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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사는 지난 2010년 창간 50주년 기념식과 사옥 신축 기공식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가 5년 만인 올해 ‘창간 7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1945년 10월 7일 창간한, 인천지역 언론의 뿌리인 <대중일보>를 <경인일보>의 원뿌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인천지역 학계, 언론계, 시민사회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경인일보사는 지난 2010년 창간 50주년 기념식과 사옥 신축 기공식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가 5년 만인 올해 ‘창간 7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1945년 10월 7일 창간한, 인천지역 언론의 뿌리인 <대중일보>를 <경인일보>의 원뿌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는 인천지역 학계, 언론계, 시민사회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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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사는 7일 '창간 70주년'을 맞았다며 본사가 있는 경기도 수원과 인천에서 대규모 기념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인천지역 다른 언론인들은 '대중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식'을 열고 "경인일보 창간 70주년 주장은 어불성설에 억지"라고 비판했다.

<경인일보>는 7일자(지령 12593호) 신문을 70면으로 증면해 발간했다. '창간기획 그때'에선 <경인일보>의 제호 변천사를 소개했다. '<경인일보>의 원뿌리 <대중일보>의 제호는 취재·배포 권역이 아닌 지향성을 담았다며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신문 이름'이라고 했다.

경인일보사는 이날 경기도 문화의전당과 인천 연수구 라마다 송도 호텔에서 기념행사도 열었다. 경기도에선 창간 기념 합창대회를, 인천에선 기념식과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인천에 본사를 둔 다른 언론들은 이날 오전 중구 신포동에 있는 <경기매일신문> 옛 사옥 앞에서 '대중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식'을 조촐하게 열었다. 기념식엔 <경인방송>, <시사인천>, <NIB 남인천방송>, <인천뉴스>, <인천IN>, <인천일보>와 인천지역 언론계 원로, 학계 인사 등이 함께했다.

"경인일보의 대중일보 승계는 어불성설에 억지"
 
김양수 전 경기매일신문 논설위원.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신 독재 정권에 의해 자행된 언론 통폐합 과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김양수 전 경기매일신문 논설위원.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신 독재 정권에 의해 자행된 언론 통폐합 과정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 한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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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는) 자랑스러운 신문이 아니다. (1973년 유신 독재정권의 언론 통폐합 당시) 같이 문을 닫았으면 모를까. 어떤 면에서 보면 배신행위다. (대중일보 승계는) 어불성설이며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에 제일 중요한 것은 양심적으로 정도(正道)를 걷는 것인데, 신문(경인일보)이 양심이 없다. 반성해야한다."

지팡이에 의지해 '대중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식'에 나타난 김양수(82) 전 <경기매일신문> 논설위원은 '<경인일보>의 <대중일보> 승계와 창간 70주년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경기매일신문>은 <대중일보>를 승계한 신문이었다.

김 전 논설위원은 기념식에서 "<대중일보> 창간은 <조선일보><동아일보> 복간 시점보다 빨랐다"며 "<대중일보>를 승계한 <경기매일신문> 경영진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끝에 언론 통폐합이 이뤄졌고, 이로 인해 인천지역 언론은 15년 동안 암흑기를 지냈다"고 증언했다.

김학균 원로 시인도 "언론은 직선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왜곡이나 번복이 있으면 안 된다. 오늘 어떤 신문(경인일보)이 <대중일보>를 자기 것이라고 번복했는데, 이는 왜곡이다. 인천 문화를 창달하고 발전시켜야할 언론사가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를 아는 시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중일보> 어떤 신문인가?

<대중일보>는 광복의 기쁨이 봇물처럼 터져 흐른 1945년 10월 7일 인천 중구 중앙동에서 창간한 인천 언론의 효시다. 자본금과 인쇄 보급망 등, 신문사의 요건을 제대로 갖춰 발행했다.

<대중일보>의 창간정신은 창간사에 잘 나타나 있다. 창간사는 '우리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부면이 일직이적의 수중에서 왜곡되고 양탈되고 말살됐던 것을 인제야 우리 손으로 탈환해 새로운 토우에 건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위대한 임무가 우리의 두 어깨 우에 지여진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오직 불편부당의 진정한 언론의 사명을 다할 것을 우리는 만천하 독자에게 공약하는 바이다. (중략) 인천은 우리 수도의 관문이며 동시에 공업산업의 심장부인 만큼 대외적 교역이 이로조차 번창하고 국내적 생산이 융성할 것이니 국가와 함께 본지가 같이 성장하면서 (이하 생략)'와 같이 정론직필의 정신, 인천의 언론이 그 정체성임을 명확히 했다.

