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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카와 준코씨는 일본의 비영리단체 '희망의 씨앗' 부이사장입니다.  동국대학교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고 있기도 하죠.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단체를 연결하고 있는 그는 한국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높습니다.  일본 시민활동가가 본 한국, 한국의시민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편집자주)

일본의 시민단체 '희망의 씨앗' 부이사장 깃카와 준코씨
 일본의 시민단체 '희망의 씨앗' 부이사장 깃카와 준코씨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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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카와 준코'라는 인터뷰이 이름을 들었을 때 내가 했던 바보 같은 생각들. 첫째, 참여연대 회원 중에 일본인이 있다고? 둘째, 큰일 났다. 나 일본어 못 하는데…. 셋째, 일본 사람들은 무척 예의바르다던데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준코씨가 한국말을 잘 하니 걱정 말라는 귀띔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질문지가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으로 대강의 인터뷰 얼개를 짜며 키워드를 추린다. 일본인, 여성, 시민운동, 아베 안보법, 한일 양국 관계…. 그러자 또 다시 걱정이 스멀스멀, 이번 인터뷰도 '특집기사(?)되는 거 아냐? 호모아줌마데스로 사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희망의 씨앗

- 이번이 몇 번째 한국방문인가요? 
"모르겠어요. 하도 많이 왔다 갔다 해서. 이번 달만 해도 오늘이 9월 10일인데 벌써 두 번째니까요. 지난주엔 일본 대학평가학회의 일원으로 왔었고 이번엔 성미산학교에 가려고 왔어요. 제가 지금 동국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데, 교육학부 학생들이 성미산마을을 방문한다고 해서 코디네이터 역할도 하고 제 논문 주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겸사겸사 또 왔지요."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배움터가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 중인 그녀의 직업은 학생. 그러나 그녀에겐 또 하나의 직업이 있다.

"일본에서는 '희망의 씨앗'이란 NPO비영리단체의 부이사장으로 있어요. 최근에 이름을 바꿨는데 처음에는 일본 희망제작소였죠."

- 희망제작소요? 그거 우리나라에 있는 건데?
"맞아요. 그 희망제작소의 일본지부쯤 되는 거예요. 박원순 시장님이 시민운동이나 마을 만들기 등을 한국에서 활성화시키고 싶은데 아무래도 일본이 그 분야에선 더 발달되어 있으니 자료도 얻고 연구도 할 수 있는 거점을 일본 내에 만들고 싶다고 하셔서, 그렇게 시작되었죠. 주로 일본에 연수오시는 한국 분들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고 일본 내 한국유학생들 지원활동도 해요."

일본에 희망제작소가 설립되었던 2007년도엔 주로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연수를 갔다. 지자체장, 공무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3년간 50번 넘게 다녀갈 정도였다. 근데 요즘은 다르다.

"요즘은 오히려 일본사람들이 한국 시민운동에 관심이 많아요. 한국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재직 시절 일본에 없는 제도나 법률들이 많이 만들어졌거든요. 2007년도엔 사회적기업육성법, 2010년엔 협동조합기본법 같은 제도가 생겼는데 일본엔 그런 게 없으니까 배우러 오는 거죠.

지난번 일본 대학평가학회가 한국에 왔던 것도 반값등록금운동 때문이었는데, 반값등록금은 대통령후보들이 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영향력이 컸잖아요. 일본에서 그걸 보고 무척 놀라워했고 한국 시민운동에 관심이 커졌죠. 또 일본에는 참여연대처럼 큰 시민단체들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인지 일본사람들이 보기에 한국의 시민운동은 참 역동적이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거죠."

'희망의 씨앗'도 그렇지만 일본의 시민단체들은 대부분 규모가 작다. 그래서 상근활동가보다 자원활동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장점이 그들에겐 있다.

"일본의 어느 시골에 가도 NPO가 있어요. 일본도 한국처럼 모든 분야에서 중앙집중현상이 심하지만 일본의 시민단체는 규모가 작은 대신 지역에 고르게 분포해 있죠. 그리고 꾸준히 활동하는 것도 일본 시민운동의 장점이에요. 처음 뿌리를 내린 곳에서 잘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오랜만에 찾아가도 그대로 있는 곳이 많아요."

깃카와 준코에게 한국이란

-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일본의 '가족계획협회'라는 여성 NGO에서 일했어요.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게, 교육에 중점을 두는 단체였죠. 제가 처음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1988년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겪은 일 때문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집창촌이 있던 청량리에 내리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길을 가는데 골목 분위기가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들을 붙잡고 호객행위를 하는 할머니들과 그 뒤로 펼쳐진 낯선 풍경을 그녀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다른 행인들은 그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고 있었지만, 그녀에겐 그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전 지금도 가장 심한 차별의 형태는 '무시'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그곳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는데 그 여성들이 받는 돈이 500원이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일해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1988년도 자장면 값은 700원. 그 숫자에 눈을 박은 채 생각에 잠긴다. 모든 사회문제들이 그렇겠지만 성매매문제 또한 여러 사회적 모순들이 얽혀있다. 성별화된 사회구조의 문제 즉, 젠더의 문제 위에 가난이라는 계급적 문제가 또 다시 얹혀 있는 것이다. '(보편의) 여성은 없다'라는 여성주의자들의 외침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엄중한 현실이다. 


