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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명절 추석이었지만 나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마침 귀향하지 않은 청년들에게 관심이 있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취업준비생으로서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기자는 내려가지 못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물어봤는데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던 이유는 취업 못하고 돈 못 벌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추석에 고향에 가지 않은 이유

어떤 구체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른들 쓴소리가 싫어서 안 간다고 하면 철없는 사람 같아 보여서 이것저것 한다고 하기는 했지만 사람취급 안 해주는 곳에 가기 싫은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이유 아닌가. 나에게 지금의 현실은 사회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 받지 못하고 있는 좌절감이다. 그러나 언론에서 원하는 모습은 나의 맨얼굴이 아니었다.

언론에는 달관세대, 88만원 세대, N포세대등 지금의 청년을 진단하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다. 그 중에 가장 기분 나쁜 진단은 3포, 5포, 7포 등 N포 세대 담론이다. 처음에는 연애, 결혼, 주택구입을 포기하더니, 얼마 전에는 취업과 내 집 마련을 포기했고, 올해 들어서는 인간관계와 희망도 포기했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는 건강과 외모까지 포기했다고 하니 그 다음은 목숨이라는 말도 실소를 머금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있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문제는 xx세대라는 담론이 감동도 재미도 없다는 데 있다. 이제는 다시 언급하는 것도 미안해진 김난도씨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방송인 유병재씨가 던진 "아프면 환자지, 개XX야! 뭐가 청춘이야? 뭐가 청춘이야, 이 씨X놈아! 뭐가 청춘이야! 이 개XX야!"라는 호통이 재미와 통쾌함을 주는 것은 유병재씨의 말이 지금의 나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청년의 속마음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뉴스에서는 연일 청년문제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통계청의 청년고용동향에 따르면 2014년 청년고용률은 40.7%고, 대학교육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2014년 말 학자금대출의 누적 금액은 10조 7천억 원에 이른다고 하는데 2500만 원에 이르는 나의 학자금 대출을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다.

학자금 대출뿐 아니라 생활비 대출을 포함하여 빚을 감당하지 못하여, 신용불량자들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해서 신청하는 '워크아웃'을 신청한 20대가 66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평균 실업률의 2배, 3배 이상 되는 청년 실업률은 청년문제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는 단골손님이다.

뉴스에서 이야기하는 청년문제는 소득과 일자리 문제로 관통한다. 그래서 정부는 청년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노동계와 진보진영에서는 노동개혁은 노동개악이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자리는 중요한 문제지만 문제를 청년의 입장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년에게 취업은 어떤 의미일까? 자아실현의 문제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생계의 문제다. 그리고 돈을 번다는 것은 사회에서 사람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통계 속에 존재하는 많은 청년들은 사람구실 못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들에게 일자리 문제는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청년들의 감수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올바른 이야기도 청년들의 가슴을 울릴 수 없을 것이다. 가슴을 울릴 수 없다면 청년들의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과한 기대다.

청년은 언제나 그 사회의 권력을 지니지 못한 약자다. 동시에 이 현실을 가장 오래 감내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의 문제는 청년의 문제로 드러난다. 그리고 해결의 주인공으로도 호명 받는다.

그러나 청년은 그런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미운오리역도 함께 맡고 있다. 청년들이 노력을 하지 않아서,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해서 문제라는 소리는 매번 나온다. 청년문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청년들을 위해 뭘 하자는 이야기는 없고, 청년이 뭘 원하는지 물어보려 하지 않으니 미래세대의 주인공으로서 참 슬프다.

길거리에 붙은 현수막들

영화 <잉투기>의 한 장면
 영화 <잉투기>의 한 장면
ⓒ 무비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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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청년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세력이 있을까? 노동시장 구조개혁(악)의 문제는 많은 청년들이 관심가지고 있는 주제다. 길거리에는 여러 세력들이 붙인 현수막들 속에서 여러 세력들이 청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러 현수막들 속에서 나에게 와 닫는 구호를 아직 만나지 못 했다는 것이 아쉽다.

"노동개혁으로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
"임금피크제로 자녀에게 일자리를"

이 두 개는 전국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새누리당의 현수막 구호다. 이 구호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 말일까? 아쉽지만 나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명절에 거실에 둘러앉아서 사람구실도 못하고 있는 청년들을 걱정하는 어르신들을 향한 호소다. 사람구실도 못하고 있는 손자, 손녀, 조카들을 생각하는 어르신들이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그 내용의 참, 거짓을 떠나서 그나마 새누리당의 이 구호가 훌륭한 이유는 하나, 말을 걸고자 하는 대상이 명확하며 둘, 그 내용이 구체적이고 셋, 해결의 주체가 확실하고,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청년들을 위해서 뭐라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 봉급을 깎아 저를 채용한다고요?"라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현수막을 보고는 감탄했다.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임금피크제에 대해 가장 쉽게 설명한 구호가 아닐까? 현실을 잘 설명한 문구지만 아쉽게도 거기서 멈춘다.

