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7화에서 이어집니다.)

K는 김나영이 따라 주는 스트레이트 잔을 받아 향내를 맡으며 천천히 목을 적신다.

"와, 이 술은 무슨 위스키죠? 아주 목 넘김이 부드럽고 향도 좋습니다. 처음 마시는 위스키인데요."

"일본 위스키예요. 산토리라는 회사에서 나온 '히비키 21년'이라는 술입니다. 굉장히 귀하고 좋은 술이에요. 일본 주당들 사이에서도 가끔이나 마실 수 있는."

"역시 다르긴 다르네요. 서울에서 옛날에는 12년된 위스키만 마셔도 감지덕지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17년산으로 업그레이드 됐어요. 일단 오래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그보다 낮은 연수의 술을 더 이상 못 마시는, 뭐 위스키 나이의 하방 경직성이라나 뭐라나 해 가면서요."

김나영과 서울의 술 문화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그녀의 친구가 왔다.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치고는 금융권 관리직에 더 가까운 차림이다. 은행권 보다는 펀드나 파생상품에 관련 있는 사람처럼 더운 날인데도 연회색 싱글 수트에 셔츠, 넥타이에 커프스 버튼과 넥타이 핀까지 갖춰 입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이 레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K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번에 김나영과 함께 TV에서 본 것보다 더 매력적이시다."

이시이는 매무새와 달리 콧소리를 내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조금 거슬렸다. 마치 무엇인가 갖고 싶은 것을 눈앞에 두고 탐내면서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객쩍은 얘기가 오고 갔다. 조금만 더 말대꾸를 해주다가는 더욱 난감한 얘기를 할 것 같아 K가 선수를 치며 묻는다.

"근본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술 문화, 그리고 밤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여쭤보고 싶네요. 그리고 두 나라마다 갖는 특징은 무엇인지도 알고 싶고요."

그러나 이시이는 딴 소리를 한다.

"아이, 뭐가 그렇게 바쁘세요. 꼭 저를 인터뷰하는 기자처럼. 일단 한 잔 하시고 천천히 얘기해요."

K의 잔에 술을 따른다. 술잔은 이시이의 안중에 없다. K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술이 넘친다.

"어머머, 제가 실수를 했네요."

요란을 떨며 물수건으로 술이 흘려진 K의 단단한 허벅지를 문지른다.

"됐습니다. 괜찮아요."

김나영이 이시이에게 눈을 흘긴다.

"이시이, 왜 그래. 엄연히 내가 초대한 손님이야. 딴 생각 절대 하지 마."

"괜히 그래. 알았어."

이시이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시이는 여자도 좋아하지만 남성 선호 취향이에요.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는 마냥 좋아하고, 덤비는 편이고요. 초면에 크게 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아뇨. 뭐."

K는 호모나 레즈비언 같은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를 딱히 싫어하지 않는다. 이해하는 편이다. 그들 자신도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K 자신의 취향은 아니라 이시이의 행동이 편하지만은 않다.

"그럼, 지금부터 아까 제게 물었던 것에 답해 드릴 게요. 김나영씨의 이 업소는 조금 논외가 되겠네요. 아마 일본에서 상위 1% 내에 있는 사람들만 오는 아주 비밀스러운 최고급 술집이니까요. 게이샤가 나오는 요정은 좀 개념이 다릅니다. 게이샤가 나오는 데는 아무래도 노년층 손님이 많죠. 당연히 옛날 자신들의 화려했던 날들을 회상하며 자위하려는 손님들이죠.

하지만 이곳은 최상의 술과 여자, 그리고 최고의 손님이 환상적인 분위기에서 즐기는 그런 곳입니다. 돈만 많다고 올 수 있는 곳도 아닌 회원제 업소이고요. 사실 요즘 일본의 밤은 재미없어요. 한국이 더 훨씬 재미있죠. 한마디로 서울이나 부산이 훨씬 데카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얘기하는 룸살롱, 2차 그런 게 전체적으로 많이 없어졌어요. 아예 섹스를 목적으로 가는 곳이나 아니면 '블로우 잡(blow job)'을 위해 잠시 가는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나 있죠. 하지만 술 마시고, 쇼도 보고, 바로 위층이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 파트너와 섹스하는 곳이 일상적으로 퍼져 있는 나라는 아마 한국이나 태국, 필리핀 정도 밖에 없을 겁니다.

