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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 가는 시월입니다. 요즈음은 밤마다 별빛이 쏟아집니다. 여름에도 봄에도 또 겨울에도 별빛은 늘 쏟아지는데, 가을에 쏟아지는 별은 한결 초롱초롱하구나 싶습니다. 첫가을에는 풀벌레 노랫소리를 꽤 크게 듣습니다. 한가을에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제법 누그러집니다. 늦가을에는 바람이 무척 차가울 테니 풀벌레 노랫소리가 모두 끊어질 테지요.

풀벌레하고 개구리는 철에 맞추어 노래하지만, 멧새는 한 해 내내 노래합니다. 딱새나 박새나 참새처럼 조그마한 텃새는 한 해 내내 마을이나 시골집을 오가면서 부산스레 노래하는데, 세 해쯤 앞에서부터 마을 참새 몇 마리가 겨우내 우리 집 처마에서 겨울나기를 합니다. 그러께에는 딱새 두 마리가 겨우내 빈 제비집에서 겨울나기를 함께 했습니다.

이 작은 새들은 처마 밑이나 제비집에 살짝 깃들어 겨울을 나는 동안 새벽이며 아침이며 낮이며 저녁이며 노래를 들려줍니다. 함께 사니까 노래를 들려줍니다. 함께 살면서 기쁨이랑 즐거움을 노래로 들려줍니다.

아늑한 도시 삶 버리고 시골로 가다

(김선영 글·사진 / 마루비 펴냄 / 2015.09. / 15000원)
▲ <가족의 시골> (김선영 글·사진 / 마루비 펴냄 / 2015.09. / 15000원)
ⓒ 마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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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안동에서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집을 수리하고 있다. 오늘은 집을 가로막고 서 있던 은행나무를 베어내니 햇볕이 잘 들어오게 되었고, 낡은 외벽을 보강하고…." - <가족의 시골> 2012년 8월 12일 중에서

"안락하고 예쁜 나의 아파트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이렇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을 운명이라 생각한다." - <가족의 시골> 2012년 8월 15일 중에서

김선영님의 이녁 시골살이 이야기를 다룬 <가족의 시골>을 읽습니다. 김선영님은 도시에서 누리던 삶을 "안락하고 예쁜 나날"로 여깁니다. 아마 다른 도시 이웃도 김선영님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리라 봅니다. 참말 도시는 도시대로 아늑하거나 예쁘다고 여길 만합니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이녁 손으로 짓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 매우 많으므로, 손쉬우면서 아늑한 데다가 예쁘다고 할 만하지요.

그러면, 시골은 안 아늑하거나 안 손쉽거나 안 예쁠까요? 오로지 도시 눈길로 보자면 시골은 모든 것이 허술하거나 어수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시골은 도시하고 견주어 사람이 대단히 적어요. 그러니 버스도 드물고 택시를 타려면 택시 삯마저 비쌉니다. 사람이 대단히 적은 시골은 '구매력'이 떨어지니까 물건값은 비싸면서도 가짓수가 적습니다. 사람이 대단히 적은 시골에는 극장이나 놀이기구가 들어설 턱이 없습니다. 시골에 백화점을 지으려고 하는 기업은 없습니다. 교통이 나쁘다고 하는 시골에는 공장조차 들어서기 어렵습니다.

삼백 해를 더 묵었다고 하는 시골집
 삼백 해를 더 묵었다고 하는 시골집
ⓒ 김선영/마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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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지는 초저녁, 자전거를 타고 마을 한 바퀴. 마을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환경이 바뀐 것뿐인데 물욕도 줄어드는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초겨울처럼 스산한 바람이 분다. 오늘 이사 떡을 돌리면서 아이는 마을 할머니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다." - <가족의 시골> 2012년 9월 16일 중에서

"얼마 전, 안동시청에 갔다가 우리가 사는 집이 지어진 지가 300년이 더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300년 된 흙과 300년 된 목재가 집 어딘가를 받치고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 <가족의 시골> 2012년 10월 6일 중에서

김선영님은 시골살이 여러 해에 무엇을 보았을까요? 김선영님하고 살림을 함께 짓는 곁님은 시골에서 '스키니진'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느끼면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어버이를 따라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긴 아이는 시골에서 또래 동무를 사귈 수 없을 테지만 어떤 이웃이나 동무를 사귈 수 있을까요?

