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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에서 이어집니다.)

K를 향한 다케우치의 세 번째 적의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살의는 이제 진화한다. 단순히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너무 관대하다. 보다 처절하게 K를 파괴시키면서 미키의 가슴을 도려내는, 창의적인 징벌이 필요하다.

담배를 입에 물고 K에 대항 파일을 뒤적인다. 특히 최근 K가 일본에 와서 동호회에 올린 글들을 유심히 살핀다. 그중 하나가 신경에 거슬린다.

"요즘 한국과 일본 외교관계가 껄끄러워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로마시대 극작가 플라우투스의 '악한 이웃은 악운(惡運)을 가져다 준다'라는 말을 인용해 멋대로 해석합니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이 서로 악한 이웃이 되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악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반면 예로부터 악한 이웃을 둔 국가에게는 그 자체가 악운이라며 서로 상대방을 겨냥한 듯 두 나라 갈등을 부추기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두 나라 관계가 시끄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대부분 일본인과 한국인들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려 애쓰고, 서로 문화를 존중하며, 서로 다름을 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국 극소수 정치인과 그릇된 인식을 가진 언론, 그리고 애정결핍 트라우마에 대해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한 줌 극우파 인사들 목소리가 이런 두 나라 국민들 두터운 우정을 깨뜨리려 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이웃은 그 이웃의 거울이라고 합니다. 수 천 년 이웃한 일본과 한국, 두 이웃은 이사(移徙)를 할 수 없는 붙박이 운명입니다. 그럴진대 서로 오해하고, 반목하고, 그래서 심각한 갈등을 유발시켜 양국 국민들 가슴에 멍이 들게 하는 것은 자해일 뿐입니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영화 '러브레터'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그룹 'X-Japan'에 열광하듯, 일본 사람들은 드라마 '겨울의 소나타'를 보고 감동하고, 걸그룹 '카라' 춤과 노래를 따라합니다. 몇 년 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는 한국인 구자철과 일본인 오카자키 신지가 호흡을 맞춰 많은 골을 만들어 냈고, 일본과 한국은 같은 시간에 그 경기를 보며 환호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차이점이 많지만 그만큼 공통점도 많습니다. 같은 아시아에 살고 있고, 같은 한자를 쓰고 있으며, 중국과 달리 말 순서도 같습니다. 전문가들 견해를 빌리자면, 무엇보다 일본인과 한국인은 유전적 거리가 거의 '0'에 가까울 만큼 유사성을 보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형제나 다름없는 두 나라가 옥신각신 싸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불행한 일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있어야 한국과 일본의 감정적 충돌이 없어질 것이라는 점도 명백합니다. 미국 언론인이자 소설가였던 에드가 왓슨 하우는 '악마는 속일 수 있지만 이웃은 속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역사 진실은 두 나라 국민들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도 인정하는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편향적으로 왜곡된 역사에는 반드시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듯 현재 일한-한일 간 갈등을, 그 갈등을 일으키는 양국 정치인들 행태를 관객 입장에서 무심코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거짓과 악의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입니다. 민주주의 시대 단죄는 선거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제라도 미쳐가는 양국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 힘을 보여주는 것만이 우리 두 나라 국민들이 해야 할 과제이자 의무라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과 동시에 서로를 보듬어 안는 사람들의 문화적-예술적 교류가 더욱 활발하고 진지하게 이뤄질 때, 두 나라 사람들은 영원히 서로 다름에 대해 새로워하고, 서로 같은 감정에 울고 웃을 수 있을 겁니다. 그때 프랑스 속담처럼 '이웃이 좋으면 매일 즐겁다'라는 얘기가 양국 국민들 입에서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케우치는 이 글을 '선동'이라고 단정한다. 그럴듯한 논리와 부드러운 말로 포장한 '선거 반역'을 조장한다는 뜻에서다. 교묘하게 양국 정치인들을 겨눴지만, 정작 그 내용은 '일본인들은 일본 우익에 대해 도전하라'는 선전이요 선동이다.

그에게 K를 괴롭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최고의사결정연구단, 바로 대일본을 대표하는 우익이다. 연구단 목표와 지향점에 정면으로 배치하고 있는 K에게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정해지면 단도직입하는 것이 다케우치다.

"후지와라, 태스크포스팀 소집해. 이제 본격적인 작전 개시다."