일본에서는 '잃어버린 2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비슷했어요. 그러나 요즘은 보통 남자들은 저녁과 함께 술을 간단히 마시 수 있는 '이자카야'에 가든지, 보통 '바(bar)'라고 하는 '스나쿠(snack)'이라는 술집에 가서 여자들하고 떠들고 이야기 하든지 그래요. 비즈니스가 있어야 약간 고급스러운 '라운지'나 '쿠라부(club)' 정도? 이런 곳에도 한국처럼 룸이라는 게 없죠. 그냥 오픈된 공간에서 아가씨들이 옆에 앉아 술 따르고, 노래하는, 한마디로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건전하게 노는 곳이에요. 아가씨를 더듬는다든지 가슴에 손을 대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로요. 한국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죠. 그래도 술값이 꽤 비싸서 보통 월급쟁이들은 가기 힘듭니다.

좀 더 자세히 실상을 들여다보면 요즘 도쿄나 오사카 같은 데 쿠라부에서 일하는 여자 중 거의 절반 가까이 한국여성이에요. 한국 룸살롱에서 일했던 여성도 있지만 아무런 경험 없이 취업이 안 돼서 오는 여대 졸업생도 많다고 하네요. 근데 그 여자들은 취업비자를 받아 들어온 게 아니라 불법으로 일하면서 남자들이 요구하면, 2차까지 돈만 주면 냉큼 나간다고 하더군요.

'도항(同伴)'이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호스티스들이 술집에 손님을 데리고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요. 자기 근무 시간 이외에 같이 잠을 잔다든지 데이트를 한다든지 해서 다음 날 술집으로 데려온다는 것입니다. 업소나 마담들이  2차에 대해 일일이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죠. 그게 모두다 호스티스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런데 이 같은 도항은 반드시 정해진 것 만큼 실적을 올려야 하는 의무사항이에요.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온 여자들은 여권이나 신분증을 기둥서방들이나 마담한테 빼앗기고, 몸을 굴려서 돈을 벌겠다고 하는 얘긴데요. 하지만 결국 실적을 못 채울 뿐 아니라 빚만 지고는 진짜 하류 사창가로 팔려 나가는 사람들도 있고요. 정말 비참한 얘기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 안타깝습니다."

하기는 한국의 룸살롱 문화도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이 '퍼스트 무버'가 되기는 어려워도 '베스트 팔로워'로서는 출중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룸살롱을 거쳐 '풀 살롱'에다 '이미지클럽'으로 진보했고, '사파리 초이스', '미러룸 초이스' 등 세부적인 면도 나날이 발전했다.

10여 년 전인가 성매매특별법이라는 게 제정이 된 다음 전국의 전통적인 집창촌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반인들이 사무실 겸 집으로 쓰는 도심 오피스텔에서 별천지 섹스산업으로 돈을 버는 여성들, 그 여성들을 공급하는 남성들을 합쳐서 도대체 몇 명인가.

이제는 국제화가 돼서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는 물론 필리핀, 태국, 베트남 등 유라시아 대륙의 수많은 국가들에서 온 여성들도 전화만 하면 언제든지 품을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심지어 탈북 여성들까지도 일자리를 못 찾고 성매매업소로 흘러드는 비극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찍이 1960년대부터 일본인 현지처로 외화를 벌더니 이젠 아예 일본으로 자국 여성을 진출시켜 일본의 성매매에 첨병이 되게 만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다.

이런 우울한 현실을 일본인 이시이를 통해 새삼스럽게 확인한 K는 말없이 술잔을 비운다. 이시이는 K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한다.

"K씨, 일본말도 꽤 잘 하고, 마스크도 괜찮아서 화면에 정말 잘 나오는 거 아세요? 제가 매니저를 맡을 테니까 TV프로에 고정으로 출연해 보지 않으실래요? 정식으로 계약한 다음 섭외는 제가 알아서 하고요. 어때요."

"제가 그럴 자격이 있나요?"

"그럼요. 일단 TV에 매력적인 얼굴이고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일본과 한국의 사이가 안 좋을 때에 한국인 입장에서 한국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설명해 주는 것도 아주 좋은 아이템이잖아요. 한국 문화에 대한 소개는 기본이고요. 어때요?"

"그렇게 하세요. 이시이가 그 방면에는 프로거든요."

김나영도 좋은 생각이라며 거든다.

"그럼, 그렇게 하죠. 뭐"

얼떨결에 구두 약속이 이뤄진다. 합의가 끝나자 이시이가 즐겁게 제안한다.

"그러면, 지금부터 파티를 시작해 봅시다. 나영, 이 가게에서 최고 에이스를 K씨에게 선 보여줘."

김나영이 자리를 비켜준다. 그리고 잠시 후  아가씨 두 명이 들어온다. 이시이는 다짜고짜 한 여자를 K 곁에 앉힌다.

"오늘 최선을 다해서 이분을 황홀하게 해드려야 해. 한 잔 따라 드리고."

"안녕하세요. 안나라고 합니다. 한국 분이시라고요?"

"네, 그래요."