시골이 삶 터로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도시가 삶 자리로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살고 싶은 데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살고 싶은 데에서 기쁜 하루를 짓기 마련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어렵잖게 헤아릴 만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고단한 사람은 '물 맑고 바람 상큼한 시골'에서 넉넉하고 느긋하게 지내면 아픔을 씻고 고단함도 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똑같이 합니다.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면 아픈 데가 사라진다'고 하는 말도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똑같이 합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면서 흙을 만지려는 사람이 부쩍 늘어요. 할매와 할배는 도시에서 골목 집을 가꾸거나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어떻게든 텃밭을 마련하기 마련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하기에 흙을 만지려 할 수도 있으나, 흙을 만지면서 흙내음하고 풀 내음을 맡는 동안 저절로 몸이 푸르면서 싱그럽게 깨어나는 줄 느끼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마음 다스리기 좋은 시골만의 장점

무청을 말리기
 무청을 말리기
ⓒ 김선영/마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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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특권이라도 얻은 듯이 저 쏟아질 듯한 별빛을 혼자 마주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벅차다." - <가족의 시골> 2012년 12월 7일 중에서

"나는 쇼핑센터와 공원산책을 놓아주고 작업용 목장갑과 툇마루 사색을 얻었다. 아이는 단짝친구를 놓아주고 닭 두 마리와 밤하늘 별빛을 얻었다." - <가족의 시골> 2012년 12월 31일 중에서

어느 모로 보면 시골은 사람이 없어서 좋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적기에 '더 많은 사람한테서 더 많은 돈을 뽑아내자'고 하는 다툼이 생길 틈이 처음부터 없는 시골인 터라, 도시하고 다르게 느긋하거나 넉넉한 마음이 될 만한 터전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거나 적거나 드문 시골에는 자동차나 버스가 지나갈 일조차 매우 드물거나 아예 없으니 대단히 조용하거나 고요합니다.

이리하여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조용히 공부하거나 고요히 마음을 다스리기에 아주 즐겁습니다.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시끄러운 데에서도 북새통에 휩쓸리지 않고 공부를 할 텐데, 새와 개구리와 풀벌레와 바람이 함께 들려주는 싱그러운 노랫가락이 흐르는 데에서 공부한다면 훨씬 느긋하면서 너그러운 마음이 될 만해요.

가만히 보면, 도시에는 흙도 풀도 나무도 없으므로 돈을 엄청나게 들여서 공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서울에 있는 청계천 같은 곳은 물줄기가 흐르도록 하려고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씁니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숲을 그대로 마주하거나 껴안으면 됩니다.

숲은 숲 그대로 두면 풀하고 나무하고 벌레하고 새하고 짐승이 서로 슬기로운 얼거리를 이루어 짙푸르며 아름다운 숨결을 이룹니다. 시골 사람은 숲을 그대로 건사하면서 그냥 호젓하게 숲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시골에서는 공원이 따로 없이 어디나 공원입니다. 마당도 고샅도 바닷가도 숲도 모두 공원이지요.

오래 묵은 마루를 걸레로 훔치기
 오래 묵은 마루를 걸레로 훔치기
ⓒ 김선영/마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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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보슬하고 촉촉한 흙을 만지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밭은 작게 만들기로 했다." - <가족의 시골> 2013년 3월 15일 중에서

"엄마, 바람이 나한테 와서 지나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지나가. 엄마도 나처럼 이렇게 해 봐. 좋다." - <가족의 시골> 2013년 4월 28일 중에서

<가족의 시골>이라는 책을 쓸 수 있던 바탕을 돌아봅니다. 김선영님이나 네 식구가 도시에서 그대로 머물렀다면 네 식구는 <가족의 시골> 같은 책을 쓸 수 없습니다. 뭐, "가족의 도시" 같은 책을 쓸 만했을 테지만, 도시 사람이 쓰는 도시 이야기는 여행이나 쇼핑이나 관광이나 답사나 탐방 같은 이야기에서 머뭅니다. 도시에서 살며 '우리 식구가 날마다 웃고 노래하는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어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작가'나 '시인'이 아니어도 저절로 글을 쓰고 저절로 사진을 찍으며 저절로 노래를 부릅니다.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면서 누리는 놀랍고 아름다우면서 기쁜 삶을 저절로 글이나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아이는 도시에서도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결'을 틀림없이 느꼈을 텐데, 도시에서도 이런 말이 문득 튀어나왔을까요? 도시에도 틀림없이 꽃밭이 있어서 흙을 보기는 했을 테지만, 도시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흙이 얼마나 보슬보슬하거나 촉촉한가를 제대로 느낀 적이 있었을까요?

노래가 된 바람 소리, 글도 마치 이렇게...

오래 묵은 집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깨어난다.
 오래 묵은 집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깨어난다.
ⓒ 김선영/마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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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밭이 바람이 흔들려 솨아 소리를 낸다. 겁 없는 아이는 집으로 들어오라고 아무리 불러도, 저렇게 서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마을을 보고 서 있다." - <가족의 시골> 2013년 8월 10일 중에서

"마당을 쓸고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고양이 한 마리 다가와 마당으로 따뜻하게 내려쬐는 햇볕에 눕는다." - <가족의 시골> 2014년 1월 2일 중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글이 흐릅니다. 바람 소리는 그저 소리로 그치지 않고 노래가 됩니다. 이윽고 바람 노래인 줄 깨닫습니다. 바람 노래를 가만히 귀여겨듣다가 흥얼흥얼 콧노래가 흐르고, 이 콧노래는 어느새 연필을 사각이면서 새롭게 빚는 글로 태어납니다.