한국문화라운지에 회원 가입이 폭주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문을 연지 두 달도 채 안됐는데 회원수가 1000명에 가까워졌다. 방송과 잡지에 커뮤니티가 소개된 다음, 처음 개설했을 때처럼 여성을 중심으로 연령의 구분 없이 관심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알음알음 방문자 수도 하루에 1만 건이 훨씬 넘어섰다. 이를 귀신 같이 알아내고는 생활용품 업체에서 광고 제의도 들어올 정도다.

단연 인기를 끄는 것은 K가 올린 글들이다. 한국문화에 대해 궁금증을 풀어주고, 한국인들이 일본문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내용이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지역별로 도쿄에 버금갈 정도로 간사이 지방 회원들이 많다. 그 다음 규슈도 만만치 않다. 동호회 인기가 높아질수록 K가 부담하는 '노동 강도'도 따라서 커졌다. 회원들 댓글에 일일이 답해야 했고, 새로운 내용 글을 쉴 새 없이 올려야 하는 온라인 특성 탓이다.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K는 보람을 느낀다. 처음에는 그저 A그룹 요청대로 일본인들 생활양식과 소비 트렌드를 엿보기 위해 시작한 인터넷 커뮤니티다. 하지만 이젠 이름 그대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대표 커뮤니티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모임도 자주 갖게 된다. 특별히 한국문화에 대해 흥미 있는 사람들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자꾸 만나자고 요청하는 일이 잦다. 한두 번 정중히 사양하지만 계속 거부하기가 어려워 정말 가끔 회합하는데도 바쁘다.

장마가 끝난 8월 들어 날씨가 염천(炎天)이다. 전날 밤 늦게까지 글을 올리느라 늦잠을 잔 K는 커뮤니티 사무실로 오는 길에 점심으로 냉 메밀국수를 먹었다. 서울에서 먹었던 것보다 메밀이 많이 들어가서인지 찰진 맛은 거의 없지만, 메밀 향이 느껴지는 게 괜찮았다.

늦은 오후 축 처진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어 본다. 더위를 식혀주는 에어컨이 하루 종일 켜져 있어 가끔은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냉방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벌써 6시가 훨씬 넘었다. K는 약속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아카사카에서 술집을 하는 회원과 만나는 약속이다. 한국 남성들 '밤 문화'와 일본의 그것과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다며 초대했다. 차를 보낸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핸드폰이 울리고, 바로 1층 로비로 내려간다.

술집 영업부장이라며 명함을 내미는 사람과 인사한다. 그의 안내로 검정색 세단 뒷자리에 앉는다. 재미있는 것은 서울과 도쿄 술집 종사자들 옷차림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점이다. 촌스러울 정도로 원색을 강조해 매우 화려하지 않으면, 느낌 없는 검정색이라는 점이 딱 닮았다. 운전을 하는 영업부장은 검정색 싱글에 셔츠까지 검정색, 구두도 과하리만큼 반짝이는 검정색이다.

영업부장은 공손하게 부탁한다.

"저희 클럽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하이클래스 '이메쿠라(이미지클럽)'입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유발시킨다는 차원에서 클럽으로 모실 때, 눈을 가리는 '블라인드 인비테이션'을 실시하고 있고요. 잠시 불편하시더라도 옆자리에 준비돼 있는 수면용 안대를 착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미지클럽이라. 들어보기는 했다. 서울에도 있다는 얘기를. K가 선호하는 술집의 부류는 아니다. 돈 내고 술 먹는 술집인 것은 맞다. 하지만 술집 룸을 비행기나 병원, 학교처럼 꾸며놓고, 업소 여성이 그 상황에 맞는 승무원, 간호사나 의사, 그리고 여학생 차림으로 나와 퇴폐적인 짓을 남성과 벌인다는 술집이다. 일본에서 유행하다가 한국으로 2000년대 중반쯤부터 넘어온 술집의 한 양상이다.

'한국에서도 못 가본 이미지 클럽을, 일본에 와서 '원조' 이미지 클럽에 가야하나?'

술자리에서 술과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K에게 이른바 '도우미'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더욱이 K는 그런 식으로 남성과 여성의 '신성한 만남'을 돈이 개입해 왜곡시키고, 오염시키는 술집은 태생적으로 싫어한다. 그래서 초대에 싫다는 의사를 표시하고자 한다.

"이미지 클럽이라는 데 안 가면 안 됩니까? 제가 사장님께 따로 전화를 드릴 테니까요."

