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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이리 좀 와 봐. 아버지가 할 말 있으시대."

친정 엄마가 우리를 부른다. 설날이라 온 가족이 있다. 언니네 오빠네 그리고 우리 집. 아이들까지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아버지는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걸까? 무슨 이야기를 하실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 긴장됐다.

"아버지가 오늘 너희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냐면 아버지 고향 떠나온 이야기야."

아버지 고향은 이북이고, 고향을 떠난 지는 60년이 지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버지는 한 번도 우리에게 고향 떠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시는 걸까?

처음으로 고향 이야기를 꺼낸 아버지

군사분계선.
 군사분계선.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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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으로 내려오려고 마음을 먹었어. 그런데 길잡이(안내인)에게 줄 돈 2000원이 없는 거야. 당시에는 2000원이면 큰 돈이었어. 아무리 생각을 해도 2000원을 구할 데가 없잖아? 그래서 해주에 있는 삼촌을 무작정 찾아갔어. 삼촌이 해주에서 물고기잡이배를 타고 있었거든.

삼촌을 찾아갔더니 마침 돈 2000원을 주더라고. 아버지 갖다 드리라고. 딱 2000원이었어. 그 돈을 받아서 집으로 왔어. 아버지에게 아무말 안 하고 숨겨뒀지. 그리고 떠나기로 한 날, 새벽같이 길잡이를 만나기로 했어. 새벽에 어머님이 만들어 주신 주먹밥을 먹고, 또 싸 들고 어머니한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어.

그래서 옆 마을로 갔어. 거기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나까지 여섯인가 해. 여섯이 몰려다니면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까 둘씩 짝을 지어 걸어가래. 그러다가 검문을 받으면 저 앞 댐을 수리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하라고 길잡이가 시켰어."

아버지는 새벽녘 삼팔선을 넘으며 머리 위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들었다. 남쪽의 개울에서 얼굴을 씻고 그 물을 마셨다. 그 물맛은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달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동안 파출소로, 경찰서로, 옮겨 다니며 북이 보낸 간첩이 아닌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전쟁통에 가족도 고향도 없는 아버지는 어떤 고생을 하며 그 시절을 버텨냈을까?

"그날 고향 집을 나설 때는 이렇게 오랫동안 고향에 못 돌아갈지는 몰랐지."

그렇게 60년 세월이 흘렀다. 아버지는 불효자가 됐다.

"그래도 돌이켜보니 나는 자식들 다 공부시켜서 시집·장가를 보냈고, 내 집도 한 칸 마련했으니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 그런데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는 불효자야. 동생들에게 미안하고.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렸어야 했던 돈 2000원을 어떻게든 갚고 싶어.

그런데 죽기 전에 가족을 만날 가능성이 없잖아. 그래서 북의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장학재단을 떠올렸어. 우리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을 테니 내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이야 통일이 안 돼서 도움을 못 주겠지만, 통일이 된 날을 생각하며 미리 장학재단을 만들어 두는 거지. 그게 내가 가져온 2000원을 갚는 방법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홀로 삼팔선을 넘은 아버지, "북쪽 가족을 위해 뭐라도…"

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이야기를 왜 하시나 했더니, 장학재단을 말씀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장학재단을 만들려면 최소 5천만 원이 있어야 한대. 아버지가 모아둔 돈이 천만 원 있고 하니, 너희들도 얼마씩 돈을 보탰으면 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좋은 말씀이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고, 아버지는 생전에 고향 가족을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니 북쪽 가족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 싶은 아버지 마음이 헤아려진다.

나는 아버지가 장학재단을 만들고자 하는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취지에 동의했으니 돈만 내면 된다. 우리 형제가 넷이니 천만 원씩 기부하면 된다. 그런데 난 천만 원이 없다. 내가 맞벌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에게 천만 원을 만들어 달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우리 집은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를 가르치는 데도 허덕거리는 형편이 아닌가? 마음이야 찬성이지만, 돈을 만들 구멍이 없으니 선뜻 아버지에게 답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나선다.

"아니, 얘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돈을 내라고 해요. 다 자기 자식 키우기도 힘든데."

누구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시는 엄마가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의아하다. 하지만 그 마음도 잠깐,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자식들 키우기 빠듯한 우리 형제들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엄마는 자식에게 이런 부담까지 지우게 하긴 싫으신 거다. 게다가 사위들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으니 엄마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나? 서먹한 시간이 흐르고 아버지가 이내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신다.

설날 친정 가족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리고 그후 며칠 동안 아버지가 흡족해할 답을 드리지 못했다는 게 죄송스러워 마음이 안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 능력으로는 돈을 만들 구멍이 없었다. 돈 만들려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다섯 살 막내까지 아이 셋을 둔 엄마가 일자리는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움 드릴 방법이 없는 나는 그 일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묻지 못했다. 아버지 혼자 4천만 원을 만드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가 장학재단 만들기를 포기를 하셨으리라 생각했다.

일 년 뒤,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검사하러 간 일이 있다. 검사를 위해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아버지는 벗은 옷과 귀중품을 모두 사무함에 넣으려했다.

"지갑이랑 휴대전화는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아니야. 사물함에 넣으면 돼."
"귀중품은 분실 위험성이 있다고 저기 쓰여 있잖아요."

결국 아버지의 귀중품을 내 가방에 넣었다. 아버지가 검사실로 들어가자 나는 궁금해졌다. 아버지가 나에게 귀중품을 맡기기를 꺼리시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아버지의 통장 집에 있는 통장을 꺼내 펴 보았다. 보통예금 통장엔 적금통장으로 매달 자동이체 된 기록들이 있었다. 팔순이 넘은 아버지에겐 적지 않는 돈이 매달 이체됐다.

아버지가 엄마 몰래 적금통장을 만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장학재단뿐인 거 같다. 이 돈이 장학재단을 위한 돈인지 궁금했지만, 검사를 마치고 나온 아버지에게 물을 수 없었다. 내가 장학재단에 보태드린 것이 없었기에 장학재단에 대해 물어볼 자격이 나에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마 아직 5천만 원을 다 모으지 못하셨을 거다. 어쩌면 아버지는 재단 만드는 것을 포기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금을 넣고 있는 걸 보니 북의 가족을 위해서 돈을 모으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신 거 같다. 아버지 생전에 북의 가족을 만나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해 보인다. 적십자 가족상봉단에 포함될 가능성도 희박하고, 통일이 그리 가까운 미래에 우리를 찾아오지도 않을 거 같다. 그러니 팔순이 넘은 아버지가 부모와 동생들 다 두고 고향 떠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돈을 모으는 것뿐이 아닐까.

난 그 일을 아버지만의 몫으로 놔 둔 것이 죄송스럽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설날과 그 후의 일입니다.



태그:#부모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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