"저 서울하고 부산, 그리고 전주도 가봤어요. 올림픽 열리는 평창에 가서 스키도 타봤고요."

"아, 그래요. 좋은 추억 많이 남겼어요?"

"네. 일본하고는 많이 달라서 재미있었어요. 이번 겨울에도 평창에 가고 싶어요. 메밀로 만든 부침개가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시죠? 혹시 한국에 가면 또 뵐 수 있을까요?"

"아, 뭐. 아직은 모르겠어요. 이번 겨울에 잠시 들어가기는 해야 할 텐데."

시답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 괜히 혼자 있을 미키에게 죄짓는 마음이 든다.

'늦는다고만 얘기하고 아직 전화도 안 해서 걱정할 텐데. 미키와 함께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쉽네.'

벌써 위스키 1병이 바닥났다. 술은 금세 새로 들여왔다. K는 취하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안나가 두 손으로 정성을 다해 따라주는 술잔을 거절하지 못했다. 알콜 40도의 술이 목을 태운다. 오크통 속 21년이라는 시간을 녹인 액체가 K의 식도를 뜨겁게 자극한다.

갑자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취기가 올라온다. 얼음이 채워진 일본식 말차를  마셔본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생각뿐이다. 안나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시이의 노랫소리가 늘어진다. 아득하게 가라앉는다. 몸과 마음이 한 순간 붕 떠오른 듯하다. 하지만 이내 조각조각 파편으로 흩어져 끝없는 심연으로 깊숙이 무너져 내린다. 영화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기나긴 페이드아웃처럼.

미키는 지난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침에 K가 늦는다고 말을 했지만 아무리 늦어도 자정을 넘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저녁을 먹고 온다고 해서 특별히 밥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무심코 기다리다 시간이 자정에 다가갈수록 더욱 걱정이 됐다. 늘 그러는 사람 같았어도 덜 걱정을 했겠다. 이렇게 늦은 것은 처음이다.

예전 어릴 적 사업가였던 아버지를 늦게까지 기다리다 잠 든 기억이 났다.  엄마의 마음이 지금 자신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나이가 먹는다는 것은 어떨 때는 억울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먹기 전에는 못 느꼈던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괜찮은 통과의례라는 생각이 든다.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

'교통사고라도 났나. 아니면 어디서 술 마시고 완전히 취해 버렸나. 아니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럴 리는 없어. 더욱이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낯선 도쿄에서.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연락도 없는 거지.'

몇 번 연락을 해봤지만 핸드폰은 꺼져있다. 미키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 느끼는 속상함, 초조함, 안타까움, 불안함이 범벅이 된, 좋지 않은 기분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그래서 힘들고 괴롭다.

덥다. 끈끈하다. 불쾌지수가 견디기 힘들만큼 높은 한여름 밤 에어컨이 꺼져서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밖은 어슴푸레 날이 밝는다. 잠에 덜 깬 멍한 상태다. 가위눌렸던 것 같다. 꿈은 꿨는데 생각이 잘 안 난다.

다만 K와 사랑을 나눈 꿈이 스냅사진처럼 한 장, 한 장 떠오른다. 인간이란 게 참 알 수 없다. 전날 밤새도록 기다리던 사람이 안 들어와서 걱정되는 가운데에도 섹스하는 꿈을 꾸고는 기억을 잡으려 애쓴다. 불안과 섹스. 사람이 극도로 불안하게 되면 섹스에 탐닉한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다고 달라지나. 잠시 불안을 잊을 수는 있을까.

아직 K가 돌아온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때서야 진정한 불안이 달려든다. 핸드폰을 다시 해보지만 어젯밤처럼 꺼져있다. 김윤아에게 전화한다.

"어제 K씨가 집에 안 들어왔어요. 혹시 다른 연락 받은 거 없어요?"

"아뇨. 어제 퇴근하시면서 약속있다는 얘기만 하셨지 다른 것은 없었어요."

잠자다 전화를 받은 김윤아의 목소리는 미키와 달리 평온하다. 전화를 끊은 뒤 미키는 안절부절못할 뿐이다.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출근 시간에 쫓겨 주섬주섬 되는 대로 옷을 걸친다. 방송국으로 가는 길에 다시 김윤아에게 전화하지만 달라진 게 없다. 초조한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숨을 가다듬고 한 번 크게 쉰다.

'무슨 일 있겠어. 저녁 때 다시 볼 수 있겠지.'

마음이라도 편하게 먹지 않으면, 하루를 견디기가 힘들 것이 분명하다. 평소처럼 방송국 근처 카페에서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들고 불안한 마음을 속여 본다.


태그:#히비키 21년, #블로우 잡, #스나쿠, #사파리 초이스, #미러룸 초이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