왜냐하면 아버지 봉급을 깎아서라도 내가 채용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이 지금 청년들이 느끼고 있을 감정이기 때문이다. 청년의 절망은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구실을 하고 싶은 욕망이다. 서글프지만 이 현수막은 나에게 씁쓸함을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민주노총이나 학교 내의 진보적인 학생단체들의 현수막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악)이 노동자들, 청년들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것에 동감한다. 그러나 이들의 구호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이들 역시 나에게 말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노동개혁(악) 해도 청년실업 해결 안 됩니다.", "쉬운 해고, 평생 비정규직" 정말 말해주고 싶다. "저도 알아요..."

"청년 실업 엄마 아빠 잘못 아니에요!" 이 구호를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고 누구에게 하는 말인 걸까? 너무도 순하고 착해 빠져가지고 엄마 아빠를 걱정하고 있는 청년을 생각하니 상상속의 동물처럼 느껴진다. 말하는 사람이 청년이고 상대는 엄마 아빠니, 이 구호는 노동계가 원하는 청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평균나이는 43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정말 청년들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고, 청년들이 함께 싸워주기를 바란다면, 착한 청년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노동개악을 막아낼 착한 청년들을 찾기 전에 민주노총 내의 청년 조합원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 그들이 구호를 만들고 노동조합 밖의 청년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민주노총에도 20대 30대 조합원이 있을 거 아닌가. 민주노총의 싸움에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총이 청년들을 위해 싸우겠다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학교를 지나며 가장 괴리감을 느끼는 구호는 역설적이게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 소위 '청년학생들'의 구호다. "학생도 예비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문제에 관심 가져야 한다"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다만 이 주장은 별로 와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알바를 할 때는 최저임금 문제의 당사자고, 이력서를 쓸 때는 구직자고, 취업시즌이 지나면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내가 노동문제에 있어서 당사자라고 느끼고 있다. 다만 나는 정부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고용보험 미 가입 노동자이며 휴학, 고시준비 등으로 사회에서는 취업포기자로 잡히는 통계의 일부분이고 노동조합 조직률 10%로도 안 되는 대한민국에서는 기존의 노동조합이 포괄하지 못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그러나 예비 노동자라는 노동개혁(악)의 당사자가 아닌 방관자로 만들어 버린다.

"청년학생들도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겠습니다"라는 구호는 어떤 울림도 주지 않는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이 구호야 말로 청년을 문제의 당사자가 아니게 만들어 버린다. 노동계가 원하는 청년의 모습을 충실히 재연하는 것에 불과하다. 얼마 전에 민주노총의 파업집회가 있었다는데 그런 자리에서 "조합원 여러분들은 명절 때 청년들 괴롭히지 마세요. 청년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위해서 싸워주시겠어요?"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생각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그리고 말할 수단도 없으니, 그냥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 말고 어떤 방도가 있겠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청년의 말을 듣는, 아니 말을 거는 세력이 없다. 하다못해 청년을 위해 뭘 하겠다는 세력은 현수막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은 새누리당 밖에 없어 보이니 슬픈 현실이다. 사람들에게 청년은 가능성을 가진 미래 세대이지만 청년에게 청년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약자이고, 현실의 어려움을 다방면으로 체감하지만 나아질 미래가 보이지 않아 좌절하는 세대다.

청년의 무력감과 절망은 나아질 미래가 없다는 좌절이며, 희망의 부재다. 희망은 어떤 구체적인 정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다. 진정 청년문제가 해결되길 원한다면 청년을 위해 청년에게 말을 걸어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절망과 욕망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이기적이라고 욕하지 말라

한 가지 떠오르는 단상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얼마 전 영화 <사도>가 개봉했다. 남들이 다 본다고 하니 나도 보러갔는데, 사람들이 연령대별로 눈물 흘리는 부분이 달랐다는 점이 흥미롭다.

20대들은 사도세자에게 감정이입했다면 40,50대 부모들은 영조에게 감정이입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학부모들이 자녀들과 영화 사도를 보고 나서 자식들이 사도세자처럼 엇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인터뷰 기사를 보았는데, 엇나가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처럼 들리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4~5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스터디룸 부스가 생각나면서 청년들에게 삶은 이미 현대판 사도세자 아니었을까? 영화를 본 청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회가 시키는 대로 살아온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월급을 줄여서 자식에게 준다는 정부여당의 노동개혁안은 개혁인지 개악인지를 떠나서 일면 통쾌한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이기적이라고 욕하지 말라, 이것이 우리가 직면해야하는 청년세대의 절망의 현주소이자 맨 얼굴이다. 절망의 현주소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발 절망의 현주소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싸우지 말자는 말로 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처음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태그:#노동개혁, #청년운동, #청년,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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