- 1988년도에 한국에서 공부하셨으면 청량리 말고도 놀랄 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많았죠. 당시 대학생들이 데모도 많이 했고, 총을 든 군인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보고 놀라기도 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루탄도 맞아봤어요. 또 한국엔 지역감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같은 하숙집 친구들끼리 쟤는 어디 출신이라 저렇다는 식으로 욕할 때도 많이 놀랐어요. 근데 일본에 있을 때도 한국과 관련해서 놀랐던 일들이 많았어요."

그녀가 다니던 대학은 일본에서도 재일한국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 오사카에 있었다. 조선어학을 공부하던 그녀는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어머니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했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면서도 일주일에 2번씩 힘들게 한글을 배우러 오던 할머니들은 놀랍게도 모두 한국 사람이었다.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이 지독한 모순 속에서 그녀의 고민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에 대해 배울수록 고민들이 많아졌어요. 이 할머니들은 왜 여기에 와야만 했는지 그리고 왜 계속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 할머니들은 가끔 제게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도 해주셨어요. 아버지가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이야기부터 식민지시절 일본경찰들에게 맞은 이야기까지….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가슴이 많이 아팠죠."
  
변화의 바람

한국과 관련해서 그녀가 겪은 일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재일한국인 2, 3세들한테는 대놓고 욕을 먹은 적도 있다.

"제가 언어적 관심에서 한국어를 공부한다고 말하면 '당신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어서 좋겠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라며 저를 비난했어요. "


마치 평행선을 그리듯 서로를 미워하는 이웃한 두 나라. 그 틈에 끼인 그녀는 그러나 여전히 그 상황들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당시엔 한국에 기생관광을 오는 일본 남자들도 많았거든요. 그걸 보면서 내가 한국 사람이라도 일본사람들을 미워할 거라 생각했죠."


그러나 꿈적도 안 할 것만 같던 두 나라 관계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요즘엔 한류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많이 바뀌고 관심도 높아졌죠. 물론 반한감정을 지닌 사람들도 있긴 해요. 가장 큰 원인은 언론보도 때문이죠. 한국인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국기에 불을 지르는 장면만 계속 내보내니까요. 한국에 와 본 적이 있거나 저처럼 한국인 친구가 있으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한국인들 모두가 일본 사람을 미워한다고 오해를 하는 거죠."


그녀는 말했다. 한국사람 일본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그녀의 지난 시간들이 그랬듯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시간들도 그녀는 두 나라가 서로 한 발짝 더 다가가게끔 하는데 쏟을 생각이다. 


"두 나라 사이에 이 정도의 교류가 이뤄질 거라고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어요. 과거엔 두 나라의 접점이 과거청산이나 역사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사회적 기업, 마을만들기, 협동조합 등 주제도 다양해지고 만남의 폭도 넓어지고 있죠. 앞으로도 이런 만남이 더 넓고 튼튼해질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어요. 양국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그런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두 국가가 단단히 엮이려면 얼굴과 얼굴이 직접 만나야 해요. 동아시아공동체는 그렇게 해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을 쏟고 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을 쏟고 있다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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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시간

그녀는 한국의 탈춤을 사랑한다. 일본에도 탈춤이 있지만 한국 탈춤이 더 자유롭고 열려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은 한국 사람과 한국 문화에서도 종종 느끼던 것이다.

"한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무척 가까운 것 같아요. 그런 점이 일본과 많이 다른데, 전 그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한국 문화가 더 좋더라고요."

처음에는 그저 한국어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후엔  이 이웃나라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달으며 시작된 한국과의 길고 긴 인연. 그리고 30년 넘게 한국에 대해 배우며 그녀가 보고 느끼고 겪은 것들.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녀가 끝내 밖으로 꺼내지 않는 감정의 회오리들을 더듬어 보았다.

자장면 한 그릇에도 못 미치는 값에 자신을 팔아야했던 가난한 한국의 여성들, 나라를 잃고 모국어마저 잃어 일본인에게 한국말을 배워야 했던 한국 할머니들, 차별받는 삶의 고단함을 타인에 대한 비난으로밖에 풀지 못한 재일한국인들…. 

그 회오리 사이에 멈춰 서서 생각에 잠긴 그녀를 바라본다. 삶의 모순들이 시퍼렇게 날을 세울 때마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하고 또 했을까.

"'어머니학교' 할머니들은 제게 너무 잘해주셨어요. 손녀처럼 예뻐해 주시고 가끔은 용돈도 주시고 사양하면 끝까지 손에 쥐어 주시곤 했죠. 그런 할머니들을 보며 저들은 내 민족 때문에 고통 받았는데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주는 걸까. 그 까닭이 궁금하면서 한편으로는 미안한데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고…. 그저 그들을 계속 만나야 한다는 것, 그 생각만 했어요."

엉킨 세상을 풀어낼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때론 길이 보이지 않아도 뚜벅뚜벅 가야하는 것, 그 쓸쓸한 결말 앞에 선 그녀에게 나는 한 시인의 이야기를 위로라는 이름으로 건넨다. 

"떠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는 그 짧은 순간이 바로 인간의 시간이에요. 우리는 본래 자기중심적이지만, 조금이라도 덜 박절迫切해지려고 입술을 깨무는 것, 아름다움은 그런 것 아닐까요."

그녀가 지나온 그리고 또 다시 지나갈 '인간의 시간'들…. 아름다움은 그런 것일 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호모아줌마데스는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입니다.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했고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습니다.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태그:#깃카와 준코, #일본활동가, #한일교류, #희망의 씨앗, #일본시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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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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