봄에는 봄 노래를 글로 씁니다. 여름에는 여름 노래를 글로 써요. 가을에는 가을 노래를 글로 쓰다가, 겨울에는 겨울 노래를 글로 쓰지요.

철마다 다른 노래가 내 손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다달이 다른 노래가 내 손에서 태어나요. 더욱이, 날마다 다르면서 새로운 노래가 바로 내 손에서 태어납니다. 이 두 손으로 모든 노래를 손수 짓습니다. 참말 내 손은 내 삶을 짓는 손이요, 그야말로 내 손은 내 사랑을 가꾸는 손입니다. 시골에서 살며 살림을 가꾸는 동안 내 손이 얼마나 고우면서 대단한가 하는 대목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작은 등불로도 호젓한 밤이 아름답다
 작은 등불로도 호젓한 밤이 아름답다
ⓒ 김선영/마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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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수수밭을 지나며 이파리를 손바닥에 스치며 걷는다.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 <가족의 시골> 2014년 9월 15일 중에서

"앞마당에 핀 민들레잎을 떼어내 씹어 보았다. 쓰다. 은행나무 아래는 온통 쑥이 자라 있다. 조금 떼어와 뜨거운 물에 우려내 마시니, 향긋하다. 자연이 보이고, 그걸 쉽게 입에 가져가는 데까지 3년쯤 걸렸다." - <가족의 시골> 2014년 11월 27일 중에서

시골에서는 버리는 풀이 없습니다. 아니, 풀은 버릴 수 없습니다. 남새 씨앗을 심었기에 남새 말고 다른 풀은 뽑아내기 일쑤라지만, 남새 아닌 다른 풀 가운데 나물이 되지 않는 풀은 없습니다. 나물로 삼지 않는 풀이라면 바구니를 짜거나 엮는 풀이요, 예부터 옷을 지으려고 실을 얻는 풀입니다. 또는 풀 짐승이 즐겨 먹으며 사람한테 이바지하는 풀이에요. 이 밖에 약으로 쓰는 풀이 논밭 자락 둘레에 흔히 돋습니다.

먹거나 쓰는 풀이 아니어도 풀은 흙이 기름지도록 북돋웁니다. 풀이 자라면서 뿌리로 흙을 단단히 붙잡기에 큰비가 쏟아져도 밭둑이 안 무너지도록 지켜 줍니다. 풀을 베어서 밭고랑에 놓으면 온갖 풀벌레가 이 둘레로 찾아들어서 사느라 풀짚은 곧 새로운 흙으로 거듭납니다.

풀이 있으니 나무도 튼튼히 서고, 풀이 없으면 나무는 뿌리가 허옇게 드러나서 괴로워하다가 때때로 쓰러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시골살이란 풀 살이라고 할 만합니다. 푸성귀도 풀이고 나물도 풀이거든요. 남새밭도 풀씨를 심어서 가꾸는 셈이요, 나락도 보리도 밀도 수수도 모두 풀 알(풀 열매)이에요.

꼭 도시를 떠나서 시골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시를 즐겁게 여겨서 살더라도 '풀'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읽으며 어루만질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새롭게 피어나리라 느낍니다. 보리차는 무엇이고 녹차는 무엇이며 민들레차나 쑥차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마시는 차는 무엇을 끓일까요. 풀잎을, 그러니까 온 들과 숲과 마을에 돋는 풀잎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멋없을까요.

<가족의 시골>을 쓴 김선영님네 밥상에 민들레 나물이 오를까요. 이제는 오르겠지요. 고들빼기도, 씀바귀도, 소리쟁이도, 돌나물도, 비름나물도, 까마중도, 모시도, 유채도, 모두 나물이 되어 오르겠지요. 망개잎이나 하눌타리잎도, 콩잎이나 뽕잎도, 제비꽃 조그마한 잎사귀나 달개비 잎사귀까지 모두 맛나며 싱그러운 '이웃'이면서 나물로 우리 곁에 있는 줄 언제나 즐겁게 마주하겠지요.

덧붙이는 글 | <가족의 시골>(김선영 글·사진 / 마루비 펴냄 / 2015.09. / 15000원)

이 글은 최종규 시민기자의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가족의 시골

김선영 글.사진, 마루비(2015)


태그:#가족의 시골, #김선영, #시골살이, #시골노래,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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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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