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짧아진 가을 해가 아쉬워 이른 아침부터 일하러 나가면 허옇게 서리가 내려 있어서 손을 호호 불기도 한다. 찬 공기를 가르며 곰배를 휘두르면 손 등은 더 시리다. 마치 골프채를 휘두르듯이 허공을 크게 휘저으며 목표물을 타격하고 나면 다시 빠르게 다른 목표물을 겨냥하여 내리친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며 흙덩이가 산산이 부서지기도 하지만 속이 얼어 있으면 그냥 굴러 갈 뿐이다. 논에 보리나 밀을 심는 모습이다.

보리농사는 소작료도 없어

물론 지금은 대한민국 농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흙덩이를 잘게 부수면서 씨앗을 덮는 일은 이제 사람의 몫이 아니다. 옛날 옛적 추억속의 일이 되고 말았다. 요즘은 나락을 베어 낸 논에 겨울작물을 심지 않는 땅이 더 많다.

콤바인이 타작을 하고 나면 논에 열병식 하듯 나란히 깔려있던 볏짚도 베일러(볏짚을 둘둘 말아 압축하는 기계)들이 누비면서 곤포사일리지(베일러가 만들어 놓은 500Kg쯤 되는 둥그런 사료용 볏짚 다발)를 만들어서 다 가지고 간다.

그래서 땅은 텅 비고 맨살을 드러낸다. 쓸쓸한 가을 들녘이 더 쓸쓸해진다. 그 덕분에 수입농산물이 넘쳐나고 농지이용률은 뚝 떨어졌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크게 내려 간 것은 경작지가 줄어 든 것도 원인이지만 농지이용률(경작률) 저하도 무시할 수 없다.

보리농사로 대표되는 2모작 농사를 할 때는 농지이용률이 높았다. 지금은 104% 남짓이지만 60년대에는 152%나 되었었다. 그때는 벼를 베어 내기가 무섭게 보리나 밀을 심었다. 추위가 오기 전에 심어서 적어도 잎이 4-5장 나와야 겨울에 얼어 죽지 않기 때문이다. 입동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리를 심었다.
'보리띠' 깨 가며 보리갈이 하는 옛날 농부들
▲ 보리갈이 '보리띠' 깨 가며 보리갈이 하는 옛날 농부들
ⓒ 전새날

관련사진보기


요새는 벌이가 좋은 마늘이나 양파를 심는 농가가 많아졌지만 그런 양념작물보다는 오로지 보리나 밀을 중심으로 식량작물을 심었다. 밀보다는 보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보리 한 포기는 보리밥 세 숟갈이 된다. 그러니 다른 걸 심고 말고 할 게 아니다.

화훼나 과수, 원예보다도 먹고 살 식량생산에 전념하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보리농사를 중히 여긴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바로 소작료 문제다. 지주 논을 부쳐 먹는 소작농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시절에 소작료는 소작쟁의의 단골 원인이었다.

그러나 보리농사 등 2모작 농사는 소작료가 없었다. 벼농사는 보통 50%에서 6-70%나 되는 소작료를 내야했지만 2모작 농사는 모두 소작인 몫이다 보니 양식 마련이 절박한 농부들이 보리농사에 전념하는 것은 당연하다.

후치로 보릿골을 타고

벼를 베기 전부터 논을 말리는 것은 보리를 심기 전에 해야 하는 필수 작업이다. 밀은 물기가 남아있는 논이라도 그런대로 자라지만 보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걷이는 밀려 있는데 첫 서리라도 올 것 같으면 농부들은 아랫논에는 아직 타작도 안 했어도 윗논을 갈고 씨를 뿌렸다. 쟁기로 논을 갈아엎고 쓰레질로 흙을 바수는데 그래도 벼 밑동은 흙덩이가 뭉쳐져 있어서 곰배로 내리쳐 흙덩이를 깨야 했다. 이걸 보리띠 친다고 한다.

'띠'는 덩어리라는 말이다. 벼 뿌리의 흙덩이인데도 이를 벼띠나 나락띠라고 부르지 않고 보리띠라고 부르는 게 재미있다. 아마도 보리를 심을 곳이니까 보리 중심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농띠'라는 말이 있는데 공부는 안하고 못된 짓만 하면서 부모 속을 썩이는 말썽꾸러기나 게으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원래 농띠는 농사용어로 두드려도 잘 깨지지 않는 얼어 있는 보리띠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보리띠 치기가 힘드니까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나락 포기를 피해서 후치로 골을 타고 그 후치 밥(후치질 하면서 파 올려 진 흙들)으로 골에 뿌린 씨앗을 묻었다. 이를 보릿골 탄다고 한다. 쟁기는 땅을 깊게 갈아 180도 뒤집지만 후치는 지방에 따라 극젱이라고도 불렸는데 쟁기보다 작고 수직에 가까운 모양으로 농부가 조절하는 기울기에 따라 45도 정도로 흙을 갈아엎기도 하고 골의 양옆으로 같은 양의 흙을 퍼 올리기도 하는 농기구다.

