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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브러시 패션타투'
'낙동강 馬구마구 축제'
'청정자연의 선물, 영양고추愛 빠지다'
'必 so Good'….

남발되는 외래어와 맞춤법과 문장구조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조어의 범람. 한글이 처한 서글픈 현실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진술을 새삼 반복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특정 공동체가 사용하는 말과 글은 그 민족 역사의 총체이며, 그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다. 그런 까닭에 제 나라 말과 글을 올바로 사용하고, 언어전통을 탐구·계승하는 것은 비단 언어학자들만의 책무가 아니다. 그런데, 세종이 한글을 창제·반포한 1446년 이후 한국인들은 이런 당연명제를 제대로 지켜가고 있을까.

'김천 직지나이트투어'부터 '봉황대 뮤직스퀘어'까지

'직지나이트투어'의 정체
 '직지나이트투어'의 정체
ⓒ 김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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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긍정적 답변을 내놓기는 힘들 듯하다. 한글의 혼탁과 왜곡은 이미 어제오늘 지적된 게 아니다. 최근엔 그 혼탁함이 지방자치단체가 후원·주최하는 각종 축제와 문화행사에까지 번져 한글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부르고 있다.

포항시 영일대해수욕장에서 매년 여름 개최되는 '포항국제불빛축제'. 한여름 밤의 낭만을 찾아 시민들이 몰리는 이 축제의 세부 행사는 'Daily 뮤직불꽃쇼', '불빛 버스킹페스티벌' 등으로 구성됐다. 무슨 뜻인지 짐작은 가능하나 굳이 문법적으로도 어색한 이런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매일 열리는 음악불꽃축제', '불빛 거리공연축제'라고 하면 될 것을.

경주시가 매주 금요일 사적 제512호 봉황대고분 특설무대에서 여는 '봉황대 뮤직스퀘어', 김천시가 주최하는 '김천 직지나이트투어', 봉화군 은어축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에어브러시 패션타투', 영주시의 대표 축제인 한국선비문화축제 부수행사 '生(생)과 死(사)의 퍼포먼스', 울진군이 주최한 '워터피아 페스티벌' 등도 축제와 행사 명칭에 외래어를 남용한 사례로 보인다.

또, 대구시립국악단 수석단원인 대금 연주자 양성필씨가 결성한 악단의 이름은 '월드뮤직 프로젝트그룹 必 so Good'이다. 국악인조차 어설픈 외래어 작명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세계화'는 외국·외래어를 남용하는 게 아닌 제 것을 지키며 발전시키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게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다.

'낙동강 馬구마구 축제', 대체 넌 누구냐

구미 낙동강 馬구마구 축제 홍보 포스터
 구미 낙동강 馬구마구 축제 홍보 포스터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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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일 구미시에서 열린 '구미 낙동강 馬구마구 축제'는 얼핏 봐서는 어떤 성격의 행사인지 그 의미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말(馬)과 구미의 '구(龜)'를 합성한 듯한데, '전국학생승마선수권대회 겸 유소년 승마대회'란 부제를 확인하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맥락의 고리가 약한 합성어의 사용이 가져온 폐해다. 한글을 써온 사람들이 한글을 읽고도 모호함을 느낀다면, 이는 대중성을 지향해야 할 축제의 명칭으론 부적절한 게 아닐까.

문경시의 전통찻사발축제 프로그램 중 하나인 '힐링다례' 역시 치유를 뜻하는 영어단어 힐링(healing)과 차 마시는 예법을 지칭한 다례(茶禮)를 합성해 신조어를 만들었는데 무릎을 칠 아이디어라고 보기 어렵다. '치유를 위한 차 예절'이라 했어도 얼마든지 의미 전달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영양군이 주최하는 '영양고추 H.O.T 페스티벌'의 주제로 소개된 '청정자연의 선물, 영양고추愛(애) 빠지다' 역시 영양고추와 사랑(愛)이란 두 단어로 조어를 만들었으나 신선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와 함께 칠곡군의 '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개최하는 축제인데도, 세부 프로그램 명칭을 '부대행사'라 하면 되지, 왜 '프린지 페스티벌'로 정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관객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외래어와 조어의 남발, 한글은 어디로 가나

외래어의 과다한 사용과 무분별한 합성어와 조어의 남발, 축제 홍보문구에서 가끔씩 눈에 띄는 비문은 비단 앞서 언급한 지자체의 축제와 문화행사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경상북도 내 23개 시·군 누리집만 봐도 유사한 사례가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국내 지자체는 한 해 1만2000여 건에 가까운 축제와 행사를 개최한다. 지자체마다 비슷한 유형의 축제를 경쟁적으로 열다보니 변별성은 떨어지고 관람객 만족도 또한 낮은 게 사실. 그런 까닭에 "혈세를 낭비하면서까지 이런 축제를 열어야 하나"라는 목소리도 높다. 경제적 관점에선 낙제점을 받고 있는 것.

여기에 더해 한글의 계승과 연구·발전에 힘을 보태야 할 지방정부가 오히려 한글의 혼탁에 일조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지자체 축제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이들의 고민과 개선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말과 글을 뺏는다는 건 인간의 영혼을 빼앗는 것과 다름없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한국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던 건 단순히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민족에게서 민족혼을 지우려했던 고난도의 정치·문화적 책략이었다.

제 것을 지키고 다듬어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없다면 한민족 역사와 문화의 총체인 한글 역시 언제건 사라질 수 있다. '무조건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자'는 국수적 애국주의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569돌 한글날을 맞는 서글픈 단상일 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것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태그:#한글날, #외래어, #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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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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