"안 됩니다. 사장님. 저희 사장님께서 꼭 성심을 다해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만약 못 모시고 간다면, 바로 모가집니다.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애들이 셋이나 되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발 가게까지만 가서 저희 사장님과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K는 이렇게까지 자식까지 내세워 사정사정하는 사람을 뿌리치기에는 마음이 약했다. 대충 안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담배 한 개비 피울 시간을 넘게 달렸다. 그리고 차에서 내린다. 영업부장을 앞세우고 지하로 내려간다. 지하 공간에 특유한 냄새와 조금은 습한 공기는 서울이나 도쿄나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냄새와 음습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진한 로즈마리향을 내뿜는 방향 촛불로 온통 도배했는지 곧 후각은 마비되고 말았다.

K가 안내를 받은 곳은 이미지클럽 방은 아닌 듯하다. 서울 값비싼 룸살롱 VIP룸처럼 고풍스러운 갈색 앤티크 가구에 베이지색 부드러운 천연 가죽 소파가 편안하다. 천장에 드리워진 크리스탈 샹들리에는 여느 것처럼 전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촛불이 켜져 있는 진짜 샹들리에다.

벽에는 고전적인 가구와는 달리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밝은 색 추상화가 몇 점 걸려 있어 대조를 이룬다. 색을 가구와 맞췄는지 갈색 타원형 대리석 탁자는 적당한 냉방에 차가워져 뜨거운 여름 저녁을 냉정하게 만든다.

K가 방을 둘러보고 있을 때, 주최자가 나타났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모와 근사한 체형을 가진 여사장이 들어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김나영입니다."

뜻밖의 한국말, 의외의 한국 이름이다.

"네, K라고 합니다. 한국 분이세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

"아, 저는 재일교포 3세예요. 그런데 아버님께서 귀화해서 저 역시 지금 국적은 일본이랍니다. 김나영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귀화 전 성을 따서 지은 이름이고요. 그러니 한국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그렇군요. 그런데 한국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네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처럼요. 한국에서 오신 분으로 착각했어요. 이쪽 계통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진출해 있다고 들어서요."

"사실이에요. 젊은 아가씨부터 나이든 마담들까지, 그리고 요즘에는 한국 남자 젊은이들도 많이 호스트바에 진출해 있으니까요."

"한국말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워낙 유창합니다."

"어릴 때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맞벌이 부부라 아침에 출근하시면 조부모님께서 저를 돌봐준 덕택이죠. 그리고 대학교에서 제 2외국어로 한국어를 선택했고요. 한국문화원도 많이 들락거렸어요. 게다가 대학 졸업한 다음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안내하는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여러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한국말을 제대로 배운 덕분이죠."

"정말 표준말로 잘 배우셨네요. 반가워요. 한국말 쓰는 분을 만나서요. 사실 저는 '이메쿠라'라고 해서 안 오려 했습니다. 제 취향과는 다르기 때문에요."

"이메쿠라를 원하는 분들께는 그런 서비스도 제공하고, 아닌 분들에게는 그냥 서울 룸살롱처럼 술을 마시는 가게예요."

"근데, 어떻게 저희 커뮤니티를 알고 회원이 되신 건지…."

"우리 가게에 나오는 여대생에게 소개 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한국 아이돌그룹 팬이었는데요. 그래서인지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마침 인터넷 커뮤니티가 생겨서 얼른 회원이 됐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제게도 한 번 가입해 보라고 권하더라고요. 가보니까 다양한 주제로 얘기도 하고, 제가 몰랐던 한국 문화도 많이 알게 됐어요. 덤으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도 알게 됐고요. 그러다보니 가입해서 이렇게 K선생님도 모신 거죠."

"그러시구나. 처음에 몇 번 초대하셨는데, 제가 워낙 바쁘다보니 이제야 뵙게 돼서 미안합니다."

"K선생님 혼자 계시면 심심할 거 같아서 제 친구를 하나 오라고 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당연하죠. 저희 회원님들은 물론이고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모두 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서울이나 별반 다름없이 웨이터들이 김나영이 주문한 술과 안주를 가지고 들어와 테이블을 준비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서울에서 '알잔'이라고 하는 스트레이트 잔은 주지 않고 '온 더 락스(on the rocks)' 잔만 준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과 얼음을 섞어서 희석해 마시는 '온 더 락스'와 거의 같은 '미즈와리(水割り)'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K는 스트레이트를 마시면서 위스키 향을 음미하는 편이라 따로 스트레이트 잔을 부탁한다.

"오늘 술 한 잔 하시면서 제 친구에게 일본 술 문화에 대해 알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그 친구는 한국은 물론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예기획사를 하고 있어서 일본의 술 문화, 밤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니까요."


태그:#플라우투스, #X-JAPAN, #이메쿠라, #이미지클럽, #미즈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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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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