후치로 보릿골을 타는 것은 아무데서나 할 수는 없다. 줄모 내기를 한 논이라야 해당되는 말이다. 벌모(논배미가 작거나 일손이 없어서 못줄을 대고 모를 심지 못하고 줄 없이 눈대중으로 삐뚤빼뚤 심은 모)를 심은 논은 나락포기가 나란히 있지 않아서 후치작업으로 보리갈이를 하기는 어렵다.
이모작은 하지 않는 요즘 논에는 볏집을 말아 포장한 곤포 사이로 아이들이 하교한다
▲ 곤포사일리지 이모작은 하지 않는 요즘 논에는 볏집을 말아 포장한 곤포 사이로 아이들이 하교한다
ⓒ 전새날

관련사진보기


당시에는 보릿거름으로 재를 뿌리기도 했다. 재는 염기성이라 산성화 된 땅을 중화한다. 가을가뭄이 심하거나 보리논을 장만 해 놓고 다른 일 때문에 여러 날 지나서 땅이 너무 건조한 상태라면 돼지거름에 보리 씨앗을 섞어 뿌리기도 했다. 잘 완숙된 돼지거름은 습기가 많다. 여기에 씨앗을 섞어 뿌리고 흙을 덮은 뒤에 가볍게 밟아주면 가뭄도 안탈뿐더러 싹이 빨리 트고 발아율도 높아진다. 그렇지만 노동력이 워낙 많이 드는 농법이라 따라 해 보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겉보리와 쌀보리

조선시대에는 월동작물이면서 화본과 작물인 보리나 밀을 콩과작물이면서 여름작물인 콩과 연 2모작 농사짓기를 권장했었다. 이런 작부는 콩과작물의 질소고정이라는 특성 상 토양의 비옥도를 보존하는 농법이라 식량작물 증산에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맥전조세법'이라 하여 보리에 부과하던 세금을 콩에도 부과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만큼 그루갈이가 보편화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보리는 크게 겉보리와 쌀보리로 나뉘는데 겉보리는 길쭉하고 색이 짙지만 쌀보리는 둥글고 알이 쌀처럼 하얗다. 그래서 쌀보리는 밥에 놔먹기 좋지만 겉보리보다 씹는 맛이 덜하다. 왠지 버석버석하고 억센 느낌이 있다. 겉보리는 한번 삶았다가 밥에 놔먹으면 부드럽고 구수하게 먹을 수 있다.

이름에서도 엿보이듯이 겉보리는 씨방 벽에서 분비되는 점액물질로 인해 익은 후에 껍질이 씨알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쌀보리는 껍질이 씨알에서 잘 떨어지는 것이다. 70년대에 춘곡 수매를 하면 쌀보리가 훨씬 비쌌다. 껍질이 없다시피 하니까 방아를 찧으면 수량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한가마 찧으면 쌀보리는 50되 정도 나오지만 겉보리는 40되가 채 못 된다. 대신 돼지먹이가 되는 등겨가 많이 나온다.

쌀보리는 추위에 약해서 남부지방에 많이 재배하지만 작황이 좋아도 소출량은 겉보리를 따라가지 못한다. 70-80% 수준이 안 된다. 월동작물인데 추위에 약하다면 수확량이 적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껍질을 다 벗겨 놓은 보리쌀은 어느 것이 더 비쌀까? 이번에는 반대다. 겉보리쌀이 쌀보리쌀보다 조금 비싸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평가하기도 하지만 겉보리쌀이 밥맛도 좋고 엿기름을 내거나 차를 끓이기에도 더 좋기 때문이다.

태평농법으로 손 쉬워진 보리농사

하동에 사는 이영문선생이 태평농법이라는 것을 시도하면서 보리농사가 쉬워졌다. 태평농법으로 짓는 보리농사는 콤바인으로 벼 베기를 하면서 동시에 보리씨앗을 뿌린다. 특수 제작한 콤바인이 그 역할을 하니까 벼 베기와 보리 파종이 동시에 이뤄지는 것이다.

콤바인이라는 농기계가 없는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보리씨앗을 맨 논에 뿌리고 볏짚으로 덮는 식이 되니 일손이 많이 준 것이다. 흙으로 묻는 것보다는 새가 쪼아 먹는 등 발아율이 떨어지지만 보통 200평 한 마지기당 20Kg 하는 평균 파종양보다 조금 더 뿌리면 된다.

태평농법 아니라 뭐가 등장해도 보리농사가 신나는 순간은 딴 데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한쪽에서는 나락을 베서 나락단을 세우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타작을 하고 또 한편에서는 보리갈이를 하나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 때에 나락 가마니 빼 돌리려 비자금 마련하는 재미가 바로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타작마당에서 나락 가마니를 짊어지고 집으로 나르면서 그 집 아들을 필두로 몇 사람이 모의를 해 가지고는 친구 집이나 옆집 아래채로 나락 가마니 한두 개를 빼 돌려서 밀린 주막집 외상 술값을 갚거나 장터를 찾아다닐 수 있는 비자금을 장만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보리갈이 하는 바로 이때라는 것이다. 공소시효도 다 지난 지금 뒤늦게 옛 추억을 실토하는 노인들이 시골 마을마다 있으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살림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글은 전희식. 그림은 전새날이 그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보리갈이, #전새날, #곤포사일리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