특히 '민족 반역자 처단' 즉, 친일세력 청산에 관심을 가졌으며, '해방운동 36년사'와 윤봉길·이봉창 등 '3열사 추념기' 등을 연재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창간 초기 '말살하자 왜말, 바로잡자 우리말'이란 계도성 기사를 게재하고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한글 반포 날에는 제목을 포함한 모든 지면을 한글로 제작하기도 했다. 여성 인권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1945년 12월 25일자에는 '우리 여성도 완전 해방하라'는 기사를 실었으며, 같은 해 11월 13일자엔 '여기자 1명 모집'이란 여성 기자 공채를 알리는 사고(社告)를 내보내기도 했다.

<대중일보>는 이후 <인천신보>(1950), <기호일보>(1957), <경기매일신문>(1960)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대중일보>의 후신 <경기매일신문>은 1973년 역사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다. 100만 인구가 사는 인천에 터를 잡고 27년간 지령 9018호의 신문을 발행한 인천의 유력 신문이 군사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힌 것이다. 1973년 유신정권은 '1도 1사'란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다.

결국 진보적 색채를 지녔던 <경기매일신문>은 수원의 <연합신문>에 흡수됐다. 이때 인천 언론의 한 줄기인 <경기일보>도 함께 통폐합됐다. 인천의 언론 2개를 흡수한 <연합신문>은 제호를 <경기신문>으로 개칭하며 1973년 9월 1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경기신문>은 이후 2차 언론 통폐합이 진행된 이후인 1982년 <경인일보>로 제호를 바꿨다.

인천지역 언론사들은 7일 <대중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대중일보>가 <경인일보>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천의 자산임을 다시 확인하며 <대중일보>의 정론직필 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짐했다.
 인천지역 언론사들은 7일 <대중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대중일보>가 <경인일보>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천의 자산임을 다시 확인하며 <대중일보>의 정론직필 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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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의 느닷없는 <대중일보> 승계

<경인일보>는 지난 2013년 느닷없이 <대중일보> 지령을 승계한다며 창간연도를 1945년으로 앞당기더니, 2년 뒤인 올해는 창간 일까지 <대중일보>의 창간일인 10월 7일로 변경하면서 창간 70주년을 맞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천지역 언론인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해왔다. <대중일보>의 성격이 민간 주도의 진보 신문이었던 반면에, <경인일보>는 유신정권의 언론 통폐합으로 탄생한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탄생 배경도 문제지만, 지역적으로 인천에 본사를 두고 있던 <대중일보>가 수원이 본사인 <경인일보>의 전신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제기됐다.

1973년 언론 통폐합 당시 <경기매일신문>이 <연합신문>에 자발적으로 통합됐다면 <경인일보>가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이 통합이지 사실상 <경기매일신문>은 강제 폐간된 것이다.

이와 관련, 김진국 <인천일보> 논설실장은 "이는 심하게 말하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합의 하에 병합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는 나라를 빼앗긴 것이지, 다른 나라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라고 주장했다.

<경인일보>가 자신의 뿌리가 <대중일보>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역사적 근거는 미미해 보인다.

먼저 <경인일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경기신문> 창간호 1973년 9월 1일자에 <대중일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의식하며 행동하는 신문'이란 창간사에 언론사 3개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경기매일신문>의 전신인 <대중일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발행인은 "<경기신문>은 경기 3사가 자율통합을 단행함으로써 창출된 역사적 산물인 동시에 유신시대가 지향하는 책임언론의 구현을 구체화시킨 언론계 내부의 조용한 개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유신을 찬양했다.

또한 1982년 3월 1일, 제호를 <경인일보>로 바꾸면서도 당시 사설에 <대중일보>의 '대중'이란 단어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경인일보>는 사설에서 "1960년 국가적 어려운 시기에 인천에서 <인천신문>으로 출발했고, 9년 뒤 경기도 수원으로 본사를 이전했다"고 밝혔다.

또한 "4년 뒤 3사 통합이란 경기 언론사의 보기 드문 진통을 맞아 <경기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고, 역사의 과정 속에서 경기 언론으로 맥을 이어왔던 산증인"이라고만 밝혔다.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되자, 인천에 대한 보도의 비중을 높이면서 제호를 '경기'에서 '경인'으로 변경한 셈이다.

더욱이 <경인일보>는 2010년 창간 50주년 기념식과 사옥 신축 기공식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불과 5년 만에 '창간 7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 걸 지켜봐야하는 인천지역 언론계와 학계 시민사회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인천(isisa.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경인일보, #대중일보, #경기매일신문, #언론통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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