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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른 시민들.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 오른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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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와 한국전쟁

그와 나는 해방둥이다. 나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장터마을에 살았고, 그는 이웃 선산군 고아면 평촌마을에서 살았다. 그래서 초등학교는 달랐다. 나는 구미초등학교 출신인데, 그는 고아면 구운초등학교 출신이었다. 그 무렵 내 고향에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아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도 숱하게 많았다.

그 당시 구미 일대 부잣집 아이들은 주로 대구시내 중학교로 진학했고, 대부분 아이들은 자기 고장 중학교에 진학했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중학 진학률은 매우 저조하여, 구미중학교에서는 한 학급도 모자라, 한 학년 두 학급 가운데 한 학급은 동반이라 하여 남자반이고, 다른 한 학급은 서반이라 하여 남녀공학 학급이었다.

우리들은 경주로 가면서 자연히 50여 년 전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 얘기와 친구들, 특히 누가 누구를 좋아했는데 어떻게 되었다는 까까머리 시절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쫓아다니던 그 여학생들은 대부분 우리 선배들의 부인이 되었는데, 이제는 모두 호호 할머니나 일부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승용차는 경주 불국사 옆 숙소에 닿았다. 우리는 숙소에 여장을 푼 뒤 곧장 숙소 로비에 있는 생맥주 집으로 가서 마음 속 깊은 얘기를 나눴다.

그는 구미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 시내의 한 고교로, 나는 서울 시내의 한 고교로 진학했기에 중학교 졸업 후 거의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나와 초등학교 동기가 아니라, 그의 유년시절 성장과정은 거의 몰랐다. 그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유년시절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여섯 살 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그해 여름, 그의 가족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낙동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소를 몰면서도 피난 등짐을 졌고, 그도 어께에 작은 봇짐을 메고 피난길에 나섰다. 당시 큰 형님은 징집되어 이미 전장(戰場)에 나가 있었고, 둘째 형은 피난길에 강제 징병을 피하고자 고향집에 혼자 남아 있었다. 피난은 그의 아버지 어머니와 셋째 형과 누나와 그 등, 이렇게 다섯 식구가 나섰다.

폭발사고로 장애아가 되다

그렇게 여섯 살 배기 어린 소년은 걸어서 군위 효령과 영천에서 청도를 거쳐 피난을 갔다. 그는 지금도 사진이나 TV 화면에 피난길의 군상 속에 또래 어린 소년을 보면, 당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고 했다.

그는 피난을 다녀온 이듬해 어느 늦은 봄날 낙동강 건너 밭에 땅콩을 심으러 가는 아버지와 형님들 따라 나섰으나 일에 방해가 된다고 기어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혼자 집에 돌아와 심심하던 차에 건넌방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작은 쇠붙이를 들고 호기심에 컴퍼스로 뾰족한(뇌관) 곳을 '콕' 찔러보다가 그만 폭발사고를 당했다.

그 대인 살상 폭발물은 한국전쟁 때 낙동강 전선 현장에 허드러지게 남겨진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의 형이 그걸 주워다가 낙동강에서 고기잡이할 때 쓰려고 몰래 숨겨둔 것을 그가 건드려 그만 폭발한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마당에서 누에 뽕잎을 따고 있었는데, '쾅' 하는 폭음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때 그는 혼절했고, 희뿌옇게 집 모퉁이의 대추나무가 어른 거렸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그에게 짧고도 희미한 근사(近死) 체험이었다.

그 폭발물 사고로 그는 오른 손가락이 세 개나 잘려 나갔다. 엄지손가락은 한 마디만 남아 있고 둘째손가락은 아예 다 잘렸고, 세 째 손가락은 한 마디 남아 있었다. 요즘 같으면 즉시 병원으로 가서 떨어져나간 뼈를 살려 피식 수술을 하였다면 손가락을 자를 것까지 없었을 테지만, 당시에는 그런 사고가 잦았고, 의술도 형편없는 때여서 그냥 치료하기 편하게 잘라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그 정도의 부상으로 끝난 것만도 천행이었다.

그는 그때 폭발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교 때는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를 규명하고자 연세대 철학과로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 입학 후 그의 고뇌는 더욱 깊어져 한 학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후, 2학기 개학 때는 서울 학교로 가는 대신 포항 바닷가로 죽음의 여행을 떠났다.

그는 한밤중 포항의 어는 여관방에 엎드려 혼자 실컷 우는데, 문득 어머니의 환상이 나타났다. 그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일어나 다시 서울 학교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끝내 서울에서 학업을 중단한 채 귀향하여 이듬해(1965년) 봄 대구 소재 한국사회사업대학 특수교육학과에 진학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다

김병하 대구대 명예교수(특수교육관 앞에서)
 김병하 대구대 명예교수(특수교육관 앞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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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사람들과 친지들은 그가 서울로 가더니 아이 버렸다고 쑤군댔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않고 추수한 벼를 팔아 새로이 대학입학금을 대주셨다.

그는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철학을 접목시켜 '교육철학'을 평생 전공케 되었고, 석박사 학위도 모두 그것으로 땄다. 졸업 후에는 곧장 모교 강단에 서게 되었다.

그는 모교 재임 중 워싱톤 DC에 있는 농(聾)특성화 대학인 Gallaudet University에 객원연구교수로 공부하는 등 이후 한국 특수교육에 기초를 다졌다.

마침내 그의 학문업적이 알려져 2009년에는 세계인명사전(Marquis 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 되고, 이듬해 2010년에는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에서 선정한 21세기 지식인 2천명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의 폭발사고로 오른 손에 장애를 입은 게 마음의 상처로 남아 성장과정에서는 부끄러움이 많았고, 청년시절에는 한때 염세철학에 빠지기도 했지만,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제 길을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극복하여 마침내 특수교육자로, 곧 장애인의 길잡이가 되었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내 마음에 속내를 다 들어 내놓고
신에게 가장 솔직해 지는 것이다. …

한 번도 가지 않은 낯선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신이 보낸 사람이 틀림없다.
- 박철 목사(부산 대연동 '좁은길교회')

그의 속 깊은 이야기는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나란히 누운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55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들의 세상 살아온 이야기 속에 경주의 밤은 스멀스멀 깊어갔다.

나는 그의 세상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생은 새옹지마요, 자신의 노력에 따라 역경은 오히려 스스로를 단련시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을 내 눈과 귀로써 확인할 수 있었다.

"장애인은 나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대구대학교 특수교육역사관 안내 책자에 새겨진 경구다. 우리 모두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다.

석굴암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석굴암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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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태그:#김병하, #특수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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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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