 '0교시 수업 허용'이나 '우열반 편성'도 그렇다. '세월호 사건'은 정치의 무능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비극의 끝을 보여줬다.

이렇듯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한겨레> 신문에 난 청사과 홍보 기사를 보고 다섯 명의 청소년이 모였다.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함께 대화하고 탐구해 나간다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어떤 때는 청소년들끼리 논쟁이 세게 붙어서 진행 팀이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한 적도 있었다. 그중 한 장면을 소개하면 이랬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읽고 토론하던 시간이었다. 불이 붙은 쟁점은, 중학교 2학년 정호의 '언론이 아닌 다른 통로로도 우리가 정치를 접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었다.

정호 : 정치인들이 국민을 많이 안 만나잖아요. 그러니까 직접 만나는 기회를 조금 더 늘리면 좋을 것 같아요.
종석 : 영국 같은 경우는 정치인들이 간담회를 한다고 해요. 근데 어쨌든 정치인은 일이 많고 바쁘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직접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호 : 정치인들이 바쁘다고 했는데요. 정치인은 국민을 위해서 일해야 해서 바쁜 건데, 국민을 만나는 일보다 더 바쁜 일이 뭔지 모르겠어요.
종석 : 정치인이 꼭 국민을 많이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시간에 다른 더 중요한 일들, 법을 만드는 일이나 해결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좋을 수도 있으니까요.
정호 : 그건 정치인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국민 입장에서는 내가 낸 세금으로, 내가 뽑은 사람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게 문제죠.

종석 : 정치인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정호 : 우리가 뽑아주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될 수 없어요. 제 요지는, 대통령은 우리와 급이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거죠. 시민들과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대통령이니까요. 근데 지금 대통령은 왕 같은 존재인 게 문제예요.
종석 :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 받을 수 없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생각해요. 정치인을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 시민들이 스스로 정치인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호 : 왜 국회의원과 시민을 다른 존재로 나누는 거예요?

혜미 : 우리가 목마른 사람은 맞아요. 근데 그 우물을 파기 위해서 대표를 세운 거죠. 아니면 대표를 왜 세워요? 우리가 직접 우물을 파면되죠. 우물을 파도록 대표를 세운 거로 생각해요.
준하 : 국회의원이 만나고 싶지 않으면 안 만날 수 있는 것도 권리라고 생각해요. 자꾸 "옳다, 그르다"를 말하는 것 같은데, 일단 우리가 조직을 결성하고 정치인들이 우리를 만나야만 하게 압박하는 절차를 밟아야죠. 정치인도 사람이니까 좋은 데 가서 사진 찍히고 싶어 하는 거, 저는 이해해요.

'그럼에도 정치는 중요'하다

이런 논쟁을 보고 들을 때마다 우리 진행 팀은 감동했고 동시에 자극도 받았다. 청소년은 어른들이 보는 것처럼 선동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돈 때문에 집회에 나오는 존재도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을 하는 존재다. 문제는 지금까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런 생각을 표현할 기회가 너무 적었다.

정치발전소에서는 오는 10월 17일부터 청소년 정치 책 읽기 모임, '청사과' 시즌2를 진행한다. 작게나마 청소년이 스스로 읽고 생각한 것을 표현할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이다. 참여 대상은 14세부터 19세까지 청소년이다(일정, 장소 등 자세한 사항 및 신청은 정치발전소 홈페이지에서 확인).

이번에 진행할 책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 박상훈 박사의 <정당의 발견>을 선정했다. 마지막 책인 <정당의 발견>을 읽고서는 참여자들과 저자인 박상훈 박사와의 대화도 진행할 계획이다.

또한 현장에서 직접 뛰는 현직 유명 정치인과의 만남도 계획 중이다. 1기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들이 새로운 관점을 갖고 들어와서 기존의 사람들과 대화하며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니 말이다.

끝으로 모임에 참여했던 한 청소년이 박상훈 박사의 <정치의 발견>을 읽고 썼던 감상문의 일부를 적어본다.

"정치는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잘생긴 사람에게나 못생긴 사람에게나, 똑똑한 사람에게나 멍청한 사람에게나 모두에게 평등하다. 또한 정치는 중요하다. 갈등을 민주적으로 풀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위험하다. 국가의 폭력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정치는 강하다. 정의를 바로 세울 수도 있고 무너뜨릴 수도 있다.

정치의 힘은 때로 제압당한다. 바로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정치 혐오에 의해서다. 누구 때문인가? 가진 사람들 때문이다. 시민들의 무관심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불평등하기 때문에 우리의 침묵이 있는 자의 힘을 더 키운다. 경제는 100만 원을 가진 사람이 1만 원을 가진 사람의 100배 큰 힘을 가진다. 가진 자들은 다른 건 무섭지 않지만 국회청문회는 무섭다. 국민의 눈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정치는 중요하다."

<청사과>의 진행 일정
 <청사과>의 진행 일정
ⓒ 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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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정치발전소는 취약한 정당구조 속에서 기존 정당에 흡수되지 못하고 있는 정치 에너지가 모일 수 있는 공동체를 구성하여, 교육·연구·정치적 활동을 통해 대안적 정당정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단체입니다. 홈페이지 http://politicalpowerplant.kr/



태그:#청소년, #정치발전소, #정당의 발견, #청사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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